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실 사람들과의 만남을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다. 그 모임이 엄마들의 모임이라면 더더욱.
동네에 그 흔한 커피 같이 마실 친구 하나 없어도 아랑곳하지 않았던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몇 가지 이유를 들자면, 엄마들의 무리에 끼려는 의욕이나 시도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혼자만의 시간을 나 스스로 너무나 만족해하며 즐기고 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친구’에 대한 기대치가 현저하게 낮아졌고, ‘친구’에 대한 환상도 어느 정도 희석돼 버렸단 사실도 한몫했다.
약점 잡힐 만한 이야기들을 마구 해대도 아무런 타격이 없을 만한 단짝은 어느새 남편이 되어 있었다. 나의 지지리 궁상인 못난 모습을 보여주는 건 남편 한 사람이면 충분하다 생각했다.
친한 친구를 만드는 것도 에너지가 상당히 들어가는 작업인지라, 그렇잖아도 저질체력과 낮은 에너지 용량으로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고 있는 나에게는 막대한 시간과 에너지를 투입해야 하는 고도의 에너지 용량이 필요한 ‘진정한 친구 만들기 프로젝트’ 같은 것은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그렇게 동네에 친한 사람 하나 없어도 태평하기만 했던 나에게 발등에 불이 붙을 만한 사건이 있었다.
친구를 사귀지 못하는 둘째
올해 학교에 들어간 둘째는 또래 아이들에 비해 키도 작고 덩치도 작았으며 모든 면에서 다른 아이들에 비해 느렸다. 적응하는 속도도 느렸다.
동네에 아는 친구들이 하도 많아서 같이 다닐 때마다 다수의 불특정 아이들과 인사하느라 시간을 지체시키는 우리 동네 핵인싸 첫째와 달리, 둘째는 오랫동안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
놀이터에서 한 아이가 같은 반이라며 다가와 둘째에게 인사했는데, 인사를 같이 하기는커녕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급한 마음에 옆에서 '친구에게 인사해야지.'라고 코치해줘 봤자 둘째는 멀뚱히 서있기만 했다.
둘째는 3월 한 달이 다 지나도록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오늘은 친구에게 먼저 인사했어?', '오늘은 친구 사귀었어?', '오늘 친구 이름 5명 알아오기 미션 성공했어?' 등등 의도치 않아도 조급한 마음에 재촉하는 물음을 던지기 일쑤였다.
엄마가 다그치거나 말거나 둘째는 태평스럽게도, "나는 친구가 0명이야~"라며 농담처럼 외쳤다. 친구가 없는 것에 전혀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속상해하는 것은 엄마 혼자였다.
담임 선생님께 교우관계에 대해 물으면, 선생님이 친구 사귀라고 의도적으로 같은 놀잇감을 갖고 놀도록 환경을 조성하면 둘째는 '친구들과 같은 공간에 있을 뿐, 혼자 놀이에 더 집중한다'라고 하셨다.
내가 친구가 없는 것과, 둘째가 친구를 못 사귀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무엇보다 학교에 들어가 첫 학교생활에 교우관계라는 관문을 성공적으로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내가 엄마들 모임에 나간 이유
나는 다급하게(?) 둘째네 반 엄마들 단톡방에서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첫째 때도 불참했던 커피모임에 참석해서 얼굴 도장을 찍었고, 아이들 놀이터 모임을 나 스스로 모집했으며, 2차 커피모임도 내가 모집했다.
엄마들과 커피 마시는 시간을 아깝다고 생각했던 나는, 친구를 못 사귀는 둘째에게 친구를 만들어 주겠다는 일념 하나로 적극적으로 엄마들 모임에 나가기 시작했다.
