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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현미 Jun 01. 2024

영화 300의 모티브, 테르모필레 전투

제2차 페르시아 전쟁(1)


 기원전 490년, 미라톤 평야에서 그리스에 대패한 페르시아가 복수전을 위해 또다시 그리스를 침략한 건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기원전 480년경의 일이다.

 유라시아를 호령하던 대제국이 일개 약소국에게 당한 치욕을 되갚 위한 준비기간치곤 꽤 긴 시간이었다.


 사실, 그 사이 페르시아는 많은 일들로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점령국이 많다 보니 곳곳에서 수시로 일어나는 반란을 잠재워야 했는데, 특히 이집트에서 일어난 대규모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애를 먹고 있었다.

  와중에 그리스와의 전쟁을 주도했던 다리우스 1세가  세상을 떠나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가  뒤를 이었다.


 처음엔 아버지와 달리 그리스 복수전에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던 크세르크세스는 선대 왕을 보좌하던 신하들의 설득전쟁을 부추기는 듯한 신탁 등으로 마음을 바꿔 먹고 전쟁을 철저히 준비하며 와신상담 시간을 보낸다.

 

 마침내 모든 준비를 끝낸 크세르크세스는 기원전 480년, 그리스를 재침략함으로써 제2차 페르시아 전쟁의 서막을 열었다.


제2차 페르시아 전쟁 루트

 한편 페르시아 침략이 기정사실화 되자 그리스에서는 앞다퉈 흙과 물을 바친 1000여 개의 폴리스들과 달리, 적의 속국이 되것을 거부한 30여 개의 폴리스들이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주축이 된 그리스 연합군을 형성했다.

 이들페르시아가 헬레스폰테스 해협을 건너 내륙을 정벌하면서 그리스 본토로 남하하는 것을 알고 그 길목인 테르모필레스파르타군을, 아르테미시 해협아테네 해군을 배치하여 동시에 적의 육군과 해군 막자는 전략을 세웠다.


스파르타군 300의 전설, 테르모필레 전투


 변수가 없진 않았다. 이때 하필  스파르타가 또 종교행사 기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난번 마라톤전투 때처럼 출전을 미룰 상황이 아니었다. 국가 존망의 위기를 느낀 스파르타는 레오니다스 왕이 이끄는 정예 부대 300명과 노예와 자유민등으로 구성된 약 1천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격전지로 향했다. 도중에 동맹군들까지 합류한 약 7천 명의 그리스 연합군들은 테르모필레에서 페르시아 군과 맞서 역사적인 전투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테르모필레트라키아 절벽과 말리만 사이에 있는, 겨우 마차 한 대가 지나갈 정도로 좁은 협곡이었다. 수적으로 열세한 그리스 연합군이 수십, 수 백배에 달하는 페르시아 군을 상대하기 위해선 지리적 이점을 최대한 용해야 했는데 그 점에 있어테르모필레는 아주 적합한 장소였다.

 그리스 군은 그들의 중장보병을 활용하기에 용이하고 페르시아 대군이 한꺼번에 진격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곳을 격전지로 선택했는데 그들의 전략은 맞아떨어졌다. 

 좁은 폭 때문에 소규모의 경무장을 한 적군이 일렬로 쳐들어 오자 입구에 버티고 서있던 중무장의 그리스 군이 차례로 무찔렀고 페르시아 군은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전쟁 초반, 그리스의 뛰어난 전술 때문에 페르시아는 수의 병력을 보유하고도 고전을 면치 못했다. 급기야 최고 정예부대인 모탈 부대를 투입해 상황을 바꿔보려 했지만 그들 역시 그리스의 방어선을 뚫지 못했다. 

 크세르크세스의 고민이 깊어갈 즈음 페르시아의 진영으로 뜻밖의 구세주가 등장한다. 바로 에피알테스란 그리스인이  보상금을 노리고 테르모필레우회하는 산길을 알려준 것이다.


 테르모필레 진입로와 우회로


 이에 페르시아 군은 전렬을 가다듬고 에피알테스가 알려준 우회로를 따라 대군을 이동시켜 그리스 연합군의 후방을 치는 작전을 펴게 된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는 일부의 철수하자는 의견을 무시하고 스파르타의 정예군 300명과 기타 연합군등 1000여 명만 남긴 채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나머지 병력은 철수시킨다. 이제 그들에겐 결사항전 만이 남아있었다.


  헤로도토스는 [역사]에서 그들의 용맹함을 극찬했다. 

 창이 부러지면 허리의 단검을 뽑아 싸웠고, 칼이 부러지면 돌을 주워 싸웠으며 그것마저 여의치 않을 때는 주먹과 이빨을 이용해 싸웠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크세르크세스가 궁병들을 동원해 하늘을 뒤덮을 정도의 화살비를 퍼붓자, 결국 그들은 전쟁 발발 7일 만에 전원 전사하고 만다.


 한편, 가까스로 전쟁에 이겼지만 테르모필레에서 지체한 시간과 병력이 아까워 화가  크세르크세스는, 적군의 장수를 정중히 매장하는 페르시아의 관습을 따르지 않고 적장 레오니다스의 시체를 보란 듯이 효수해 전시했다고 한다.


 비록 그리스 연합군이 패배한 전투였지만 테르모필레 전투는 역사적으로 많은 의미를 남겼다.

 조국 땅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불사한 애국적인 자유민 군대의 위용을 유감없이 보여준 사례였으며,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전투에서 훈련, 장비, 지형 등의 이점을 활용해 최대한의 전력을 상승시킨 대표적인 예가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압도적인 수의 적군에 굴복하지 않고 그들의 조국과 자유수호를 위해 당당히 맞서는 진정한 용기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스인들은 비문을 세워 그들의 용기와 희생을 기리고자 했는데 그곳에 새겨진 그 문구가 아무 관련 없는 낯 선 나라의 타인에게 조차 벅찬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나그네여, 가서 스파르타인에게 전하라.
우리들은 조국의 명을 받아 여기 잠들었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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