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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동범 Apr 01. 2022

알래스카로 떠나다

알래스카에서 일주일을_02






인천공항에서 시애틀행 비행기 탑승권과 알래스카 앵커리지행 환승 탑승권을 발권했다. 공항에 나온 수많은 여행자 중에 시애틀에서 환승하여 나와 함께 알래스카행 비행기에 탑승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불현듯 나 혼자 이곳에 오롯이 남겨진 건 아닐까 하는 마음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그래, 수많은 사람 중에서 알래스카까지 갈 사람은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아니, 알래스카에 가는 사람은 나 이외에는 없을지도 모른다. 이제 나는 홀로 긴 여정을 떠나려 한다.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도 못한 채, 먼저 여행한 누군가의 조언도 듣지 못한 채 나는 낯선 미지로 향하려 한다. 


이제 나는 홀로 긴 여정을 떠나려 한다.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도 못한 채, 낯선 미지로 향하려 한다.


그런데 첫 출발의 관문인 비행기 탑승권 발권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환승 시간 때문에 발권이 지연되었는데, 항공사 내부 규정상 시애틀 공항에서의 최소 환승 시간은 3시간 30분 이상인데 내가 예약한 탑승권은 환승 시간이 3시간에 불과했다. 카운터 직원이 어딘가로 전화를 하고 나서야 발권을 진행할 수 있었다. 약간의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3시간의 환승 시간이 적은 시간도 아닌데 무슨 일이 있겠냐고 생각하며 불안감을 애써 잠재웠다. 이후 시애틀까지의 비행은 특별할 것 없는 여정이었다. 나는 시애틀까지의 10시간 동안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꿈인 듯 아닌 듯 펼쳐지는, 알래스카라는 신비와 몽환에 취해 있었다. 


Ⓒ조동범_시애틀공항


비행기는 10시간의 비행 끝에 시애틀에 안착했다. 천천히 탑승동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바라본 시애틀의 날씨는 나의 여정을 축복이라도 하는 듯 맑게 갠 하늘과 햇살을 눈부시게 펼쳐 보이고 있었다. 비행기가 시애틀에 도착하자 문득 이제부터 진짜 여정이 시작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곧, 3시간의 환승과 3시간 30분의 비행 뒤에 알래스카에 당도할 것이다. 아니, 시애틀을 이륙하는 순간 알래스카로의 여정은 이미 시작되는 것이리라. 목적지로 향하는 비행에 접어드는 순간 여행은 최초의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여행은 목적지에 도착한 이후에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목적지로 떠나는 순간 시작되는 것이다. 다만 이번 여행은 인천공항을 떠날 때보다 시애틀에서 환승하여 알래스카로의 비행을 시작했을 때에야 비로소 시작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을 떠난다는 것은 일상을 벗어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지상을 이륙하여 일상으로부터 벗어나는 순간, 여행이라는 비일상의 세계는 우리의 모든 삶을 감싸 안는다. 지상을 이륙해 모든 일상과 이별하는 순간 여행이 시작되는 것이다. 


잠을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나는 꿈인 듯 아닌 듯,
빙하와 만년설로 뒤덮인 풍경의 한가운데를 날아가고 있었다.


시애틀 공항에서 앵커리지행 비행기로 환승하기 위해 환승 터미널로 향했다. 하지만 환승 터미널과 연결된 복도까지 수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비행기에서 한꺼번에 쏟아진 사람들은 많은데 환승 수속은 더디기만 했다. 그때 인천공항에서 알게 된 최소 환승 시간이 불현듯 떠올라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스타 수속만 하고 출입국 직원에게 수속을 밟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괜찮을 듯싶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이스타 수속을 마친 사람들 중에 어느 사람은 바로 환승 터미널로 갈 수 있게 하는 반면, 어느 사람에게는 다시 출입국 직원에게 가서 수속을 밟으라고 했다. 눈에 보이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그러는 것도 아니었다. 일행이 똑같이 이스타 등록을 한 경우에도 일행 중 일부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출입국 직원에게 다시 수속을 하기도 했다. 나 역시 이스타를 등록한 여권 스캔을 마쳤지만 공항 직원의 손짓에 출입국 직원에게 다시 한 번 수속을 밟게 되었다. 


Ⓒ조동범


그 사이에 비행기 출발 시간은 점점 다가왔고, 막연한 불안감은 이내 초조함으로 바뀌었다. 환승 수속 줄은 좀처럼 줄어들 기미가 없었지만 무작정 기다리는 것 이외에 특별한 방법도 없었다. 겨우 환승 수속을 마치고 환승 터미널로 나왔지만 알래스카행 비행기에 탑승하기 위해서는 공항 트레인을 무려 3번이나 타야 했다. 다행히 비행기 출발 이십여 분 전에 알래스카행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내가 탑승한 이후에도 승객들은 계속해서 들어왔다. 심지어 출발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탑승한 승객도 적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비행기는 정시에 시애틀에서 출발하여 알래스카를 향해 날아올랐다.


