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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동범 Mar 12. 2023

백야,
저물지 않는 어둠과 몽환의 순간

알래스카에서 일주일을_03






어둠이 장악하지 못한 밤이었다. 밤의 시간 속으로 어둠은 온전히 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공중의 이곳저곳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어둠이 몰려오지 못한 공중은 마치 형체를 잃어가는 사물들처럼 희뿌옇게 빛을 산란시키고 있었다. 시애틀을 떠난 비행기는 3시간 30분의 비행을 마치고 ‘테드 스티븐스 앵커리지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언제나 그렇듯 이국의 낯선 도시에 도착한다는 것은 두근거리는 설렘과 흥분 그리고 불안과 초조라는 양가적 감정을 들게 하는 것이다. 물론 여행자가 느끼는 불안과 초조가 일반적인 의미로서의 그것과 같을 수는 없겠지만 낯선 곳에서 느끼는 미묘한 감정의 파동은 어떠한 의미로든 불안과 초조를 지니고 있을 수밖에 없다.


알래스카에서 처음으로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빛의 밤인 백야였다.


알래스카에서 처음 맞닥뜨린 신비는 다름 아닌 백야였다. 빙하와 만년설, 자작나무와 가문비나무가 펼쳐진 지평선을 마주하기 전에 처음으로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빛의 밤인 백야였다. 앵커리지 국제공항에 도착한 시간은 어둠이 몰려와야 했을 때였지만 저물녘의 빛은 밤이 되어도 여전히 물러가지 않고 공중 가득 펼쳐져 있었다. 시간을 확인하지 않았더라면 내가 당도한 시간이 밤이 몰려왔어야 할 때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어둠 속의 빛인지, 빛의 어둠인지조차 가늠할 수 없는 모호한 시공간을 내 앞에 펼쳐놓고 있었다. 여름의 알래스카는 백야와 함께 시작된다. 겨울의 알래스카가 흑야와 오로라의 매혹이라면 여름의 알래스카는 백야의 매혹이 밤을 지배하며 사람들을 몽롱한 빛의 시간 속으로 빠져들게 한다.


Ⓒ조동범_페어뱅크스


백야의 시작과 함께 알래스카에도 봄과 여름은 펼쳐진다. 백야 기간과 맞물리는 6월부터 8월까지의 기간은 알래스카를 여행하기에 가장 좋은 계절이다. 물론 폭설과 오로라가 펼쳐지는 한겨울의 알래스카도 매혹적이지만 알래스카 여행의 성수기는 바로 이때이다. 알래스카의 여름이 시작되면 놀랍게도 원색의 꽃과 초록의 나무가 알래스카의 지상을 장악한다. 많은 사람들은 알래스카를 겨울이라는 하나의 계절만을 품고 있는 곳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알래스카에도 봄이 오고 여름이 오고 가을이 펼쳐진다. 물론 알래스카 여름의 평균 기온은 영상 16도 정도로 선선하다. 우리나라의 가을 정도의 날씨이니 여행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계절이기도 하다. 특히 꽃과 나무와 함께 빙하와 만년설을 함께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특별하다. 


알래스카 사람들은 따뜻한 이 시기에 늦은 밤까지 연어 낚시를 하기도 하고 호수에서 수영을 하기도 하며 짧은 여름을 마음껏 즐긴다. 청정한 자연을 품고 있는 곳이니만큼 어느 곳에서든 한껏 자연을 즐길 수 있는데, 도시 한가운데를 흐르는 강에서도 연어 낚시가 가능하다. 내가 앵커리지 도심의 강변을 산책할 때에도 많은 사람들이 연어낚시를 즐기고 있었다. 때 묻지 않은 알래스카의 자연을 즐기기에 여름은 짧고 그런 만큼 아쉬움은 깊어만 간다. 알래스카 사람들은 긴 겨울을 견디고 난 이후에 짧은 여름을 마음껏 즐긴다고 한다. 추위와 어둠 속에 움츠러든 마음을 백야의 여름에 풀어놓는 것이다. 


