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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쟁이의 헤테로크로니(4)

by Outis

“나도 나중에 우리 아빠 같은 사람 만나서 꼭 저런 커플이 돼야지.”


“아버지께서 굉장히 좋으신 분인가 봐.”


“응! 우리 아빤 정말 최고야.”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저렇게 말하는 게 너무 신기하다. 대체 어떤 분이시길래. 얼굴도 모르는 아랑의 아버지에 대해 막연한 동경심이 생길 정도다.


아랑은 옛날 돈가스, 나는 일식 돈가스를 시켰다.

잠시 후 음식이 나왔다. 따끈따끈. 바삭바삭. 일식 돈가스도 흠잡을 데 없이 훌륭했다. 같이 나온 양상추 샐러드에 오늘은 사과 조각도 들어 있었다.


“진짜 맛있다. 오길 잘했어. 나 경양식 돈가스 되게 좋아하거든.”


“그래?”


“응. 정말 오랜만에 먹어보는 거 같아.”


아랑은 마치 세상을 다 가진듯한, 진심으로 행복해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있어서 팍팍한 세상도 살만한 거겠지?”


나는 먹다 말고 눈을 껌뻑거렸다. 고작 밥이 맛있는 걸로 세상에 대해 저렇게나 관대해질 수 있다니, 놀랍다.


“단세포.”


“뭐얏?”


파닥거리는 게 재밌어서 좀 더 놀리고 싶지만, 저 단순한 사고방식의 근거가 너무 궁금해서 얘기가 딴 데로 새기 전에 물어 보았다.


“음식이 주는 기쁨은 고작 먹는 그 순간뿐인데, 그게 어떻게 삶의 이유가 될 수 있지?”


“삶의 이유까진 아니어도... 계속 살고 싶게 만드는, 일종의 원동력 역할은 할 수 있잖아?”


“내일 또 못 먹더라도?”


“어? 그게 뭐? 다른 걸 먹으면 되지.”


이런, 그야말로 ‘빵이 아니면 과자’로군. 이래서 어려움을 모르는 애들이란.


“내 말은, 계속 맛있는 걸 먹을 수 있다는 보장이 없으면 어쩔 거냐는 거야.”


“어.. 그럼 먹을 수 있도록 더 열심히 사는 거지!”


“... 그럼 결국 그게 삶의 이유인 거 아냐?”


“어? 어... 그런가?”


아랑이 점점 헷갈린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는 자기 돈가스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먹음직스러운 돈가스의 자태와 아직 혀에 남아 있는 맛이 다시금 확신을 안겨주었던지, 아랑은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들고서 말했다.


“그럼 안 돼? 맛있는 거 먹고, 재밌는 데 놀러 가고, 좋은 거 보고, 듣고, 행복한 추억을 쌓기 위해 살면?”


“안될 건 없지. 개인의 가치관이고 자유니까. 다만 허무하지 않겠냐고.”


“안 허무한데? 오늘이 즐겁고, 내일은 기대되고, 어제는 추억이 되잖아?”


어째 갈수록 더 이해하기가 힘들다. 이 간극을 어떻게 하면 좁힐 수 있을까.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 그럼, 더 이상 오늘이 즐겁지 않고 내일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면 어때?”


“어떻게?”


“간단해. 돈이 없어 생활고에 시달리는 거지. 더는 맛있는 것도 못 먹고 놀러 가지도 못하는 거야. 그럼 어떨 거 같아?”


“으음...”


아랑은 이번엔 꽤 심각한 표정으로 돈가스를 노려보았다. 마치 돈가스가 답을 감추고 있는 것처럼, 그래서 돈가스를 추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마침내 돈가스가 답을 내놓은 걸까. 아랑이 포크로 한 조각을 찍으며 말했다.


“뭐든지 상대적인 거라고 생각해. 이 돈가스도 세계적인 부자들이 먹는 초호화 음식에는 비할 수 없겠지만, 우리에게는 정말 맛있는 음식이고, 또 먹으면서 행복하잖아? 상황마다 그 나름의 행복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남한테는 흔한 돌멩이도 나한테는 소중한 보물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와앙. 아랑은 돈가스를 입에 넣고서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아직 만족하지 못했다.


