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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하늘 Jul 01. 2022

나비의 집 <스토커>, <나를 찾아줘>

기존의 '공식'을 깨고 비상한 나비의 날갯짓 

*이 글은 박찬욱 감독의 <스토커>와 데이빗 핀처 감독의 <나를 찾아줘>를 바탕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Intro

열여섯 생일, 물레에 찔려 잠들게 된다는 공주의 이야기. 디즈니 애니메이션 영화 <잠자는 숲속의 공주>(1973)다. 그녀가 저주에서 풀려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키스를 받아야 한다. 간단하면서도 어려운 공식. 결국 오로라 공주는 왕자에 의해 저주에서 풀려난다. 그 흔한 구원 서사다. 


고전 디즈니 대부분의 서사가 남성에 의해 구원되는 여성을 그렸다. 그렇다면 여기서 드는 의문. 만약 요정들이 오로라 공주를 저주에 맞서 이겨낼 수 있는 여성으로 키웠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말레피센트가 설계한 초록빛을 따라 물레에 손을 뻗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공주가 사는 높고 큰 성은 화려하지만 절대 나갈 수 없는 아름다운 감옥처럼 보이기도 한다. ‘집’은 우리를 보호하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쉽게 나갈 수 없는 공간이다. 누군가의 억압에 의해. 특히 여성은 집이라는 허물 속에서 자신의 자아를 감추고 순응하며 살아간다. 영화 내에서 여성의 모습은 일정한 공식에 의해 소비되었다. 이 글은 <스토커>(2013)와 <나를 찾아줘>(2014), 이 두 편의 영화 속 여성이 기존의 공식을 깨고 자신을 뒤덮고 있던 허물을 어떤 식으로 벗고 나오는지에 대해서 주목하고자 한다.



도로 위에 새겨진 피의 인장 - 박찬욱 감독 <스토커> 


도로 위에 새겨진 노란색 중앙선. 여름의 더운 열기가 도로 위에 아지랑이로 피어오른다. 저 멀리 경찰차에서 내리는 한 소녀가 보인다. 경찰차의 강렬한 사이렌 소리와 함께. 정차된 두 대의 차량에서 내리는 사람은 소녀 한 명뿐이다.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차량이 놓인 반대 방향으로 향한다. 당당하게 걷는 몸짓은 마치 방금 허물을 벗고 날아오르려 하는 나비를 닮았다. 아직 어디로 향해야 할지는 모르지만 힘차게 날아오르려 하는 나비. 바람에 흩날리는 치마와 머리카락, 깊은 눈망울을 보여주는 클로즈업. 이 강렬한 장면은 박찬욱 감독의 영화 <스토커>(2013)의 오프닝 시퀀스다. 소녀의 이름은 인디아 스토커. 






이 작품은 박찬욱 감독의 기존 서사, 특히 초기작인 복수 3부작과는 사뭇 다르다. 캐릭터가 피의 복수를 하고 난 이후에 허무를 다루는 <복수는 나의 것>(2002), <올드보이>(2003), <친절한 금자씨>(2005)와 달리 <스토커>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어른과 소녀의 경계선 사이에 서있는 인디아가 집 밖으로 나가는 과정을 그린다는 점이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스토커>는 캐릭터의 시작을 다룬다고 하면 되겠다. 그렇기에 박찬욱 감독의 작품이지만 이색적인 느낌도 든다. 다시 오프닝 장면으로 돌아가서 그렇다면 인디아는 왜 경찰차에서 내려 도로 한복판에 서 있는 것일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영화의 내러티브 전개 방식대로 사건의 초기로 돌아갈 필요가 있다. 인디아의 열여덟 생일, 주방의 중앙에 놓인 테이블 위에는 인디아를 위한 생일 케이크가 놓여 있다. 케이크에 꽃인 촛불은 환하게 타오르고 있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커다란 굉음. 인디아는 자신의 생일, 불의의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잃었다. 이제 케이크가 놓여있던 테이블 위에는 오직 흰색 국화꽃만이 남아있다. 아무도 촛불을 불지 못한 채로 케이스가 씌워진 케이크 그로 인해 케이크에서는 하얀 연기가 피어오른다. 인디아에게 생일은 온 세상을 비추던 환한 빛이 어느 순간 암흑으로 변한 그런 날이었다. 인디아의 앞에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삼촌 찰리가 나타난다. 인디아는 어딘가 기묘함이 느껴지는 삼촌에게 적대감을 느낀다. 사냥을 시작하기 전, 먹잇감을 바라보는 사냥꾼처럼 갑자기 나타난 삼촌을 관찰하는 인디아. 아버지가 즐겨 하던 소총 사냥은 인디아에게 인내심과 관찰력을 부여했다. 끝없는 기다림 끝에 먹이를 잡는 과정. 18살 인디아는 자신만의 무기를 장착한 상태로 삼촌을 살핀다. 그에 반해, 인디아의 어머니는 남편 리처드의 과거 시절과 똑 닮은 동생 찰리의 등장으로 삶의 활력을 느낀다. 장례식이 끝나고 집에 남겨진 세 사람의 모습은 폭풍전야가 일어나기 직전처럼 고요한 긴장감만이 가득하다. 마치 자신들을 파멸로 이끌고 갈 거미줄에 걸리기를 기다리는 나비들처럼. 



