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투루 쓰면 안 되니 이해는 한다만
내가 지금 일 하는 회사는 연구용역을 하는 용역사이다. 그러다 보니 시청 등 공공기관과 업무를 많이 한다. 공무원과의 업무는 서류가 시작이자 끝이라고 할 수는 있겠지만 요즈음은 이에 대한 스트레스가 너무 심하다.
2,000만 원 정도의 수의계약을 하는 경우 사업 종료 후 정산보고를 하면 된다. 아니, 성과품에 해당하는 결과물이 명확하게 있는 경우 해당 성과품만 제대로 납품이 되면 사실상 정산보고가 없어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공공기관에서는 관습적으로/습관적으로 정산보고서를 요구하는 상황이기는 하다.
뭐 어쨌든, 간단한 수의계약인 경우 정산 보고도 짜증 나는 작업이기는 하나 과업을 수행하는 짬짬이 준비를 하거나 자료만 철저하게 준비해 놓으면 사실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다. 시간이 많이 걸리고 품이 많이 드는 작업이라 그렇지 하려면 하는 것.
그런데 지금 내가 진행하고 있는 '국고 보조금'의 경우 정부에서 사용하는 시스템을 사용한다. 그리고 상급기관(우리의 경우 시청)에서 수시로 지출서류에 대한 점검을 한다. 그런데 이게 국가의 세금을 허투루 쓰면 안 된다는 큰 이유에는 충분히 납득하겠다. 잘 못 쓰일 수 없다는 것 역시 충분히 납득하겠다. 그런데.. 관련 서류 작업이 너무 불필요하다 싶을 정도로 많다.
최초 계획서가 있어야 하고, 돈 쓰겠다는 품의서를 적고, 쓸 때마다 계획서에 근거한 지출공문이 필요하다. 물품을 구입하고 나면 구입했다고 사진 찍고 샀다는 확인 서류가 필요하고, 마지막에는 해당 사업/행사에 대한 종합 결과보고서를 써야 한다. 하나의 사업/행사를 진행하려면 재료비도 있어야 하고, 관련한 물품도 사야 하고, 사무용품도 사야 하고 이런저런 지출할 것이 많은데 일일이 다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최초 계획서가 있으면 그거에 근거해서 알아서 좀 쓰고 최종 결과보고서에 그동안 지출한 모든 내역을 붙여서 보고 하면 안 되나? 그동안 국가 시스템이 진행되어 가며 만들어진 보강작업들이 있고 시스템이 견고해진 것은 알겠으나 소소한 지출에도 이 모든 과정이 다 있어야 한다는 것은 참 합리적이지 않은 것 같다.
서류를 작성하기 위한 행정투입 인력의 시간, 출력할 때 쓰는 종이와 토너, 결재를 받기 위한 시간과 보고하기 위한 각종 시간과 비용들.. 좀 간편해질 수 없는 건가? 행정 간소화와 혁신을 부르짖지만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복잡하고 어려워지는 느낌이다. 나랑 같이 파트너로 일 하는 주무부처의 이름이 '미래혁신추진단'인 것을 생각하면 실소를 금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