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동화책 백여 권을 정리하기로 했다. 집이 좁다보니 앞으로 학교생활과 관련되어 늘어날 책들을 마땅히 꽂아 둘 공간이 없었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려면 기존의 것을 정리하는 건 당연한 수순인 듯 했다. 그런데 정리하는 방법이 문제였다.
“여보, 이 책들 어떻게 하지? 가져다 버릴까?” 나는 아내의 ‘그래요.’ 하는 말이 떨어지면 금방이라도 가져다 버릴 준비를 하고 있었다. “파는 건 어때?”, “에이, 헌책방에 이거 팔려면 시간 내서 가야하고, 팔아도 기름 값도 안 나온다.”, “아니 헌책방 말고 중고마켓에!”, “중고마켓에 판다구? 남의 손때가 묻은걸 누가 쉽게 사겠어? 더군다나 코로나 시국인데.”, “아니야, 의외로 사겠다는 사람들 많아. 책도 깨끗하게 보고 권수도 작은 편은 아닌데 파는 게 낫지.”
다른 책도 아니고 아이들 동화책을 돈을 받고 팔자는 제안이 썩 내키지 않았다. 그래서 “파는 건 그렇다. 차라리 그냥 버리자” 라고 했더니, 아내는 “그럼 무료나눔이라도 하든가” 한다. ‘이런 헌책을 누가 가져간다고. 어차피 가져갈 사람도 없을텐데...’ 아내의 말에 입을 삐죽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내는 핸드폰을 들고 내가 모아둔 책 앞에서 구도를 맞추며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는 ○○마켓이라는 어플을 열었다. 무료나눔이라는 탭을 누르더니 사진을 올리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잠시 후 “잠깐만 있으면 가져가겠다는 사람 나타 날거야” 하는 것이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나에게는 생각지 못한 낯선 장면이라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별 기대 없이 있는데 잠시 후, 아내의 핸드폰에서 채소 이름을 외치며 신호음이 울렸다. 한번이 아니었다. 깨톡이 오는 것처럼 다섯 번의 신호음이 연속해서 울려댔다. 아내가 어플을 열어 보여주는데 책을 가져가겠다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이유로 글을 올린 것이다. 신기하기도 하고 좀 당황스럽기도 했다. 아내가 꼼꼼히 책을 필요로 하는 이유를 읽어보더니 두 자매를 키우는 집에 주면 어떻겠냐고 한다. 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했다.
아내가 언제 가지러 올 수 있는지 메시지를 보내자 저쪽에서 퇴근 후 우리가 사는 집 앞으로 와서 연락을 하겠단다. 그 날 저녁, 연락을 받고 책을 가지고 내려가니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부부가 서 있었다. 동화책을 건네받고는 고맙다는 인사를 연신 했다. 무료나눔 하기를 정말 잘했다고 생각하며 뿌듯하게 돌아섰다. 앞으로 기회가 생긴다면 이런 나눔의 기회를 내가 먼저 적극 활용하리라.
아이가 2학년에 올라가면서 책을 더 정리해야 했다. 지난번의 기억을 되살리며 나는 앞장서 아내에게 무료나눔을 하자고 했다. 하지만 아내는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무료 말구 팔았으면 싶어. 책 상태도 워낙 좋구, 살 때도 돈이 좀 들었잖아.” 의외였다. 흔쾌히 동의 할 줄 알았던 아내가 조금은 강한 어조로 반대를 표시한다. 하기야 지난번에도 아내는 파는 쪽을 먼저 택하기는 했었다. 나는 나눔의 기쁨을 강조하며 아내를 설득했다. 아내는 꼭 돈을 받고 싶어서가 아니라 무조건 무료로 주는 건 아닌 것 같다는 것이다.
아내와 나는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 듣고 있던 라디오에서 DJ가 ‘혹시 고민되는 것이 있으신가요? 그럼 보내주세요. 제가 시원하게 답을 해드리겠습니다’ 라는 멘트를 던졌다. 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한번 보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핸드폰을 열고 메시지를 쓰기 시작했다. ‘아이들 동화책 정리해야 할 것이 좀 있습니다. 상태도 깨끗하고 구하기도 어려운 책인데 중고로 팔까요? 아니면 무료로 나눔을 할까요?’
얼마 후, DJ가 ‘자, 여러분 고민을 들어볼까요?’ 하는데 내 번호가 불린다. 깜짝 놀라 라디오 앞으로 몸을 당기고 귀를 세웠다. 고민을 한번 읽고 나더니 주저 없이 ‘중고로 파세요. 그래야 사신 분도 지불한 가격만큼 아이에게 정성스럽게 읽어 줄테니까요’ 라고 하는 것이다. 순간 나도 모르게 “정말?” 하는 탄식을 내뱉었다. 사실 나는 ‘당연히 무료로 나눔을 하셔야죠. 나눈다는 것만큼 행복한 기분이 어디에 있겠어요?’ 하는 답이 나올 거라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멍하니 있다가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니 틀린 말이 아니었다. 어쩌면 나는 단순한 자기만족에 빠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뭔가 대단한 일이라도 한 듯, 남에 대한 배려와 사랑으로 스스로를 포장한 것이다.
남과 나누고자 하는 마음, 당연히 좋다. 하지만 무조건적인 나눔이 마냥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할 것이라 장담할 수 있을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 것을 투자해 뭔가를 얻어 내려 노력하는 모습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얻어진 결과물은 그만큼의 가치를 내재하고 활용될 수 있을테니 말이다. 오늘 나는 아이들의 동화책을 중고마켓에 팔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