힘의 우위에 서기 위해 팽팽한 줄다리기를 하는 인디아와 찰리. 이는 영화 속에서 두 사람이 계단에 서 있는 위치로도 잘 드러난다. 처음 두 사람의 관계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것은 삼촌 찰리다. 인디아의 삶에 무한한 카오스를 만들고, 인디아의 규칙을 망가뜨리기 시작한다. 힘의 균형은 무너지고, 힘의 중심은 찰리 쪽으로 넘어간다. 삼촌의 계략으로 자신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없어지는 것을 알아차린 인디아. 박찬욱 감독은 당황한 인디아의 심정 변화를 디졸브라는 장면 연결 기법을 통해 묘사했다. 한 장면을 주목해서 보면, 인디아는 아이스크림을 꺼내기 위해 내려간 지하실 냉동고에서 삼촌이 죽인 맥개릭 부인의 시신을 발견한다. 이는 인디아가 가지고 있던 필통과 디졸브 된다. 기억을 잊으려는 듯 필통을 닫으며 애써 외면하는 인디아의 모습. 삼촌이 설계한 덫에 걸리지 않기 위해 평정심을 유지한다. 이는 마치 인디아의 감정이 양가적으로 공존하며 삼촌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자신의 집에 들어와 카오스를 만드는 삼촌은 인디아에게 쉽게 예측이 불가한 두려움의 존재다. 인디아는 겁이 많은 소녀로 항상 경계하고 지켜본다. 영화 속 인디아의 감정묘사를 크게 드러내진 않지만, 미묘하고 섬세하게 표현된다. 박찬욱 감독의 <스토커>는 다른 작품들에 비해 아직 성장을 겪고 있는 소녀의 모습을 담고 있기에 주인공의 서툰 모습들에 주목한다. 그래서 이 작품은 지독하게 처절하기보다는 서툴고 아름답게 그려진다. 이제 힘의 우위에는 완벽하게 삼촌이 있다. 인디아는 계단의 아래에서 그저 삼촌을 올려다볼 뿐이다. 인디아가 삼촌에게 적대감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가만히 자신을 응시하면서 옥죄어 오는 삼촌 찰리의 모습은 사냥감을 노리는 인디아 자신의 모습을 닮았으며, 삼촌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같은 피가 흐르는 동족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가장 표현주의적으로 드러나는 점은 바로 힘의 우위를 겨루는 그들의 집이다. 집의 구조를 잘 살펴보면 아치형을 띄고 있다. 감독의 대표작들만 보아도 인물이 머무는 공간에 캐릭터를 반영하는 특성을 지닌다. 영화 <올드보이>의 모텔은 화려한 벽지와 꽃무늬 패턴, 글귀가 적인 액자가 가장 눈에 띈다. 주인공인 오대수가 영문도 모르고 몇십 년을 한 공간에 갇혀 살아갔을 때 느꼈던 혼돈이 담겨있다. 그렇다면 <스토커> 속 집은 어떨까? 인디아가 머무는 집은 고요와 적막만이 가득하다. 높은 천장과 계단을 한없이 올라가야만 마주할 수 있는 자신의 방, 반대로 한없이 내려가야만 만나는 지하실. 인디아의 집은 ‘계단’을 중심으로 연결된다. 즉 한 발자국 도약하여 자신의 것들이 가득한 방에 도착할 수도 있지만, 한 발자국 밀려나면 어두컴컴한 지하실의 끝없는 계단으로 내려가게 된다는 것이다. 인디아의 집은 한마디로 자신의 성장 서사와 무척이나 닮아있다. 자신의 것들로 가득한 방으로 가는 길목을 막았던 삼촌 찰리로 인해 인디아는 혼란을 겪었고, 이내 결심했다. 자신의 것들을 망치는 삼촌을 목표물로 삼기로. 그녀의 사냥이 시작된 것이다. 삼촌의 살인 행각을 직접 목격한 인디아는 이제 총에 총알을 장전한다. 그리고 기다린다. 먹잇감이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올 때를. 