인천공항에서 시애틀까지 갈 때는 알래스카로 여행을 떠난다는 것을 그저 막연하게 느꼈던 것 같다. 그런데 시애틀 공항에서 알래스카 항공의 비행기로 환승하자 내가 알래스카로 가고 있다는 것을 비로소 실감하게 되었다. 승객 중에 한국인을 포함한 동양인은 나 이외에 아무도 없었다. 철저히 이방인이 된 듯한 느낌과 함께 비로소 내가 딛고 있던 일상으로부터 멀리 떠나왔다는 생각이 나의 온몸을 휘감았다. 인천공항에서 시애틀로, 다시 시애틀에서 알래스카로 향하는 시간은 길고 지루했다. 잠을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나는 꿈인 듯 아닌 듯, 북극권의 빙하와 만년설로 뒤덮인 풍경의 한가운데를 날아가고 있었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그 어떤 인공 구조물도 없는 원시 자연 그대로인 공간에서 나는 아무 말도,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곳에서 나는 홀로 외로웠지만 일상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느끼는 충만한 행복은 너무나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알래스카! 내게 알래스카로 떠난다는 것은 모든 일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그 어떤 자유와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단순히 알래스카라는 장소에 가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 회귀하여 다른 시간에 잠입하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앵커리지 항공의 비행기 꼬리 날개에는 알래스카 원주민의 얼굴이 그려져 있다. 처음에는 그것이 원주민 중 역사적인 인물인가 싶었는데 현지인에게 물어보니 가장 평균적인 알래스카 원주민의 얼굴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했다. 알래스카 항공의 원주민 얼굴 그림은 그곳이 애초에 백인의 땅이 아니라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땅임을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듯 보였다. 나는 시애틀 공항에서 원주민 그림이 그려진 알래스카 항공의 비행기를 보았을 때, 비로소 북극권이라는 특별한 세계를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것은 마치 과거를 거슬러 현대 이전의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이기도 했다. 비행기를 타고 날아올라 단순히 알래스카라는 장소에 가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 회귀하여 다른 시간에 잠입하는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조동범


시애틀을 이륙한 비행기는 캐나다를 지나 알래스카에 도착할 것이다. 3시 30분의 비행 시간을 결코 짧다고 할 수만은 없겠지만, 10시간의 비행과 3시간의 환승 시간 뒤에 맞이한 순간이라 그 시간이 짧게만 느껴졌다. 아니 알래스카까지의 3시간 30분이 짧게 느껴진 것은 비로소 낯선 미지에 성큼 다가섰다는 설렘 때문이라는 것이 정확한 이유일 것이다. 기내에 나 이외의 동양인은 보이지 않았다. 시애틀 공항에서 보았던 수많은 한국인과 동양인은 어디론가 모두 사라지고 알래스카행 비행기에 나는 홀로 남겨진 것 같았다. 그것은 알래스카가 그만큼 낯설고 먼 곳이라는 반증일 것이다. 다른 승객이 나를 특별한 눈으로 바라본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들 사이에 낯선 이국처럼 섞여 하염없이 비행기의 창문 밖을 바라보기만 했다. 창밖으로는 캐나다의 설산과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저 너머에 오로라의 성지 옐로우나이프가 있을 것이고, 북쪽을 향해 더 날아가면 앵커리지와 페어뱅크스가 자리한 극의 서사가 나타날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 곧 도착하겠지. 이제 곧, 내가 그토록 갈망했던 극의 서사가 있는 그곳에 도착하겠지.


비행기가 알래스카 상공에 진입했을 때의 흥분과 떨림은 여전히 나의 마음을 사로잡고 놓아주질 않는다. 그 순간을 생각하면 지금도 언제나 처음인 듯 전율과 설렘의 감정이 온몸을 휩싸곤 한다. 지상에 펼쳐진 미지의 대륙. 그곳에는 만년설로 뒤덮인 설산이 지상 가득 펼쳐져 있었다. 만년설의 흰빛과 지상의 푸른빛이 어우러진 알래스카가 그 어떤 신비와 경이처럼 내 앞에 당도해 있었다. 푸른빛은 묘하게 일렁였고 순백의 설산은 비현실의 감각처럼 알래스카라는 환영을 눈앞에 펼쳐놓았다. 


Ⓒ조동범


눈앞에 펼쳐진 알래스카는 실재하는 곳이었지만 그것이 품고 있는 것들이 무엇일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물론 그곳에 자작나무와 가문비나무가 가득 펼쳐진 광활함이 있고, 빙하와 설산과 맑은 강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온통 흰빛과 푸른빛의 신비가 안개처럼 펼쳐져 있는 지상이 왠지 비현실적인 감각처럼 느껴졌다. 비행기를 타고 오며 꿈인 듯 아닌 듯 느꼈던 것처럼, 알래스카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어디인지 알 수 없는 모습으로 나의 첫 시선을 사로잡고 놓아주지를 않았다.




조동범, <알래스카에서 일주일을>(가쎄, 2018) 중에서







조동범

매일매일 읽고 쓰며 호숫가를 산책하는 사람이다. 문학동네신인상을 받은 이후 몇 권의 책을 낸 시인이자 작가이다. 시와 산문, 비평과 인문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글을 쓰고 있으며, 대학 안팎에서 문학과 인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을 실천하며 길 위의 삶을 살고 있다.


그동안 지은 책으로 시집 <심야 배스킨라빈스 살인사건> <카니발> <금욕적인 사창가> <존과 제인처럼 우리는>, 산문집 <보통의 식탁> <알래스카에서 일주일을> <나는 속도에 탐닉한다>, 인문 교양서 <팬데믹과 오리엔탈리즘> <100년의 서울을 걷는 인문학>, 글쓰기 안내서 <부캐와 함께 나만의 에세이 쓰기> <상상력과 묘사가 필요한 당신에게>, 시창작 이론서 <묘사 진술 감정 수사> <묘사> <진술>, 문학평론집 <이제 당신의 시를 읽어야 할 시간> <4년 11개월 이틀 동안의 비> <디아스포라의 고백들>, 연구서 <오규원 시의 자연 인식과 현대성의 경험> 등이 있다. 김춘수시문학상, 청마문학연구상, 미네르바작품상, 딩아돌하작품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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