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없던 선택을 플레이하다
트렌드에서 좀 많이 늦은 감이 있지만...... 쓰던 걸 아예 더 철이 지나서 못 올리기 전에 올려보기로 한다.
〈성세천하: 여제의 탄생〉은 중국 당나라 시대를 배경으로, 역사상 유일한 여제 측천무후의 일대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인터랙티브 스토리 게임이다. 기존 사극이나 역사물에서 자주 다뤄지던 측천무후의 서사는 대체로 냉혹한 권력자 혹은 야심가의 이미지에 집중돼 왔다. 하지만 이 게임은 플레이어가 그녀의 선택을 직접 만들어간다는 점에서 조금 다르다. 플레이어는 궁녀에서 출발해 권력의 최정점에 오르기까지 수많은 정치적·감정적 결정을 내리며 숙모가 주는 계화탕을 배부르게 먹고, 그 과정에서 마주하게 되는 인물 중 하나가 바로 이태(李泰)다.
이태는 단순한 주변 인물이 아니라, 게임 전반의 긴장감을 형성하는 핵심축에 놓여 있다. 황실의 왕자이자 플레이어가 공략할 수 있는 대상 중 하나로 등장하며, 권력의 중심과 주변을 동시에 오가는 인물이다. 그는 때로는 조력자이며, 특정 루트에서는 감정선이 깊게 연결된다. 게임은 그를 통해 단순히 역사적 사실을 재현하기보다, 이미 닫혀버린 인물의 서사를 다시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확장한다.
역사 속 이태(620~653)는 당 태종 이세민의 넷째 아들이다.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 ‘청작(青雀)’이라 불렸고, 정비 장손황후의 소생으로 정통성을 갖춘 인물이었다. 태종의 총애를 받아 한때는 황위를 이을 것으로까지 거론됐다. 그러나 태자였던 형 이승건이 반역 혐의로 폐위된 뒤, 이태를 중심으로 세력이 모이자 태종은 오히려 그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권력욕이 과하다’는 이유로 그는 푸공왕으로 강등되고 지방으로 유배되었으며, 결국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로 병사했다. 총애에서 의심으로, 중심에서 추락으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비극이었다.
〈성세천하〉는 이 비극의 경로를 그대로 따르지 않는다. 플레이어가 측천무후(무재인)로서 궁중의 복잡한 권력 싸움 속을 살아가며, 이태를 ‘선택할 수 있다’는 설정 자체가 이미 역사와는 다른 루트다. 실제 역사에서 측천무후는 태종의 후궁으로 들어갔다가 고종(이치, 李治)의 총애를 받아 황후가 되며 여제의 길을 걷지만, 게임은 그 공식 루트에서 벗어날 가능성을 보여준다. 플레이어는 이태와의 관계를 발전시키며 정치적 동맹, 혹은 감정적 연대를 만들어낼 수 있다. 이 설정은 단순히 로맨스의 변주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불가능했던 또 다른 결말의 가능성을 탐색하게 한다.
이 루트에서 이태는 권력의 중심보다는 주변부의 시선으로 존재한다. 그는 측천무후를 이해하고 지키려 하지만, 동시에 그녀를 최종적으로는 지키지 못했다. 왕자의 혈통으로 태어났지만 황제가 될 수 없었던 인물로서, 늘 불안과 자존심 사이를 오간다. 그와의 관계는 끊임없이 균열 위에 서 있으며, 플레이어의 선택은 그 미세한 균열의 방향을 결정한다. 결국 이 루트는 사랑과 권력 중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라는 게임의 핵심 질문을 가장 명확히 드러내는 구조가 된다.
이 게임의 흥미로움은 측천무후의 일대기를 재현하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전통적인 사극이나 역사 서사가 가진 ‘단선적 결말’을 상호작용 가능한 이야기로 전환한 데 있다. 기존의 역사극에서 관객은 결과를 이미 알고 있다. 저 미친 황제랑 지지고 볶다가 죽는다는 걸 이미 알고 시청하게 되면 그건 그거대로 정말 괴롭다. 하지만 인터랙티브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는 “만약 그녀가 다른 선택을 했다면”이라는 질문을 실제로 시험해볼 수 있다. 역사에서는 측천무후와 이태가 만날 가능성이 없었지만, 게임은 그 불가능을 ‘선택지’로 바꿔놓는다. 이는 단순한 상상이 아니라, 역사의 구조 밖에서 잠시 숨 쉴 수 있는 대체적 이야기의 실험이다.
나에게 특히 흥미로웠던 부분은, 이 게임이 기존 궁중 서사의 정형을 조금이나마 벗어난다는 점이었다. 중국 사극을 보면 궁의 여성 주인공은 언제나 같은 결말을 맞는다. 황제의 곁에 남거나,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지운다. 정략과 충성 사이에서 흔들리며, 결국 견디고 버텨내는 서사로 끝난다. 견환이 다음 생에서라도 진정한 사랑을 하며 평범하게 살기를...... 하지만 과군왕은 진짜 아냐 하지만 이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여제의 자리에 오르는 길뿐 아니라, 다른 인연을 선택하거나 권력에서 비껴설 수도 있다. 그것이 비록 픽션이라 해도, 닫혀 있던 여성 서사에 작은 틈을 낸다.
이태 루트의 존재가 흥미로운 이유는 바로 그 틈 때문이다. 궁중의 냉혹한 질서 속에서도 감정이나 선택이 다른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가능성, 그리고 그 선택을 직접 해볼 수 있다는 감각. 그것은 단순히 다른 엔딩을 보는 재미가 아니라, ‘황제의 여인이 되어야만 살아남는’ 이야기 구조 자체를 질문하게 만든다. 비록 여전히 권력의 세계를 다루지만, 여주인공의 운명이 정해져 있지 않다는 사실만으로도 그 서사는 한층 자유로워진다.
아직 이태 루트의 결말이 완전히 드러난 것은 아니지만,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 반복되는 궁중 이야기의 문법 속에서, 다른 길이 가능하다는 증거처럼 느껴진다. 그것이 내가 이 작품을 플레이하며 가장 인상 깊게 느낀 지점이었다. 무자비하고 잔인한 궁의 서사 속에서도, 선택이라는 틈이 생긴다는 것. 그 작은 틈만으로도 사극 속 여성 주인공의 삶은 처음으로 조명될 수 있다.
그리고 덧붙이자면, 고양공주가 공략 가능한 캐릭터인 줄 알고 은근히 기대했지만, 결국 정치적 동맹과 우정의 관계로만 남게 되는 점은 조금 아쉬웠다. 궁중의 모든 관계가 권력으로 수렴되는 세계에서 그녀만큼은 다른 방식으로 남아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너무 비극 엔딩이라 그냥 말도 안 나옴
이태 루트가 완전히 공개되면, 그때 다시 이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