삼촌은 인디아의 주변을 맴돈다. 천천히 그리고 반복적인 패턴으로. 인디아는 이제 총알이 장전된 총을 들고 목표 지점을 겨냥한다. 이제 서서히 그녀의 시야에 목표물이 다가오기 시작한다. 맹수의 울음소리에 사냥꾼은 놀라지만, 방아쇠에 전달되는 긴장감을 애써 외면한 채 숨죽이고 기다린다. 삼촌이 자신의 아버지를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인디아. 어린 시절의 찰리는 나비가 되어 화려하고 자유롭게 날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나비가 되고 싶었던 나방이었을 뿐. 삼촌이 자신의 어머니까지 죽이려 하자 인디아는 들고 있던 총의 방아쇠를 당긴다. 탕 – 총알은 단숨에 삼촌의 목숨을 끊는다. 교차편집으로 아버지와의 사냥을 하던 인디아의 모습을 보여주는 영화의 편집 방식은 삼촌과 다른 그녀만의 아이덴티티를 부각한다. 피로 물들어버린 집을 떠나 도로를 주행하는 인디아의 모습은 어쩌면 허물을 깨고 갓 태어난 나비를 닮았다. 화려한 패턴이 새겨진 날개를 있는 힘껏 펼쳐 보이는 나비. 하지만 아직 정제되지 않은 날것을 가득 품은 나비. 어쩌면 그렇기에 더 화려하고 아름다운 나비는 이제 더 넓은 곳으로 날아간다. 어머니의 블라우스를 입고 그 위에 아버지의 벨트, 삼촌에게 받은 구두까지. 온전히 자신만의 것으로 이루어진 패턴이 아닌 물려받은 감각들로 세상으로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간다. 인디아는 가족과 머물던 집을 떠나 자신만의 ‘집’을 찾아 헤맨다. 인디아가 새로운 날갯짓을 한 그 도로 위에는 피의 인장이 새겨져있다. 








족쇄로 자신을 묶은 ‘어메이징’ 에이미 – 데이빗 핀처 감독 <나를 찾아줘> 


내 옆에 누워있는 이 여자, 표정을 알 수 없다. 영화는 가장 은밀하고 사적인 공간인 침대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여자는 공간의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은밀한 속내를 내보이지 않는다. 여자의 이름은 에이미. 남편인 닉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데이빗 핀처 감독의 <나를 찾아줘>의 오프닝 장면이다. 영화는 에이미에 대한 닉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뇌를 꺼내서 대답을 찾는 상상을 하지.” 하지만 이 글에서는 철저하게 반대로 뒤집어 에이미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생각해 보면 카메라가 비추는 사람은 에이미다. 즉 반대편에 있는 닉의 표정은 관객들이 예측만 할 수 있을 뿐, 알 수는 없다는 것이다. 감독은 결혼 생활의 단면을 쇼트를 통해서 철저하게 설계하여 분해한다. 에이미와 닉은 결혼 생활 5년 차의 부부이고, 모두가 부러워하는 결혼 생활을 하는 중이다. 에이미는 전 국민이 알고 있는 ‘어메이징 에이미’ 동화책 표지모델이며, 남편인 닉 또한 대학교수로 재직 중이다. 집 밖에서 두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선망 그 자체다. 



