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조부모
여름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바로 전 6월,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한국으로 가기 며칠 전 그 소식을 엄마에게 들었을 때 느낀 첫 감정은 당황이었다. 96세 할머니를 뵐 마지막 기회라 생각한 한국행이었다. 2년 전 한국에서 뵈었을 때 마지막이 아닐까 해서 사진도 찍어놓았지만 할머니는 생각보다 건강하게 버텨주셨고 이번에 꼭 볼 수 있을 건만 같았다.
우리 외할머니는 무뚝뚝한 사람이었다. 좀처럼 손주들이 예쁘다고 애정표현을 한다거나 자식들에게 살가운 말씀 없으신 그런 사람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에 대한 첫 기억은 아마도 부엌에서였을 거다. 할머니는 음식 하는 일로 본인을 표현하셨고 사랑을 보여주셨다. 할머니 음식은 할머니만큼이나 담백하고 깔끔한 맛이 났다. 경기도 식의 만두, 녹두부침개, 토란국, 북어조림은 매 설날마다 추석마다 식구들을 먹였다.
할머니는 일제 강점기 당시 다소 단출한 2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할머니의 아버지는 여자가 공부하면 팔자가 사나워진다며 공부를 시키지 않았다 했다. 사업이 잘 나가 풍금과 원피스는 사주어도 공부는 할머니와 이모할머니의 몫은 아니었다. 중매로 할아버지와 결혼한 할머니는 딱히 할아버지와 정이 있진 않았지만 할아버지가 몇 년 전 돌아가실 때까지 그야말로 80여 년을 해로하셨다.
할머니의 노년은 허리 통증으로 시작되어 귀가 안 들리는 증상으로 점철되었다. 보청기를 간혹 사용하시긴 하셨지만, 귀찮고 걸리적거린다는 이유로 잘 착용하지 않으셨다. 엄마와 이모들의 말에 따르면 할머니는 듣고 싶은 대로 듣고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한다고 하셨다. 무얼 물어도 할머니의 관심사대로 대답하고 말씀하셨다. 수년 전 돌아가신 할아버지는 결국엔 눈이 멀게 되셨는데, 젊은 시절에도 그러하였지만 노년에는 더더욱 두 분은 소통 불가로 사셨다. 할아버지가 그립지 않으시냐는 엄마의 물음에 할머니는 단칼에 전혀 보고 싶지 않다는 단답형으로 대답하셨다. 그도 그럴 것이 건너 들은 몇몇 사연만 들어도 여자 속 터지게 하는 할아버지였다.
할머니는 우리 엄마를 포함한 4녀 1남을 낳았다. 할아버지의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기에 아들 낳으라 시집살이시키는 시댁도 없었지만 할머니는 아들은 꼭 낳아야 한다는 사회적 관념에 사로잡혀 사셨다. 막내로 낳은 아들, 우리 외삼촌께서 할머니 할아버지의 노년을 책임지셨으니 이만하면 아들을 고집한 할머니의 생각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다. 우리 둘째가 딸인걸 알고 나서 할머니께서 처음 하신 말씀은 "이제 아들 하나 낳고 고만 낳아야지?" 였으니 결혼한 여자가 아들을 낳는 것은 삶의 의미이자 도리였다.
96세 평생 여자는 살림 잘하고 아들 낳아야 한다는 쾌쾌 묵은 관념에 사로잡혀 사신 할머니. 본인의 이름처럼 남편에게 순종하고 본인 의견을 강하게 내비친 적은 없었지만, 남존여비 사상은 강하게 가지고 계셨던 할머니. 내가 기억하는 40여 년의 할머니는, 초저녁만 되면 옆으로 새우등처럼 굽히고 누워 잘도 조시던 모습과, "너 쫄쫄 굶고 다니제?" 하던 할머니의 놀리는 듯한 목소리, 간이 삼삼하게 배어있는 군침 도는 명절음식으로 남았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한국전쟁을 겪고, 빠르게 변화하는 산업화까지 온몸으로 맞으며 살아온 그 세월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지 않을 수 없다. 속 썩이는 남편과 줄줄이 딸 넷을 시집보내고 그중 한 명은 미국으로 보내며 겪어야 했던 그 마음고생을 어찌 내가 헤아릴 수 있으랴. 후손들은 기억하지도 못할 그 한 많은 세월을 어찌 풀어낼 수 있으랴.
고리타분한 남존여비 사상에 절어 살았다고 하기에는 굽이굽이 굴곡진 현대 역사 속의 삶이었다. 내가 할머니였다면 다르게 살 수 있었을지 알 수가 없다. 90대에 쇠약해지시고 잘 못 걸으시고 난 다음에야 가끔 부르셨다던 일본노래, 맛있게 잡수셨다던 피자/햄버거, 어느 날 엄마를 부르짖으며 서럽게 우셨다는 그 이야기들 속에서 할머니는 하늘 나라로 가셨다. 애틋하고 정 많은 할머니 손녀 간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할머니가 그립다. 있어주시는 것만으로도 나는 어린아이 같다고 느꼈는데 이제 나는 조부모 하나 없는, 아이들과 부모를 책임져야 하는 외로운 어른 신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