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랑 Mar 12. 2022

보광동, 커피와 재즈

정확하게 1년 3개월 전, 이곳으로 이사 왔다.

보광동은 곧 재개발 예정이다. 재개발 예정지답게 부동산 가격은 터무니없이 올랐다. 도시에서 살고 싶지만 경제적 여유가  풍족지 않은 사람들이 새끼 새가 어미새의 날개 안쪽에 쉴 곳을 마련하듯, 이곳에서 보금자리를 틀고 있다. 시한부 마을의 운명이지만 나는 이곳이 소박하지만 웅장하고 좋다.


보광동은 키치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동네이기도 하다. 이태원과 한남동을 사이에 둔 한강과 마주한 동네. 아마추어 작가들의 작업실이 많기로도 유명하다. 조용하고 저렴한 공간을 원하는 예술인이나 터를 다지려는 자영업자가 구석구석 숨어있다. 잘 다진 소규모 식당은 나름의 핫 플레이스가 되어 고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보광동 역시 여느 구 시가지처럼 시간이 만든 예술 작품이다. 집 하나를 두고 앞 뒤로 갈라진 계단, 밤만 되면 눈부시게 쏟아지는 가로등 불빛, 아마추어의 손길로 리폼한 듯한 허름한 구옥을 정성스레 리폼한 그 사람 냄새.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고 정착한 사람들이 바로 집을 짓기 시작했다. 넓은 평수 대비 저렴한 집이 나왔길래 방을 보러 갔더니 1950년 경 지어진 집이 있었다. 무려 70년을 거의 수리하지 않은... 다소 들어가 살기 겁이 나는 옛집. 요즘처럼 층고가 높지 않았다. 2미터가 채 안 되는 층고라고 보면 될까. 조선시대 양반댁 하인이 살던 집처럼 방은 아담하고 계단이 없는 형태에 가까웠다. 구옥과 신옥이 공존하는 보광동은 한마디로 서울 박물관인 셈이다. 


내가 보광동을 특히나 좋아하는 이유는 알 수 없는 미로처럼 산만한 골목이다. 난 자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되곤 한다. 혈육이나 지인이 없음에도 이곳으로 이사를 고집한 결정이 지금까지는 제법 만족스럽다. 살면서 열 번이 좀 넘는 이사를 했었고 살다 보면 자신이 머무는 동네에 가장 애착이 가기 마련이지만 창문으로 넘어오는 이방인들의 언어와 이방인들의 고향 노래가 여행객으로 순간 이동시키기도 한다. 집에 살면서 여행객이 되는 이 오묘한 동네.


이사를 오고 처음 골목길 여행을 도전했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아이큐 테스트했을 때 공간지각 능력이  꽤나 잘 나왔다. 상위 1% 안이라고. 아이큐는 굳이 믿지 않으면서 공간지각 능력은 매우 신뢰한다.  지금까지 의심하지 않고 있다. 운전면허 시험도 학원 실기 없이 붙어버린 이 공간지각 능력 부심. 그런 자신감이 충만했던 내가 지도 앱을 켜놓고도 이 하찮아 보이는 골목에서 길을 잃었다. 도저히 어딘지를 알 수 없어 결국엔 출발했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명료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이곳은 많이 불편하고 위험할 수 있겠지만 모험을 좋아하는 내겐 꽤 근사한 동네다. 무료한 하루의 쉼표가 느껴질 때는 난 지금껏 다녀보지 못한 골목으로 향한다. 1년을 살면서도 아직 모르는 골목이 많다. 골목에서 헤매다가 큰길을 발견했을 때의 희열이란!


한 번은 놀러 온 친구와 새로운 길을 찾아 편의점으로 향했는데 200미터 거리의 편의점에 10분 뒤에 도착했다. 모르던 길을 갔으니 잘못들은 건 아니었다. 단지 헤맸을 뿐. 친구는 알던 길로 갔으면 진작 도착했겠다 말했지만 뻔한 마술사의 눈속임에 어이없이 웃으며 속은 관객이었다.


앞으로 3년, 이곳은 사라질 예정이다. 



작가의 이전글 틈이 많은 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