하지만 카메라는 천천히 닫혀있는 집의 문을 열고 중심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에이미는 피의 흔적을 남기고 사라진다.  이 사건은 실종사건일까? 살인사건일까? 에이미는 자신의 죽음을 조작했다. 몇 개의 단서만을 남기고. 에이미는 자신이 직접 집의 문을 열고 나간 것이다. 에이미의 선택은 의문을 남긴다. 도대체 왜? 앞서 말한 어메이징 에이미는 부모님이 설계한 모습이었다. 테니스를 치고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에이미. 밝고 귀여운 에이미의 모습은 약간의 진실도 존재하지만 약간의 오류가 존재한다. 에이미가 한 것은 사실이지만 테니스 대회에 나가서 우승한 적은 없다. ‘에이미는 완벽해야 한다.’ 사건의 본질은 이 문장에 의문을 품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어메이징’이라는 단어가 만든 족쇄. 그렇기에 에이미와 닉의 결혼 생활은 완벽해야 했다. 마치 꽃과 나비가 공생관계를 유지하는 것처럼. 닉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는 꽃이었고, 에이미는 자신에게 아름다운 향기와 꿀을 제공해 주는 닉에게 반한 나비였다. 반복적인 날갯짓으로 두 사람은 결혼이라는 계약을 맺었다. 어느 한쪽이 향기를 주지 않고, 꽃에 방문하지 않는다면 사라지는 모종의 계약. 하지만 이 관계에서 닉은 시들었다. 마치 꽃이 더 이상 만개하지 않고 자신의 향기를 잃어버리는 것처럼, 순식간에 시들어버린 꽃. 에이미는 이제 자신에게 아름다운 향기를 줄 꽃을 잃어버렸다. 계약은 서서히 파괴되고 있었다. 적막을 가득 안은 집에서. 



에이미는 향기가 사라진, 시들어 버린 닉의 정원을 나가 새로운 날갯짓을 한다. 하지만 어메이징 에이미는 완벽해야 했기에 권태로 인해 결혼 생활을 마무리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한 결말이었다. ‘동화책의 마지막 장을 권태로 인한 이별로 담기에는 시시해. 왕자님과 공주님은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이렇게 마무리되니까.’ 에이미는 자신이 한 선택에 오류가 있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닉은 에이미를 자신만의 정원에 가뒀으니까. 단서를 남기되 그 단서들이 닉이 자신을 죽인 살인범으로 가리키도록, 철저하면서도 아주 세심하게 계획했다.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면서까지. 에이미는 진실을 숨긴 집의 중심부에서 빠져나와 문을 열고 떠났다. 이 얼마나 웃긴가. 닉의 표정을 상상하니 에이미의 얼굴에는 웃음이 새어 나온다. 이 작품의 원제인 ‘Gone Girl’, 과연 그 소녀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앞서 말했듯이 어메이징 에이미에는 철저한 오류가 있다. 소녀는 오류라는 족쇄로 자신을 묶고 날개를 펼쳤다. 점점 옥죄어오는 족쇄는 숨을 막히게 하고, 피를 흘리게 했다. 영화 속에서 닉과 에이미는 단서 찾기를 하는 숨바꼭질을 시작한다. 마치 범인과 경찰의 심리전처럼. 에이미가 마주한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탐스러운 금발머리를 독한 염색약으로 덮고, 매끄러운 피부를 푸석하게 만들고, 그동안 먹지 않았던 고지방의 음식들로 자신의 몸매를 바꾼다. 하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던 돈을 머물던 숙소의 다른 일행들에 의해서 잃게 된다. 철저하게 세운 계획에 이러한 변수는 존재하지 않았고, 그렇게 에이미는 자신을 사랑하던 전 남자친구인 데시를 찾아간다. 데시는 자신의 별장에서 에이미를 보호하려 한다. 집에 CCTV를 설치하고 에이미의 행동을 관찰한다. 이렇게만 보면 이 작품에서 정상인 인물은 하나도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에이미는 오히려 이 조건을 철저히 이용한다. 에이미는 실종사건의 용의자로 몰린 자신의 남편 닉이 TV 프로그램에 나와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자 다시 균열된 틈으로 들어가려 한다. 데시를 성적으로 유혹해 죽이고 그의 침대를 붉게 물들인다. 오프닝의 가장 내밀한 자신의 침대에서의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이제 피의 욕망을 드러낸 것이다. 그렇게 에이미는 다시금 집으로 돌아가려는 시도를 한다. 아름다웠던 그녀의 날개는 피로 물들었다. 