엄마들 모임이 불편한 이유
엄마들과 모여서 학급 분위기나 담임 선생님의 교육관, 사교육에 관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지만, 만난 지 4시간이 지나가자 서서히 방전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태권도나 수영, 줄넘기 등 운동만 시키고 일체 사교육을 시키지 않던 나와는 상반된 다른 엄마들의 과열된 사교육 열기를 따라가기 힘들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학원을 5~6개씩 보내고 영어학원은 기본으로 다들 보내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우리 집 아이들은 무료로 보냈던 영어학원을 가기 싫다고 펑펑 울어서 한 달 만에 그만두었다.
침묵을 견디기 힘들어 쓸데없는 말들을 마구 내뱉은 날이면, 나 스스로 광대가 되길 자처한 것 같아 그날 하루는 마음이 괴로웠다.말실수한 부분은 없는지, 실례되는 말을 내뱉진 않았는지, 뭔가 실수하거나 밉보인 부분은 없었는지 스스로 검열하는 과정 자체가 너무나도 피곤했다.
엄마들을 만나고 돌아온 날에는 그날 하루 할 일을 하나도 하지 못했고, 방전되어 오후에 아이들을 잘 챙길 수 없었다. 무엇보다 엄마들과의 대화가 공감이 되지 않았다. 공감되지 않는 이야기를 들으며 맞장구를 치고 끊임없는 리액션을 하는 것 자체가 에너지 소모가 컸다.
엄마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란 생각이 들었다. 이 시간이면 혼자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을 수 있고, 옷을 만들 수 있고, 글을 쓸 수 있고, 운동을 하고도 남을 시간인데. 자꾸 시간이 아까워졌다.
무엇보다 혼자 있을 때의 나보다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의 나의 모습이 맘에 들지 않았다. 인위적이고 어색하고, 동떨어지고 이질감이 느껴졌다.
나의 얄팍한 모성애
나에게 엄마들 모임은 더 이상 한계였다. 둘째에게 친구를 만들어주기 위한 일념으로 적극적으로 얼굴도장을 찍으며 엄마들 모임에 참여하는 것은 3번째가 마지막이었다. 나의 얄팍한 모성애는 세 번이 한계였다.
'엄마는 할 만큼 했으니 이제부터는 네 친구는 네가 알아서 사귀어라~'란 멘트를 남기고 나는 각종 엄마들 모임에서 홀연히 빠져나왔다. 그리고 다시 혼자가 되었다. 모임에서 빠져나와서 다시 혼자가 되었을 때 제일 처음 느꼈던 감정은 '평온함'이었다. 혼자만의 시간이 너무나 그리웠다.
스스로 자리를 찾아간 둘째
둘째가 또래친구에 대해 관심이 없어 보여서, 이대로 영영 친구를 사귀지 못하고, 그 사이 다른 아이들끼리 무리가 형성될까 봐 많이 걱정했었다.
여자 아이들과 어울리기는커녕, 잘생긴 남자아이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남자아이 엄마 번호를 따더니 주말에 놀이터로 불러내기도 하는 등 예상치 못한 색다른 행보를 보였다.
나의 우려와는 달리 둘째는 서서히 적응해 갔다. 단짝 친구는 없지만 놀이터에서 가끔 같은 반 친구들과 어울려 놀았다. 그리고 단짝 친구가 없는 것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둘째는 남자아이들과 노는 걸 좋아했고, 언니나 오빠와 노는 걸 더 좋아했다. 나는 더 이상 걱정하거나 재촉하지 않게 되었다.
어른도 모두와 친하게 지낼 수 없듯이, 둘째도 마음 맞는 친구와 가끔 어울려 놀면 그만이라 생각한다. 친구에게 부끄러워 인사도 못 하고, 친구에게 말 걸지 못해서 쭈뼛거렸기에 처음 물꼬를 터준 데에 엄마의 역할을 다했다고 생각하고 그에 만족한다.
이제 나의 얄팍한 모성애는 바닥이 났고, 자연스럽게 예전 상태로 돌아갔다. 이제 나의 모성애는 소극적 역할을 하는 데에 만족할 것이며, 둘째가 잘 헤쳐 나가기를 응원할 것이다. 둘째의 앞으로의 학교 생활을 응원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