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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래냉이씀바귀 May 29.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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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집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

생각해 보니 그건 마당에 대한 열망이었고, 곧 자유를 의미했다.


하나의 공간을 찾아 헤맸던가. 잘 모르겠다. 나 혼자만의 방을 꿈꾸지도 않았고 불만은 없었다. 어릴 적 형제들과 다투면서 쓰는 방도 좋았다. 결혼하고 시간이 흘러 큰 딸이 독립하자 자연스럽게 오직 나만의 공간이 생겼다. 좋기도 했지만 큰 의미는 없었다. 좀 더 편리해졌을 뿐이다. 잠이 안 오면 뒤척일 필요 없이 남편을 방해하지 않고 들어갈 방이 있다는 정도? 어차피 집이란 내가 지배하는 나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코로나 이전에는 가끔 에세이를 쓸 때만은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하기도 했지만, 식구들이 없는 낮시간이 늘 있었다. 코로나 이후로 작은 딸이 집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졌지만, 딸은 자기 방에서 굳이 잘 나오지 않기 때문에 둘이 있어도 혼자 있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난 그 시간이 불편하지 않았고, 밖에서 보다는 집이라는 공간에서 나의 생활과 생각들로 가득 채워갔다. 그리고 불현듯 목공을 시작했다.


궁극적으로 목공에서 추구하는 것은 마당. 마당은 내게 자유로움을 상징한다.


뭔가를 보고 만들고 뭔가를 찾고,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속 깊숙한 곳에 이미 자리 잡고 있어 자기를 들여다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도시에서 마당은 참으로 상상하기 힘든 현실이다. 그런 현실에서 나를 충족시켜주는 것은 목공소에서의 작업이다. 근데 난 번외로 버려진 외면당한 자투리 나무를 하이에나처럼 찾아 뭔가를 만드는 일이 너무 재미있다. 그것은 누가 쳐다볼 필요도 없는 하찮은 결과물들이다. 그러나 내게는 대단한 즐거움을 준다. 대단한, 하찮은 평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내게는 자유로움이다. 최근에 목공 작업을 하던 목공소 옆에 우연히 공간이 생겼다. 도심에서는 생각지도 못할 그냥 써도 된다고 허락을 받은 공간. 전생에 나라를 구했던가? 커다란 유리창이 있는 일층 공간이다. 여기서 뭘 해야 할까. 사람들과 뭔가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만이 막연히 들었다. 그게 뭔지 그것이 과연 실체가 있는지 난 알 수는 없다. 단지 그 유리창 너머로 사람들이 들여다보기를 관심 갖기를 원한다. 이 공간을 들여다보고 자기 마음을 들여다 보고 그 무엇을 찾기를 바란다. 뭔가를 보고 만들고 뭔가를 찾고,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속 깊숙한 곳에 이미 자리 잡고 있어 자기를 들여다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혼자만의 것이라도 좋고 같이 나눌 무엇이라도 좋다. 그 무엇을 기다린다. 기다린다는 것! 그것은 몹시도 힘들고 두렵기도 한 감정일 수도 있지만 이런 기다림은 나를 설레게 한다. 심지어 난 그 시간을 길게 가져가 보고 싶다. 맛있는 것을 아껴 먹듯이. 금방 끝나버리면 난 또 다른 것을 찾아 어느 시간 어느 공간을 헤매고 다녀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바깥 마당, 안마당, 뒷마당. 마당이 있는 집에서 자랐지만, 나는 마당이 주는 의미를 몰랐다. 그때 당연히 주어진 마당이 내게 의미하는 바를 전혀 알지 못했다. 배드민턴을 치고, 자전거를 타고, 적당한 공기놀이 돌을 찾고, 숨바꼭질을 하느라 숨고 찾고, 해 질 무렵의 회색빛 하늘을 보고, 군불 때는 냄새를 맡고, 우물가로 나물을 씻으러 가는 엄마를 지나치고, 친구들의 고함치는 소리를 듣고, 신작로의 흙 아지랑이를 보고...


나는 새로 만난 공간에 화분을 갖다 두기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그림을 두기도 한다. 이런저런 것들로 사람들의 마음을 꿈틀거리게 하고 싶다. 오늘은 세이지를 집으로 다시 갖고 오고 테이블야자를 두기로 했다. 공기가 부족한 세이지가 노란색으로 변해가기 때문이다. 무슨 일을 해도 되고 누구든   있는 공간. 무엇이 되지 않아도, 무엇이  필요가 없는 공간. 마당과 같은 공간, 자유로운 공간이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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