어쩌면 에이미의 이야기는 단순히 그녀에 한정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다른 소녀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이야기. 어린 시절 부모에 의해 씌워진 소녀의 완벽해야 한다는 프레임은 이내 본연의 모습으로 스며들어 반복적인 패턴을 만들어냈다. 각각의 두꺼운 기둥으로 세워진 사각의 프레임은 단단한 집을 만들어 타인의 시선이 원하는 소녀의 모습을 만들어냈고, 그 소녀는 커서 여성이 되었다. 하지만 그 모습은 자신을 파멸에 이르게 하는 지독함이다. 이 글은 에이미의 시점으로 영화의 내용을 뒤집었다. 닉의 입장에서 소비되는 에이미의 모습은 남편을 살인자로 계획한 사이코패스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영화는 플롯에서조차 어메이징 에이미라는 프레임을 씌웠다. 그렇기에 에이미의 감정보다는 닉의 감정에 집중해서 이야기를 풀어낸 것이다. 두 사람은 이미 끝이 정해진 관계다. 더 이상의 희망조차 없는. 온몸에 피를 가득 묻힌 채 에이미는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냉기가 가득한 집 안에는 자신을 보고 역겨움을 애써 숨기는 닉이 있다. 집 밖에는 플래시를 터뜨리며 특종을 포착하려고 하는 기자들까지. 


에이미는 집의 중심부로 들어가 어메이징 에이미를 연기한다. 착하고 밝고 아름다운 에이미. 이제 집은 새로운 감옥이 된다. 그렇다면 에이미는 왜 다시 집으로 돌아간 것일까? 다시 사건의 본질로 들어가 보자. 결혼이라는 공생관계에서 계약을 깬 것은 닉이었다. 자신과의 관계를 깨고 바람을 피운 닉. 에이미는 분노했지만 그것을 표출하는 방식은 꽃을 꺾어 버리는 것이었다. 더 이상 자신에게 달콤한 향기를 내뿜어주지 않는 꽃은 필요가 없었다. 나비는 자신의 날개가 모두 찢기는 선택을 하면서도 꽃을 망가 뜨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에이미의 모든 행동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그녀는 피로 물든 자신의 날개로 의미 없는 날갯짓을 계속한다. 어메이징 에이미 동화책의 마지막 페이지는 아마 자신을 족쇄로 묶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연기하는 에이미의 모습이 그려져 있을지도 모른다. 아름답고 넓은 집은 단단한 성벽이 되어 두 사람을 가두게 될 것이다. 어쩌면 그녀가 닉을 살인자로 만들려 했던 시도는 어메이징 에이미에서 벗어나려던 마지막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이제 에이미는 날개가 찢긴 채 아무 냄새가 나지 않는 집에서 힘겨운 날갯짓을 반복한다. 천천히 꽃의 주위를 맴돌며.

 




Outro

짙은 화장에 손에 든 담배, 남자들을 유혹에 빠뜨려서 위험에 처하게 하는 여성. 이는 1940년대 영화 속에 키워드처럼 등장했던 ‘팜므파탈’이다. 프랑스어로 ‘치명적인 여자’를 의미하는 팜므파탈. 필름 누아르 영화에서 여성을 표현하는 공식이었다. <이중배상>(1944), <빅 슬립>(1946)과 같은 작품들은 필름 누아르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1940년대의 여성은 남성을 위험에 빠뜨리는 존재들이었고, 시대가 변화하면서 다른 여성상이 키워드처럼 등장했다. 플롯에도 공식이 있듯이 시대별로 영화 속에서 여성을 그리는 방식 또한 일정한 규칙이 있었다.  


어쩌면 나비가 허물을 벗고 나오는 것은 기존의 공식과 관습을 깨고 나오려는 시도였을지도 모른다. 박찬욱 감독의 <스토커>에서 인디아는 자신을 위협하는 삼촌 찰리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결국 사냥을 했다. 데이빗 핀처 감독의 <나를 찾아줘>의 에이미의 모습은 결혼이라는 공생관계에서 먼저 약속을 깬 닉을 살인자로 몰아가면서 카타르시스를 선사했다. 인디아와 에이미는 전형적인 여성의 역할에서 벗어나 프레임처럼 적용되던 그 집에서 탈출을 시도했다. 단순히 화려하고 아름다운 나비가 아닌 자유를 갈망하는 힘찬 날갯짓을 하는 모습을 그린 두 작품은 여성이라는 존재로 이야기를 풀어내지 않고 독자적인 인간의 이야기에 주목했다. 어쩌면 날갯짓을 반복하는 나비의 모습은 새로운 자아를 찾아 나서는 우리와 닮아있을지도 모른다. 



* 이 글은 구지팔레트 잡지 5호 '집'에 수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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