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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나다 Oct 07. 2024

일부 기독교인들의 전도 방식에 대하여

'예수를 믿어야 죽어서 천국에 갑니다!'란 말속에 담긴 함정 


기독교인들이 전도하면서 하는 말 중에는 이런 말이 있다.      



‘예수를 믿으세요! 예수를 믿어야 죽어서 천국에 갑니다!’  

    


 철없던 시절에는 ‘저는 안 갈 거니까 댁이나 실컷 가세요.’라고 속으로 실컷 조롱하고 지나쳤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이 말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다르게 다가왔다.   


   

‘그럼 지금의 삶은 그저 천국으로 가기 위해 죽음을 준비하는 리허설일 뿐인가?’  


   

라는 의문이 들면서, 지금 현재의 삶이 ‘천국을 가기 위해 죽음을 대기하고 기다리는 삶’이란 인상을 받았다. 지금의 삶을 충만하게 살아가는 게 아니라, 고통 없고 평화로운 내세를 위한 ‘수단’이 되어버린 현세의 처지가 불쌍할 지경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본다면 기독교를 믿는 것 또한, ‘천국에 가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나 목적으로 전락해 버릴 것이다. 나는 무교인이고 특정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기독교와 기독교인을 특별히 혐오하거나 거부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식의 전도 방식은 나에게 큰 거부감을 주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그들이 권하는 ‘천국’에 갈 수 있는 조건이 ‘하느님을 믿어야만’ 성립된다는 조건부가 붙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것이 어쩐지 ‘권유’를 가장한 ‘협박’의 어조로 들렸다면 너무 비약이 심한 걸까.      



‘하느님만 믿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 또한 거부감이 들긴 마찬가지였다.     


 

 나는 고등학생 때 과외 시간마다 열렬하게 하느님을 믿으라며 전도하는 과외 선생님을 만난 적이 있다. 



 그 시절에는 공부하기 싫어서 일부러 종교에 관한 이런저런 질문들을 던지며 시간을 허비하길 좋아했다. 미끼를 던지면, 그 과외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수업해야 한다는 자신의 본분도 잊은 채, 전도할 기쁨에 젖어 신나게 떠들어 댔다. 


     

 학부모가 된 지금에 와선, 힘든 노동의 대가로 받은 돈으로 자식들 과외비를 대 주었을 부모님의 입장을 생각하면 죄책감이 가장 먼저 든다. 



 부모님은 공부 머리가 없는 나를 왜 진작 포기하지 못하시고 이런저런 학원과 과외를 시키셨던 것일까. 지금에 와선 깊이 반성하고 있으며 부모님께 한 나의 이러한 행동이 얼마나 철없고 잘못된 것인지 가슴 깊이 뉘우치고 있다. 



 한편으론 그때 당시 쓸데없는 이야기들을 돈까지 줘가며 한 시간 동안 듣고 있었던 것은 또 다른 의미로 자학을 즐겼던 이상한 심리라고 볼 수 있다.


      

 그때 당시 질문했던 것이 이런 것이었다.



‘사람을 많이 죽인 살인자나 다른 사람을 고통에 빠트린 범죄자도 죽기 직전 하느님께 용서를 구하고 뉘우치면 구원받고 천국에 갈 수 있나요?’  


   

 잠시 망설이던 그분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현세에서 아무리 사람을 많이 죽인 살인자였어도 ‘죽기 직전’ 하느님을 믿고 회개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누구나 지금의 삶은 아무렇게나 대충 살고, 남들에게 마음껏 피해도 끼치고, 나의 욕구대로 짐승 같은 삶을 살다가, 막판에 가서 회개하면 만사 오케이인 것인가.      


 기독교인들에게 현세의 삶은 ‘적립’의 개념이 없었다. 현세에서 어떤 삶을 적립하여 쌓아 가든 그것은 단지 ‘다음 생을 위한 대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에겐 그저 ‘하느님을 믿는 것’과 ‘믿음으로써 죽은 뒤 천국에 가는 것’만이 가장 중요한 가치인 것처럼 보였다. 마치 그것만을 보고 강박적으로 뒤쫓아가는 인상을 받기도 했다.   


   

 만약 그분의 논리대로 ‘아무리 현생을 개막장으로 살아도 죽기 직전 하느님께 회개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사는 동안 온갖 죄악은 다 저지르고, 나의 본능과 쾌락대로만 현생을 살다가, 죽기 직전에 잠깐 회개하면 가장 가성비가 좋은 일이 아닌가? 굳이 귀찮게 살아생전 미리부터 하느님을 절실하게 믿으며 매주 일요일마다 교회에 나가 '죽은 뒤 구원받기 위해 하느님의 눈치를 보며 나의 경건한 믿음을 실시간 보여주는 수고로움'을 애써 보여주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닌가?    


  

 물론 기독교인들 중에는 무조건적인 전도를 하지 않는 아주 신실한 믿음을 실천하는 좋은 분들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우연한 기회로 알게 된 수녀님과 오랜 기간 동안 좋은 관계를 유지한 경험은 아직까지 좋은 기억으로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이상한 방식으로 극단적인 전도를 ‘폭력’처럼 행사하는 분들이 많은 것도 사실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자신의 삶을 자기 맘대로 꾸리고 살아갈 자유가 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개인 영역이기 때문에 누구도 침범할 수 없다. 가족이라도 예외는 아니다. 우리 중 누구라도 타인을 내 마음에 들도록 바꾸거나 특정 종교를 믿도록 강요하고 조종할 수 없다.      



 누군가는 ‘종교’를 통해 구원받고, 누군가는 ‘퇴근 후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보는 유튜브 영상’을 통해 구원받는다. 



 그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며, 각자 살아가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그러므로 누군가에게 어떠한 행동을 하기 위해 권유를 가장한 협박성 멘트를 남발하며 특정 종교를 믿으라고 전도하는 것은 오지랖을 가장한 폭력이다. 타인의 현세를 넘어 내세까지 바꿀 수 있다고 확신하고 강요하는 것은, 우리 모두 고작 인간의 몸을 빌려 살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오만에 가깝다.           



 (이 글은 기독교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방식으로 과한 전도를 하여 기독교의 본질을 흐리고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일부 광적인 기독교인들의 전도 방식을 비판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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