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 밖으로 눈발이 날린다.
문득 책장에 꽂아 둔 오래된 앨범을 꺼내어 본다.
백일 된 아가의 낯선듯 천진난만하게 앉아 있는 빛바랜 흑백사진 한 장
어린 시절, 가족은 비닐하우스에 임시 거처를 마련하고 살아야 했다.
무엇하나 온전히 갖추어져 있지 않던 그 때였다.
아마도 국민학교 3학년 때 쯤이었을거다.
반 친구가 애기 때 사진이라며 몇 장을 가져와 자랑을 했다.
집에 돌아온 나는 밭일에서 막 돌아온 엄마에게 툴툴거렸다.
“엄마! 나는 애기 때 사진 없어? 내 친구는 사진 가져와서 자랑하든디...”
“으응, 우리 아들 아주 어렸을 때 사진 많았제!”
“그래, 그럼 얼른 보여줘. 나도 내가 애기였을 때 어땠는지 보고 시픈께.”
“그... 그게! 한번은 여름에 비가 많이 와서 홍수가 나가꼬 모두 떠내려가 부렀시야.”
“치...그럼 하나도 없는 거네. 나도 내 사진 자랑하고 시픈디...”
김치와 마른 반찬 하나 덜렁 올려진 밥상을 마주하고
철이 없는 아들은 풀이 죽어 빈 숟가락질로 애먼 투정만 부려댔다.
밥상을 치우고, 어둠은 더욱 깊었다. 연필을 꼭 쥐고 일기를 쓰는데
엄마는 비키니 옷장 바닥을 뒤적거리다 오래된 공책 한 권을 꺼냈다.
아빠가 서당에 다니며 썼다는 한자 가득 누렇게 변색된 두툼한 공책
페이지 중간 쯤 펼치자 배시시 웃고 있는 아가의 흑백사진 한 장이 보인다.
“엄마가 다른 사진은 다 잃어부렀어도 이 사진은 꼭 가지고 있었시야.
니 백일 때 사진이여. 이 사진이라도 있응께 얼마나 다행이냐...”
엄마가 건네준 사진 한 장을 들고 요리보고 저리보고
‘내가 애기 때 이렇게 생겼었구나. 짜식 참 귀여운데...’
마치 무슨 보물이라도 되는 양 일기장 사이에 고이 넣어둔다.
며칠 후, 품앗이 간 엄마를 대신해 외할머니가 나를 돌보러 오셨다.
나는 일기장에 넣어둔 사진을 꺼내 할머니에게 보여주며 의기양양한듯 웃었다.
“할무니, 이거 내 애기 때 사진인디 어때 귀엽제?”
“그랴, 그랴! 니 애기 때 사진은 이거 하나밖에 없시야.
워낙 가난해서 사진 찍을 여유가 어디 있었간디.
느그 엄마가 니 백일이라고, 그래도 사진 한 장은 있어야 쓴다고
눈이 무릎까지 내리는디 포대기에 너를 꼭 싸매 들고
읍내에 가서 겨우겨우 찍은 사진이여. 입힐 옷도 없어가꼬
거그서 사정 사정해서 이쁜 옷 하나 빌려가꼬 찍은거다잉."
나는 그 때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평생의 추억 하나를 남기기 위해
눈 쌓인 그 길을 헤치며 발길을 옮긴
갓 스물 밖에 되지 않던 울 엄마의 사랑을...
그 겨울, 사진 한 장
<이 글은 'mbc여성시대'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사연으로 소개되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