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하늘 Jul 01. 2022

<헤어질 결심>(2022) 박찬욱

평행선상에 존재할 수 없는 사랑

*이 글은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상상마당 시네마 리뷰어로 작성된 글로 아래에서 원문 링크 확인 가능합니다.


 ‘마침내’라는 단어가 지닌 끝맺음의 강렬함처럼 <헤어질 결심>은 그만큼 매혹적인 영화다. 2016년 개봉한 <아가씨> 이후 6년 만에 신작으로 돌아온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은 제75회 칸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다. 영화는 수사극과 멜로를 중첩시킨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구소산 변사사건 담당 형사 해준(박해일)이 기도수의 타살을 의심하며 중국인 아내인 서래(탕웨이)를 용의선상에 올리며 그에 대한 의심과 사랑이 충돌하는 과정을 그린다.



렌즈(눈)가 지닌 이중 영역, 관음과 순수


 <헤어질 결심>의 눈은 다층적이다. 순수한 목격자의 역할로 기능하기도 하지만, 프레임 내부와 외부의 공간을 연결 짓는 관음과 상상의 영역으로 자리 잡기도 한다. 사건 현장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기도수의 눈은 최초이자 최후의 목격자로 기능한다. 죽은 이의 시점 숏이 등장하는 것도 그 이유에서다. 눈의 순수성은 그대로를 받아들인다는 점에서 발휘된다. 때문에 죽은 자들의 눈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은 그러한 순수한 목격이 갉아 먹힌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해준의 직업적 특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해준은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는 원리 원칙을 지키는 형사다. 사망자의 흔적을 좇고 죽음의 과정을 복기하기 위해 굳이 돌산을 와이어를 타고 오르는 그런 사람이기 때문이다. 해준의 눈앞에 나타난 기도수의 아내 서래는 미스터리 그 자체다. 의도인지 실수인지 모를 “원하시던 대로 운명하셨다”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서래의 태도는 의심의 가속도를 더욱 높인다.



 의심은 짙어지고, 해준의 시선도 노골적으로 바뀐다. 서래를 용의선상에 두고 집 근처에서 잠복근무를 하며 응시한다. 잠복근무는 대상을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자 끊임없이 지켜본다는 점에서 관음과도 맞닿아있다. 망원경으로 서래의 집을 올려다보는 해준의 행위에서 히치콕의 문양이 느껴진다. 특히 <이창>(1957)의 제프(제임스 스튜어트)가 창문을 통해 주변 이웃들을 훔쳐보는 과정과 꽤나 닮아있다. 관음을 하는 시선은 구체적인 형상이 되어 공간을 뛰어넘으며 서래와 해준이 투 숏으로 함께 존재하게 된다. 이는 서래에게도 적용된다. 서래는 취조실에서 나온 후, 자동차로 해준을 따라간다.(궁금증에서 비롯된 행위였을 것이다.) 이때 해준은 다른 사건의 용의자와 옥상에서 대립하는데 자동차 안에서 지켜보는 서래와 해준은 눈이 마주치며 시선은 전복된다.





 해준이 서래의 집을 관음 하는 행위를 카메라는 퀵 줌 아웃을 사용하며, 위치 전복의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중간중간 등장하는 줌렌즈의 사용은 공간을 확장시킴과 동시에 마치 눈동자의 동공이 수축되고 이완되는 과정과도 비슷해 보인다. 아이러니한 점은 카메라가 줌을 하는 대상이 관음을 당하는 서래가 아닌 해준이라는 것이다. 만약 렌즈가 해준의 눈이라면, 그것이 포착하고 있는 대상을 보여주는 것이 일반적인 연출법일 테다. 하지만 박찬욱 감독은 이것을 완전히 반대로 대입시킨다. 이는 서래 역시 해준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관객들에게 인지시키는 것과 동시에, 해준이 느끼는 양가적인 감정이 충돌해서 생기는 효과임을 부각한다. 눈이 지닌 이중 영역은 형사로서 순수하게 용의자를 잡겠다는 열망과 불완전한 감정이 지닌 관음의 대립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다. 서로를 지켜보는 행위는 수사극의 틀을 지니지만, 멜로와 상당히 닮아있다. 상대를 생각하고 쳐다보는 것은 궁금증과 순수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시선의 높낮이는 다른 처지에 놓인 관계 위치를 보여주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해준은 본디 내려다보는 것이 익숙한 사람이다. 취조를 하는 형사의 직업적 성향이 그 기반이 되어준다.(해준은 기존의 형사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깨부수며 젠틀한 형사로 등장한다.) 시신 안치실에서 처음 만난 해준과 서래는 형사와 피의자의 신분으로 구분되고, 계단에서 부하직원을 내려다보는 해준의 모습 역시 연결된다. 높낮이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요소는 계단이다. 상승과 하강이 가능한 계단은 관계의 거리마저 확장시킨다. 서래와 해준의 눈높이가 같아지는 순간은 서래의 집에서 해준이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욕망의 대상으로 생각하던 타인을 정면으로 대면한 순간은 결핍을 직면하는 것과 맞닿아있다. <박쥐>에서도 이런 장면을 살펴볼 수 있는데, 상현이 태주의 신발을 신겨주는 장면 기억하는가. 상현은 태주를 위해서 몸을 숙이고, 태주는 몸을 꼿꼿이 세우고 있다. 상반된 차이는 상현이 태주와의 관계 설정에서 우위를 점하지 못함을 암시한다. 해준의 눈높이가 서래와 일치하는 순간 두 사람은 역할에서 벗어나 각각의 인간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박찬욱식 멜로


