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자루, 핏빛 달, 그리고 우리가 만든 악몽
핏빛 달이 뜨면 하늘을 나는 여인이 나타난다고 믿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속삭였고, 빗자루를 타고 날았으며, 아이를 병들게 하고 남자를 유혹하며 마을에 저주를 퍼뜨린다고 여겨졌습니다.
중세 유럽에서 '마녀'는 단순한 미신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사회가 통제할 수 없던 존재, 지배 질서에서 벗어난 존재,
그리고 무엇보다 공포의 얼굴을 뒤집어쓴 여성이었습니다.
빗자루는 본래 집 안의 도구였습니다.
청소하고, 정리하고, 가사를 돌보는, 다시 말해 여성의 전통적 역할을 상징하는 물건이었지요.
그런데 이 빗자루가 하늘을 나는 마녀의 상징이 된 순간, 사회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여성이 집을 벗어나면 위험하다."
중세의 마녀사냥은 단순히 ‘악을 처단’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건 사회가 다룰 수 없던 여성을 통제하기 위한 조직적인 폭력이었습니다.
혼자 사는 여성, 결혼하지 않은 여성, 약초에 대해 아는 여성, 말을 똑바로 하는 여성, 권위에 질문을 던지는 여성.
그들은 이해받지 못했고,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으며, 결국 ‘마녀’라는 이름으로 불타올랐습니다.
그리고 여성의 지식, 자율성, 독립성은 악마의 속삭임으로 치환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핏빛 달이 뜨는 밤, 마녀가 나타난다고 믿었습니다.
블러드 문은 마녀의 출현을 알리는 신호처럼 여겨졌습니다.
사실 블러드 문은 천문학적으로 보면 평범한 월식 현상일 뿐입니다.
하지만 중세의 사람들은 피처럼 붉은 그 달을 보며, 불길함과 재앙을 떠올렸습니다.
특히 여성은 월경과 달의 주기를 공유한다는 이유로, 자연과 연결된 불안정한 존재로 간주되었고, 그 신비함은 곧 금기가 되었습니다.
여성의 몸은 예측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고, 그 예측 불가능함은 사회가 통제할 수 없는 위험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핏빛 달은 마녀가 오는 신호로 해석되었고, 그 자체로 여성성과 악의 연결고리가 되었습니다.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유럽 전역에서 수만 명의 여성이 마녀로 지목되어 고문당하고 불태워졌습니다.
그들은 악마를 숭배한 적도, 저주를 건 적도 없었습니다.
그저 남성과 다른 방식으로 존재했다는 이유로, 지배 구조를 위협할 수 있는 지식과 경험을 가졌다는 이유로, 지워지고 제거되었습니다.
마녀사냥은 종교의 이름을 빌렸지만, 그 본질은 여성의 목소리와 주체성을 억누르기 위한 정치적, 사회적 폭력이었습니다.
그 시기의 기록을 들여다보면, 남성 의사가 하지 못한 치료를 한 여성, 다산이나 성욕에 대한 지식을 가진 여성이 특히 많이 탄압받았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1486년에 출간된 '말레우스 말레피카룸(마녀의 망치)'에서는, 여성들이 허락 없이 산과 지식이나 성 건강 관련 치료를 하는 것을 ‘마녀적 행위’로 간주하며 강하게 비난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마녀사냥의 핵심 참고서로 쓰였으며, 여성의 성적 지식과 생식 통제를 악마적 능력으로 낙인찍었습니다.
또한 1593년 독일의 뉘른베르크에서 있었던 마녀 재판 기록에는, 산모를 살린 조산사 한 명이 “비정상적으로 많은 아이를 살렸다”는 이유로 마녀로 몰려 화형 당한 사건이 남아 있습니다.
그녀는 ‘신의 섭리를 어긴 자’로 간주되었고, 산모의 생명을 구한 일이 오히려 불경함으로 해석되었습니다.
이처럼 당시의 ‘마녀’ 탄압은 단순한 신앙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여성의 몸, 지식, 욕망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한 채 그녀들을 비정상, 비이성, 위험으로 낙인찍던 장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마녀를 불태우지 않습니다.
하지만 ‘마녀사냥’이라는 표현은 여전히 살아 있고, 그 말은 다수의 불안이 특정 개인에게 쏟아지는 폭력의 구조를 그대로 보여줍니다.
우리는 여전히 크게 웃는 여성을 불편해하고, 자신의 몸에 대해 발언하는 여성을 비난하며, 목소리를 내는 여성을 ‘도전적’이라 말합니다.
마녀는 사라진 것이 아니라, 형태만 바뀌어 살아남은 채, 여전히 여성의 다름을 통제하는 장치로 기능하고 있습니다.
‘마녀’라는 말은 더 이상 과거의 오해나 공포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사람,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 기존의 권력과 질서에 물음을 던지는 사람에게
우리는 여전히 조롱과 혐오, 의심과 통제의 시선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제는 그런 태도를 멈추고, ‘마녀’라는 상징을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볼 때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불편해하고, 왜 두려워하며, 누구에게 함부로 '이상하다'는 꼬리표를 붙이고 있는지 말입니다.
다음에 누군가를 마주하며 불편함을 느끼신다면, 이렇게 자문해 보면 어떨까요?
"이 사람에게 어떤 프레임을 덧씌우고 있는 건 내가 아닐까?
나는 지금 또 하나의 마녀를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마녀라는 이름은 우리가 어떤 존재를 배제해 왔고, 또 지금 누구를 배제하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만드는 질문의 이름이 되어야 합니다.
마녀에 대한 미신은 과거의 잘못된 신념이 아니라, 오늘의 우리가 다름을 받아들이는 태도, 그리고 권력의 이름으로 누군가를 침묵시키지 않으려는 의식적인 노력의 출발점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미신을 통해 배워야 할 것은 단순히 사실 여부가 아닙니다.
그 미신이 어떤 사회적 불안을 반영했고, 어떤 존재를 억압하는 장치로 작동했는지를 살펴보는 일입니다.
그것이 바로 역사에서 반복된 폭력을 반복하지 않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