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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나다 Apr 17. 2024

내가 이 칭찬을 받아도 되는 것인가에 대해서

죄책감을 유발하는 칭찬 한마디 


 사건의 발단은 이러하다. 



 같이 수영을 다니는 분이 무심결에 내뱉은 칭찬 한마디 때문이다. 이분은 나이가 오십 정도 되었고 27살의 아들을 하나 자녀로 두고 계신 분이었다. 



 수영 기초반을 같이 하게 되면서 급속도로 친해져서, 수영이 끝난 뒤 샤워하고, 뜨거운 탕에 몸을 담그며 이런저런 수다를 떨었는데, 의외로 대화가 잘 통했다. 



 이 분도 쓸데없는 이런저런 모임들을 싫어했다. 보여주기식 허영과 허세를 극혐 했다. 명품에 관심이 없는데, 모임에서 명품자랑을 하는 사람들 때문에 넌더리가 난다고 했다. 나 또한 열심히 맞장구를 쳤다. 내 평생 명품에 관심 있었던 적이 없었노라고. 이런 내가 그분의 눈에는 좋게 보였나 보다. 뜬금없이 이런 칭찬을 했다.



"자기 남편은 좋겠다. 이렇게 착하고 현명하고 허세 없는 사람을 아내로 둬서."



이분이 내뱉은 나를 향한 호의적인 칭찬을 듣고, 이 칭찬을 내가 받아도 되는 것인가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리고 아무래도 나는 이 칭찬을 받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렸다. 물론 착한 건 인정한다. 이건 주변에서도 많이 듣는 칭찬이니까. 하지만 현명하냐? 는 다른 문제다. 나도 형편없는 판단과 결정들을 한 적이 많다.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적합하지 않은 이유를 밝히고 칭찬을 '정정'하기에도 애매했던 지라, 얼렁뚱땅 넘기고 말았다. 그럼에도 나의 가슴 깊은 곳에 있는 양심은 나를 나무랐다. 내 마음속 양심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이렇게 외쳐댔다. 



'넌 그런 칭찬을 받을 자격이 없어!'라고.. 



 이것은 자신을 엄격하게 다그치는 나의 성격 탓이기도 하겠지만 어찌 되었든 앞으로 누군가의 예비 시어머니가 될 그분 눈에 내가 흡족해 보였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이 나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그분은 탕에 몸을 담그고 자기 아들의 여자친구 흉을 마구 보기 시작했다. 고분고분하고 말 잘 듣고 예의 바르던 아들이 여자친구를 만나면서부터 반항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는 거다. 여자친구는 자기 아들 후배인데도 아들보다 졸업을 1년 늦게 했다고 했다. 그 사실도 탐탁지 않은데, 아르바이트하면서 벌은 돈으로 아들에게 명품 벨트와 옷을 선물해 줬다고 했다. 그런 사치와 허영심이 싫다고 하셨다.



 해외여행을 다니는 거나, 바디프로필을 찍는답시고 다들 보는 sns에 몸매가 훤히 드러난 옷을 입은 사진을 올리는 것도 맘에 안 든다고 했다. 무엇보다 허세가 가득해서 돈을 흥청망청 쓰는 것이 맘에 걸린다고 했다. 아들이 스무 살이 되면서 자신이 이제껏 모은 목돈을 아들에게 주었는데, 3년 사이에 그 돈이 모두 사라졌다고 했다. 그 여자아이를 만나면서 자신의 아들이 돈을 다 썼다는 사실 때문에 그 여자친구를 더더욱 마음에 안 들어했다. 



 돈은 애정이 더 무거운 쪽을 향해 흘러가게 마련이란 생각이 들었다. 엄마가 아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컸기에 목돈을 아들에게 준 것일 테고, 아들은 여자친구를 향한 마음이 크기에 여자친구에게 돈을 썼을 가능성이 크다. 



 아들이 여자친구만 싸고돌고, 자신을 서운하게 하는 것에 충격을 받은 듯했다. 나는 그분께 이런 조언을 드렸다. 



 지금 연애할 땐 꼬셔야 하니까 여자친구를 우선으로 두고 엄마를 서운하게 하지만, 결혼하고 나면 난데없이 효자로 돌변하여 아내는 뒷전이고 엄마 편을 많이 들 테니 너무 서운해 마시라고. 



 이것은 웃긴 일이지만 모든 고부갈등은 이런 식으로 생겨난다. 



 두 여자가 한 남자를 두고 치열하게 다투는 거다. 이 편들다가 저 편들다가 두 손 두 발 다 들고 남자는 빠진다. 하지만 그분께 차마 옆에 계신 남편분께 집중하시고 아들은 남의 남자라 생각하시란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분의 서운함도 어느 정도는 공감이 됐기 때문이다. 엄마도 아들을 떠나보낼 시간이 필요하다. 그것은 수많은 갈등과 상처, 인고의 시간을 거친 뒤 자연스럽게 흘러갈 수순이었다. 



 한편으로는 딸 가진 입장에서 우리 딸들이 예비 시어머니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쩌지, 란 걱정이 들었다. 마음에 안 들어서 사사건건 트집 잡고, 시집살이를 마구 시키면 어떡하지, 란 생각이 들어 대화에 집중할 수 없었다. 



 소중하게 키운 내 딸이 누군가에게 구박을 받고 정서적 폭력을 받는다면 그런 일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 이토록 각자 다른 입장에서는 내 입장만 들여다보게 마련이다. 다른 사람의 입장은 헤아릴 여유도 없이 내 입장에 집중하게 된다. 



 여하튼 다시 돌아와서, 내가 이분의 칭찬을 받아도 되는 것인가에 대한 죄책감의 근원을 생각해 봤더니, 그분 입장에서는 허세 없고 착하고 소박해 보이는 내가 흡족해 보였겠지만, 나는 사실 그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좋은 아내, 좋은 며느리가 아니라는 점,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그분께 자세히 밝힐 수 없다는 자책 때문이었다. 



 물론 소박하고 허세 없고 명품에 관심 없다는 점은 사실이겠지만, 좋은 며느리라는 것은 잘 모르겠다. 



 좋은 며느리란 무엇인가? 주기적으로 안부전화를 하고, 어른들의 비유를 맞추고 집안에 불란 없이 집안의 평화를 위해 오로지 며느리의 인내와 희생을 감내한 게 어른들이 말하는 좋은 며느리의 역할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나는 그런 며느리가 아니다. 그러기엔 내 자아가 강하고, 고분고분하지 않다. 불합리함을 계속 넘길 자신도 없다. 사실은 시어머니와 몇 번의 크고 작은 다툼 끝에 결혼 9년 차에 시어머니와 연락을 끊고 살고 있다고 그분께 자세히 밝힐 수 없었다. 



 그러므로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며느리상이 아니다. 글을 통해 나의 양심의 가책을 조금이나마 덜어본다.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 가까이서 보면 비극인 것처럼, 겉으로 대충 보면 이상적이고 흡족해 보이고, 자세히 뜯어보면 결함 투성이기 마련이다. 인생은 모든 면에서 대충 이런 식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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