 그의 멜로는 언제나 결핍을 동반한다. 물론 대부분의 캐릭터들이 결핍을 안고 살며, 그것을 채우려고 몸부림친다. 하지만 소위 박찬욱식 멜로는 그 선로에서 당당하게 이탈한다. 결핍이 채워지면 오히려 불행해진다는 점이 그러하다. 그는 결핍과의 공존을 택한다.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는 정신 병동에 사는 영군(임수정)과 일순(정지훈)의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 두 사람은 비정상과 비정상이 되어 그저 서로의 결핍을 바라보고 인정한다. 그에 반해 <박쥐>(2009)에서 신부 상현(송강호)은 남편과 시어머니에 의해 욕망을 억압당하며 살아가는 태주(김옥빈)을 관음하며 갈망한다. 신부에게는 금욕이 되는 성적 욕망과 연민을 동반한 사랑은 벗겨진 신발을 신겨줄 정도의 세심함을 지니지만, 태주에게 있어서 그것은 자신의 결핍을 채워줄 수단이다. 상현과 마찬가지로 뱀파이어로 변한 태주는 자유를 얻지만, 그것은 두 사람의 관계를 얼룩지게 하는 발화점이 된다. <아가씨>(2016)는 조금 다른 결의 영화다. 히데코(김민희)와 숙희(김민희)의 신분은 아가씨와 하녀인데, 부와 아름다움을 지닌 히데코는 자유를 지닌 숙희를 갈망하고, 숙희는 그 반대다. 서로의 것을 탐하기 위해서 속이는 행위와 후에 두 사람이 협력해서 탈출하는 것은 결핍을 채우는 방식이 아니라 공존하는 방식이다.


 <헤어질 결심>을 굳이 분류하자면, 그들의 결핍은 동일선상에 놓일 수 없기에 채울 수도 버릴 수도 없는 이도 저도 아닌 상태다. 그래서 주인공들의 결심(결단)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피의자와 형사로 엮인 두 사람의 관계 설정 또한 그러하다. 박찬욱 감독의 탁월한 캐릭터 설계는 이 작품에서도 빛을 발하는데, 같은 눈높이로 서로를 바라볼 수 없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해준의 반지는 아내에게 속박된 삶을 의미하며, 반복적인 클로즈업을 통해서 등장한다. 반지는 끼고 남은 자리에 테두리와 자국을 남기고, 해준을 옭아맨다. 이포 원자력발전소에서 일하는 아내(이정현)로 인해 주말에는 이포에서 가야 하는 해준은 잠에 대한 결핍은 느낀다.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안개 역시 해준의 불안정한 심리상태를 반영한다. 반면 서래는 죽은 남편에게 속박되어 있다. 서래의 결핍은 폭력적인 남성들에게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이다. 해준의 반지처럼 서래의 손에 남겨진 상처는 애써 숨기려고 해도 쉬이 결핍을 드러낸다.



생명과 죽음의 공간


 생각해 보면, 박찬욱 감독의 영화에서 산과 바다는 빠질 수 없는 미장센이 된다. 전작인 <아가씨>에서도 히데코와 숙희가 자유를 갈망하며 뛰는 공간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결국 도망친 후에는 바다 위의 배에 머무르게 된다. <아가씨>에서 산이 견고한 요새처럼 나갈 수 없는 감옥처럼 그려진다면, 바다는 탈출구가 되어 어디로든 항해할 수 있는 통로가 되는 것이다. <박쥐> 또한 태주를 억누르는 강우(신하균)를 죽이는 장소는 바다다. 강우를 죽이면서 태주는 자유를 얻고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다. 표면적으로는 강우의 죽음으로 인해 바다를 죽음의 공간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태주의 입장에서 바다는 속박을 벗어나게 할 수 있는 수단이다. <복수는 나의 것>(2002)에서 역시 동진의 딸 유선이 죽음을 맞이하는 공간은 강으로 그려지며, 동진은 딸의 복수를 위해서 강에서 재탄생된다. 이는 아무래도 바다가 지닌 물이 흐르는 속성과 산이 지닌 변하지 않는 고정성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일정한 공식처럼 산과 바다의 형태는 완벽하게 구분되지는 않는다. 영화 속에서 죽음의 공간이 바다가 되기도 하고 생명의 공간이 산이 되기도 하는 것은 삶의 복잡한 순환과 굴레와 맞닿아있다.


