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된 여행은 취리히의 중앙역에서부터 기차를 타고 루체른 역에서 내린 뒤 시작되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바람이 차고 날카로워 걱정이 많이 되었지만 첫 여정의 패기를 한가득 안고 씩씩하게 걸었다. 트램을 한번 잘못 타긴 했지만 여유 있게 출발한 탓에 다행히 너무 늦지 않게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첫 여정의 시작은 알프스의 멋진 풍광과 배경을 담고 있어 산들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리기산'을 올라가는 일이었다. 외식을 하기엔 스위스의 물가가 너무 비싸기에 리기산에 올라가기 전 Coop 마트(스위스의 대중적인 마트)에 들러 따뜻한 커피와 샌드위치를 샀다. 조금은 식었지만 해외에서 처음 먹는 샌드위치와 커피가 얼마나 맛있던지, 스위스를 여행하는 내내 Coop 마트가 보이면 차가워도 맛있게 먹었던 샌드위치부터 찾곤 했다.
리기산에 올라가기 위해서는 유람선을 타고 이동을 하는 게 일반적인데 이미 유람선을 타기 위해 이동하는 풍경이 실로 압도적이었다.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아름다운 호수와 초록초록한 언덕에 오밀조밀 모여있는 집들까지, 순간순간이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압도적이고 멋있었다. 멋진 풍경을 자랑하기 위해 연신 영상통화를 하던 우리는 2등석 티켓인지도 모른 채 1등석에서 시끄럽게 떠들다가 결국 "이 공간은 너희가 올 수 없어"라는 관리인의 꾸짖음과 함께 2등석으로 쫓겨났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난 지금 동화 속에 나오는 멋진 풍경을 보며 유람선을 타고 호수를 누비고 있는 것을, 누구보다 충분히 행복감을 느끼고 있는 것을. 이 모든 것이 여정이자 여행인 것을.
유람선을 타고 비츠나우 역에서 내려 산악열차를 타고 리기산 정상을 향해 출발했다. 스위스에 오기 전까지만 해도 산은 걸어서 가거나 자동차를 통해서만 정상으로 올라가야 한다는 인식이 있었지만 열차를 타고 산을 올라간다는 것은 꽤나 두려운 일이자(난 고소공포증이 있다. 아주아주 약간;;) 신기한 일이었다.
하얀 눈이 뒤덮인 리기산 정상으로 가는 길, 구름이 산봉우리들을 휘감고 있고 온통 하얀 세상이 펼쳐졌다.
겨울에 눈이 많이 오고 난 후 리기산을 올라가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있는 경악을 금치 못하는 풍경이 펼쳐진다. 살면서 봤던 그 어떤 풍경보다 더 장엄하고, 멋지다. 사실은 어떤 글로도 형용되지 않을 풍경이 압도적으로 펼쳐진다. 유람선을 탔을 때의 풍경도 멋진 풍경이었지만 리기산 정상에서 알프스 산맥을 바라보는 풍경은 어떤 말로도 형용하지 못하겠다. 나와 내 아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우와"라는 감탄사만 연신 남발하며 리기산을 눈에 담으려 애썼다.
어떤 느낌이랄까? 사진을 찍다가 멈추고 말았다. 어떻게 찍어도 사진에 담기지가 않아서.
영상통화도 사치라고 느껴졌다. 그냥 여기는 직접 와서 봐야 한다는 생각만 머릿속을 꽉 채웠다. 살면서 이런 풍경을 또 눈에 담을까 싶을 정도로, 어떤 말로도 표현하기 싫을 정도로 꼭 간직하고 싶은 내 인생의 가장 멋진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미리 사온 샌드위치를 꺼내 매점에서 파는 생맥주와 함께 알프스 산맥의 풍경을 안주삼아 제법 시간을 보냈다. 하산하는 열차 시간이 정해져 있는 탓에 우리는 다시 하산열차에 몸을 실었다. 내려가는 내내 감동이 멈추지 않았고, 가슴이 뭉클해짐을 느낀 채 하산을 완료했다, 아니 완료했어야 했다. 내리고 보니 아뿔싸! 아내가 유럽에 가져가기 위해 큰 결심을 하고 구매한 비싼 귀마개를 정상 어딘가에 두고 왔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내게 말했다. 처음에는 어딘가에 있을 거라며 가방과 온몸을 샅샅이 뒤졌지만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두 가지 선택을 해야 했다. 아쉽지만 다음 여정을 위해 귀마개를 포기할 것인지, 마지막 열차를 놓칠지도 모르지만 귀마개를 찾으러 가봐야 할지.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아마 다시 찾으러 가는 것보단 나머지 일정을 소화하자고 아내를 설득했을 터이다.
어디서 잃었는지 기억도 불확실하고, 비싸지만 귀마개를 찾다가 나머지 일정이 꼬이면 또 그만큼의 비용이 새롭게 발생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방금 어디서 내려왔는가. 말로도 표현하기 싫고 사진에 담기지 않아 찍기를 거부한 알프스의 여왕 '리기산'이지 않던가.
그래.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리기산을 눈에 한 번만 더 담을 수 있다면, 멋진 풍경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새롭게 펼쳐진다면 내 기꺼이 많은 것을 희생해서라도 한번 더 투자해 볼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아내는 내심 나에게 고마워했다. 일정이 꼬일 수도 있었지만 짜증 한번 내지 않고 기꺼이 귀마개를 찾으러 가주는 남편에게 내심 듬직함을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난 단지, 멋진 풍경을 한번 더 담기 위해 열차에 몸을 던진 것 뿐이지만.
결국, 마지막 열차 시간이 다 되도록 열심히 찾아봤지만 귀마개는 찾지 못한 채 끝내 빈손으로 하산했다.
나는 액땜이라는 말을 꽤 좋아한다. 큰 일을 치르기 전에 생기는 자그마한 사고는 더 큰 불행을 막아주고 경각심을 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귀마개 사건(?) 이후로 우리는 조그마한 소지품도 잊어버리지 않은 채 길고 긴 유럽여행을 마칠 수 있었다. 비록 웃지 못할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나에게 모든 것이 여정이자, 여행의 일부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