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무엇을 알고 쓰는가
클래식 음악을 현장 혹은 앨범으로 듣고 전문적으로 평가하는 클래식 비평가는 우리나라를 포함해서 전 세계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이곳 브런치에서도 그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비평가들의 존재는 클래식 음악을 전문적으로 평가하고 '더 개선되어야 할 점은 무엇인지', '해당 연주가 가치가 있었는지' 등을 대중에게 전달한다는 점에서 죽어가는 클래식 시장의 한 줄기 희망이 되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중 대다수가 '전문적'이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울 정도로 오직 귀와 경험에 의존하여 얕은 지식 속에서 비평을 하곤 한다.
비평은 직감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지식과 경험으로 자신만의 기준을 만들고 연주들을 그 기준에 비교하여 '무엇이 좋은지', '무엇이 나쁜지', '무엇이 특이한지' 등을 가려내는 것이 비평의 역할이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지식'을 무시한 채 잘못된 기준으로 비평을 하는 사람이 즐비하다는 것이 문제이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이란 '분석'과 '해석' 중 분석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비슷해 보이는 이 두 단어, 분석과 해석은 어떤 차이가 있는지 들여다보자.
간략하게 클래식 음악에서 분석과 해석을 정의하자면, 분석이란 악보와 작곡된 배경 등을 참고하여 작곡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고, 해석은 작곡가가 기보 하지 못했거나 안 했던 부분들을 연주자들이 임의로 해석하여 연주하는 것을 의미한다. 비평을 할 정도로 클래식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라면 당연 해석이 무엇인지, 또한 이 해석이 각각의 연주를 얼마나 풍요롭고 다채롭게 해 주는지 공감할 것이다. 그러나 해석은 분석 위에서 행해져야만 비로소 해석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하지만 많은 연주자들과 비평가들이 이 부분을 인지하지 못한 채 작곡가의 권위를 뛰어넘어 해석이라는 이름으로 곡을 들쑤신다.
쇼팽의 발라드 1번을 연주한 위대한 연주자 두 명을 비교해 보자. 발라드 1번의 마지막 부분에는 왼손과 오른손이 상행하며 스타카토로 잠깐의 침묵을 만들어내는 부분이 있다(250마디). 쇼팽 콩쿠르를 우승하며 한국의 대스타가 된 조성진의 연주와 쇼팽 콩쿠르 2등 없는 3등을 차지했던 임동혁의 연주를 비교해 보자면, 조성진은 이 부분에서 페달을 더 길게 끄는 것을 들어 볼 수 있다. 그에 비해 임동혁의 연주는 페달을 빨리 끊어서 깔끔하게 끊어낸다. 이 두 연주모두 충분히 매력적인 연주이지만, 분석법적으로 보자면 쇼팽은 이 부분에서 페달을 사용하지 않고 음을 깔끔하게 끊어내서 침묵을 더 강조하기를 바랐고, 이에 가까웠던 것은 임동혁의 연주였다. 이와 같은 예시에 굉장히 불편해질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네가 뭐라고 쇼팽 콩쿠르 우승을 한 조성진을 비판하느냐고 말이다. 하지만 비평을 하는 당신들이 분명하게 알아야 하는 것은 세계 정상급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 연주자의 해석이 언제나 옳은 해석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연주자는 작곡가 위에 서있어서는 안 된다. 또한 비평가는 분석에서 벗어나 있는 연주자의 해석을 듣고 그것이 좋은 해석이라고 생각하고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간혹 이에 대해 아래와 같이 반박하는 사람도 있다.
"만약 누가 들어도 어색하거나 맥락에 맞지 않는 작곡가의 기보가 있다면 그런 부분도 존중해 주어야 하는가? 그런 부분을 듣기 좋게 다듬어서 대중에게 연결하는 것 또한 해석의 영역이라 볼 수 있지 않는가?"
타당한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연주자는 작곡가와 대중을 연결시켜주는 하나의 단계로써 대중에게 즐거움을 선사할 의무 혹은 가치가 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작곡가를 너무 배려함으로 생겨나는 문제이다. 대략 18세기부터 20세기까지 이어진 유럽의 클래식 음악은 세 가지 역할로 구성된다. 첫 번째는 음악을 생산하는 작곡가이고, 이가 생산한 음악은 악보를 통해 두 번째 역할인 연주자에게 전달된다. 연주자는 이 악보를 분석하고 해석하여 세 번째 역할인 대중에게 연주로 전달한다. 이때 이 세 가지 단계에 있어서 그들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해서는 안된다. 즉, 작곡가가 곡을 아무리 이상하게 작곡했을지언정 연주자는 작곡가의 악보 안에서 해석을 진행해야 하며, 연주를 통해 곡을 듣는 대중들은 이상하거나 어색한 곡의 구조나 표현등을 비평함에 있어 무조건적으로 평가대상을 연주자로 삼는 것이 아닌, 분석을 통해 이러한 미적이지 못한 연주가 좋지 않게 작곡됨으로 생겨난 결과인지, 연주자의 기이한 해석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판단 후 평가를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한국에서 클래식 음악을 포함한 예술은 상당히 얕게 소비되고 있으며, 돈과 시간을 쓰며 연주를 듣는 소비자, 즉, 대중에 입장에서는 직관적으로 듣기 좋지 않은 연주는 선호되지 않고 이는 제대로 된 분석과 해석을 이행하는 연주자의 도태를 유발한다. 이러한 현상을 막을 수 있는 것이 바로 비평가이다. 비평가들은 전문적으로 악보를 분석하고 연주자의 해석을 분석과 분리시킨 뒤 객관적으로 또한 사실적으로 '이 연주가 왜 이렇게 연주되었으며', '대중들이 해당 연주를 들을 때 어떤 부분에 집중해서 들어야 하는지' 등을 알기 쉽게 풀어 대중에게 전달하고 가이드라인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이보 포고렐리치(Ivo Pogorelić)가 연주한 쇼팽의 프렐류드 1번(24 Prelude, Op.28, No.1 in C Major - Chopin)을 들어보자. 아마 비평을 많이 했던 사람들 혹은 클래식음악을 주의 깊게 듣던 사람들은 보편적인 해석과 다른 해석에 적잖이 당황할 것이다. 이 곡과 연주에 대한 해석은 추후에 다른 게시물에서 더 자세히 다루겠지만 간단히 요약해서 말하자면, 이 해석은 단 한 부분도 분석을 넘어서지 않았다. 오히려 보편적인 연주보다 악보를 더 잘 지킨 편이다.
이러한 것이 비평 그리고 비평가의 역할이다. 대중들이 쉽게 찾아보지 못하는 혹은 쉽게 분석하지 못하는 부분을 대신 분석하여 대중들에게 근거와 함께 이 곡이 연주되어야 하는 기본 방향성을 제시해 주고, 그 방향성에 근거하여 연주자들의 해석을 비교하고 들여다보며 특징들을 살피는 것 말이다.
나의 주장이 정답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비평가들이 직관과 직감에 기대어 비평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이것은 작곡가의 의도나 목적성을 왜곡시킬 수 있다. 그러므로 분석을 통해 얻은 지식에 기반하여 비평을 하는 것은 작곡가의 의도와 연주자의 의도를 명확히 구분 지을 수 있고, 이를 근거 삼아 평가하여 대중에게 전달하는 것이 제대로 된 비평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