 <헤어질 결심> 바다() 산을 전면에 앞세운 영화다. 해준은 산을 닮은 사람이다. 변화를 크게 즐기지 않고 원리와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다. 서래는 정반대로 바다를 닮은 사람이다. 그녀의 집에 있는 벽지에서도 파도와 물에 대한 이미지는 쉽게 찾아볼  있다. 그렇기에 해준은 변화가 크고 생명력이 느껴지는 서래에게 계속 시선이 가는 것이다. 자신은 반복된 일상과 불면증으로 좀비처럼 죽지도 살지도 않은 상태처럼 살고 있기 때문이다. ‘ 형사 해준이 죽은 시신을 마주할  주요하게 드러나는 공간이다. 때문에 기도수와 홍산(박정민) 죽음은 산이 주위를 둘러싼 곳이다. 빠져나갈  없는 족쇄이자 굴레이며, 또한 형사로서의 의심을 지켜야 하는 공간이다. 휴대폰에서 발견한 138층에 대한 단서는 다시금 서래를 범인으로 지목한다. 하지만 서래를 향한 마음은 해준의 형사로서의 결심을 중단시킨다.





중단하고자 하는 마음


 안개  이포에서 만난  사람은 붕괴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없다. 해준에게 구도산 변사 사건의 진범을 눈앞에 두고도 사건을 중단한 마음은 형사로서의 신념을 꺾는 일이기 때문이다. 불면증에 더욱 시달리는 해준은 새로운 남편(임호신) 함께 나타난 서래와 마주한다. 하지만 이오신의 갑작스러운 사망으로 또다시 피의자와 형사의 신분으로 만난다. 그들의 사랑은 평행선상에서 위치할  없으며, 높낮이가 있어야만 가능한 사랑이다. 산과 바다가  공간에 함께 공존할  없는 것처럼 이들의 관계는 일정 공식이 없으면 성립되지 않는다.  불가역적인 사랑이 되어 지울  없는 흔적을 새기는 것이다.


“당신이 사랑한다고 말할 때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났을 때 내 사랑이 시작됐다.”(극 중 서래의 대사)


  완전히 붕괴되었다고 말했던 해준의 말을 되풀이해서 들으면서, 사랑이라고 확신한 서래는 해준도 몰랐던 마음을 표면으로 드러낸다. 임호신의 죽음과 함께 진실을 알게  해준은 바다로 향하는 서래를 좇아간다. 서래는 만조가 가까워진 바다의 모래사장에서 구덩이를 파내고 구멍 안으로 들어간다.  행위로 인해 서래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장면에서 주목해야  장면은  놓았던 구덩이의 모래가 산의 형상처럼 깎이며 바다와 함께 공존한다는 점이다. 이는 성립이 불가능한 공존이다. 지상에 있는 해준과 지하에 있는 서래는 경계면을 사이에 두고, 완전한 바다와 산이 된다. 서래의 소멸은 붕괴된 사랑의 표상이다. 속도와 바라보는 위치가 달랐던  사람은 결국 다른 방식으로 무너짐을 선택했다.


 영화의 제목인 헤어질 결심은 무언가를 중단하고자 하는 마음이다. 두 사람이 서로에게 향하는 마음을 애써 부정한 채 헤어지고자 한 마음들은 무너진 모래처럼 파도에 휩쓸려 흘러간다. 과연 해준과 서래는 완벽한 헤어짐에 당도했던 걸까. 정훈희의 노래, <안개> 가사처럼 ‘그 사람은 어디에 갔을까.’ 영화의 엔딩 크레디트에 나오는 이 노래는 해준의 복합적인 감정을 더욱 상기시킨다. <헤어질 결심>은 사랑의 황량함과 붕괴를 섬세하게 포착한 명작임에 틀림없다.




* 이 글은 상상마당시네마 리뷰어로 작성된 글입니다. 아래에서 원문을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brunch.co.kr/@96ecb869451b407/9




작가의 이전글 <불도저에 탄 소녀>(2022) 박이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