“그래, 맞아. 누구나 자기 수준에서 만족을 찾을 수 있지. 그런데 아까 내가 한 말은 그보다는, 한 개인이 인생 전반에서 겪을 변화에 더 초점을 두고 있는데.”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왜, 사람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건 쉬워도,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건 힘들다잖아.”


“응? 오히려 그 반대 아냐?”


“아니 내 말은, 사회적 위치나 부, 명예의 박탈 말이야. 쉬운 말로 잘 살던 사람이 갑자기 가난해지면, 그 반대의 경우보다 변화에 적응하기 훨씬 어렵다는 거지. 당연히 누리던 걸 이젠 누릴 수가 없으니까.”


“아아, 그 뜻이구나.”


“한순간에 모든 걸 잃는 거, 인생에선 흔하잖아.”


나는 빨갛게 잘 익은 방울토마토를 포크로 굴리며 말을 이었다.


“예전에 본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레인 포레스트에 사는 어떤 개구리가 나왔어. 걔네들은 암컷은 나뭇잎에 알을 낳고 가버리고, 수컷이 알을 지킨대. 그래서 수컷은 새끼가 알에서 나올 때까지 그 주변을 맴돌며 멀리 가지도 못해. 포식자가 오면 자기가 미끼가 되어 유인하려고. 그 다큐멘터리 끝에 운 좋게 살아남은 한 아빠 개구리의 모습을 비추면서 이런 멘트가 나와. ‘레인 포레스트에서는 하루 살아남은 것도 큰 승리’라고.”


푹. 포크에 찍힌 토마토에서 빨간 즙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난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었어. 과연 저렇게 사는 게 의미가 있을까? 그날 살아남고, 다음 날 죽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지? 새끼가 무사히 태어나 부모의 유전자를 이어가면 비록 아빠 개구리는 죽어도 목적을 이룬 거 아니냐 할지 모르지만, 그럼 그 새끼는 또 어떤데? 결국 부모와 같은 운명을 반복할 뿐이지.”


나는 토마토를 입에 넣고 씹었다. 입 안에 시큼한 맛이 감돌았다.


“오늘 누린 행복을 내일 잃어버린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고, 내일 죽는데 오늘 사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문득 세라 선배와 선배에게 한소리 하셨다는 그 선생님이 떠올랐다. 그들은 원래 삶에는 늘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고, 그걸 알면서도 주어진 시간을 묵묵히 살아가는 걸로 의미를 만드는 거라 했다.

아랑은 과연 어떤 대답을 할까?


“... 체할 거 같아.”


“어?”


아랑이 정색하며 날 꾸짖었다.


“넌 무슨!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그런 암울한 소릴 해? 음식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자, 얼른 먹어!”


아랑의 포크가 내 접시 위의 돈가스 조각을 찍었다. 커다란 고기조각이 내 입 안으로 쑥 들어왔다.


“읍!”


“그렇게 살다가는 태어나자마자 폭삭 늙어버리겠다.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면 되는 거야. 내일은 또 다른 날이고, 내일의 나는 오늘의 내가 아니니까 뭔가 있겠지. 행복의 기준도 변할 거고.”


우물우물 고기를 씹으며, 나는 아랑의 말을 곱씹었다.


“그리고 넌 왜 그렇게 비관적이냐? 어떻게 안 좋은 일만 있을 것처럼 그래? 안 좋은 일이 있으면 좋은 일도 있고 그런 거지.”


꿀꺽. 입안을 가득 채웠던 고기가 간신히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저 태평함은 타고난 걸까, 아니면 안정되고 풍요로운 환경에서 학습된 걸까.

아랑은 양배추채 속에서 사과 한 조각을 찾아 포크로 찍더니, 보란 듯이 내 앞에서 흔들었다.


“그런 말도 있잖아?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지구가 망하는데 사과나무가 뭔 소용이겠어. 그 말은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어도 희망을 갖고,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겠단 거잖아. 그런 사람이 되자고.. 어!”


어째 너무 흔들어대더니. 얇은 사과 조각이 견디지 못하고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주변에 소스를 튀기며 장렬히 전사한 사과를 우리는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서로를 쳐다보며 웃었다.


“푸훕.”


“흐훗.”


“이렇게 떨어지는 사과를 보면서 중력도 발견하고?”


“그런 대단한 일 하지 않아도, 밥 맛있게 먹고 잘 살면 돼. 이제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먹어.”


“응.”


“맛있다.”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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