Ⓒ조동범_앵커리지


3시간 30분의 비행을 마지막으로 알래스카에 첫 발을 들여놓자 선선한 공기가 원시의 깨끗함처럼 몰려왔다. 알래스카로 떠나기 전, 한국에서 견뎌야 했던 무더위 속의 공기와는 차원이 다른 질감이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무더운 여름의 한국과 서늘한 알래스카의 계절이 같은 시간을 관통하여 지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하지만 알래스카도 여름이어서 우리가 알래스카 하면 쉽게 떠올리는 추위는 전혀 느낄 수 없었다. 생각보다 꽤 큰 규모의 공항 터미널을 지나 숙소로 출발했다. 앵커리지는 미국의 여느 도시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높지 않은 건물들과 거리의 모습이 무척이나 익숙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곳곳에서 마주한 푸른 숲의 모습은 내가 자연의 한가운데 들어와 있다는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미국 본토 서부 지역의 황량함을 압도하는, 자연의 경이와 시원의 감각이었다. 자연의 평화로운 고요와 안식. 앵커리지의 ‘처음’은 그렇게 내 마음속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저물지 않는 밤은 오래도록 몸을 뒤척이며
빛이 물러서지 않은 새벽을 지나 우리 앞에 아침을 펼쳐놓으려 한다.


앵커리지에 도착해 숙소로 가는 길에 연어낚시를 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앵커리지 도심을 흐르는 강에 여러 명의 연어 낚시꾼이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었다. 깊은 밤을 향해 가는 시간이었는데도 그들은 피곤한 기색도 없이 낚시에 열중하고 있다. 허리까지 오는 강물에 몸을 맡긴 채 연신 낚싯대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낚시를 하는 그들의 모습이 고요한 휴일 오후처럼 평안해 보였다. 바람은 선선하고 저녁이 강의 저편으로 고요하게 물러섰지만 저물녘의 빛은 아직도 강변을 환하게 비추고 있다. 하지만 그들도 이제 집으로 돌아가겠지. 저물지 않는 밤을 지나 집으로 돌아가 샤워를 하고 두꺼운 커튼으로 빛의 밤을 가린 채 혼곤한 잠에 빠져들 것이다. 그렇게 앵커리지의 밤이 저문다. 아니, 저물지 않는 밤은 오래도록 몸을 뒤척이며 빛이 물러서지 않은 새벽을 지나 우리 앞에 아침을 펼쳐놓으려 한다. 

 




조동범, <알래스카에서 일주일을>(가쎄, 2018) 중에서







조동범

매일매일 읽고 쓰며 호숫가를 산책하는 사람이다. 문학동네신인상을 받은 이후 몇 권의 책을 낸 시인이자 작가이다. 시와 산문, 비평과 인문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글을 쓰고 있으며, 대학 안팎에서 문학과 인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 마음을 실천하며 길 위의 삶을 살고 있다.


그동안 지은 책으로 시집 <심야 배스킨라빈스 살인사건> <카니발> <금욕적인 사창가> <존과 제인처럼 우리는>, 산문집 <보통의 식탁> <알래스카에서 일주일을> <나는 속도에 탐닉한다>, 인문 교양서 <팬데믹과 오리엔탈리즘> <100년의 서울을 걷는 인문학>, 글쓰기 안내서 <부캐와 함께 나만의 에세이 쓰기> <상상력과 묘사가 필요한 당신에게>, 시창작 이론서 <묘사 진술 감정 수사> <묘사> <진술>, 문학평론집 <이제 당신의 시를 읽어야 할 시간> <4년 11개월 이틀 동안의 비> <디아스포라의 고백들>, 연구서 <오규원 시의 자연 인식과 현대성의 경험> 등이 있다. 김춘수시문학상, 청마문학연구상, 미네르바작품상, 딩아돌하작품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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