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기에 일어난다.
계획에 없던 맥주까지 마시며 내일 아침까지 배부르겠다 말한 것이 무색하다. 술을 마신 다음 날은 이상하게 배가 고프다.
욕실 앞에 체중계가 보인다.
돌려놓고 나간 로봇청소기가 마치 볼일 보는 강아지 같은 자세로 체중계 위에 반쯤 걸려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 수차례. 그럼에도 늘 보이는 데 두고 수시로 재야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다며 고집스럽게 지킨 자리다.
조심스럽게 한 발을 올린다. 맹렬한 속도로 올라가는 숫자. 보지 말아야 할 앞자리를 보고 말았다. '으헙' 하면서 다시 내려온다. 수평이 안 맞았나. 체중계를 거실 한가운데로 가지고 나온다. 자리를 옮겨봤자 똑같다. 0점이 안 맞나 보다. 0에 살짝 미치지 못하는 눈금이 보이자 모른 척한다.
올해 몸무게 앞자리를 바꾸자는 계획을 세웠다. 물론 줄이는 거였지 늘리는 게 결코 아니었지만 숫자가 바뀌긴 했으니 당신은 의도치 않게 새해 목표 중 하나를 달성하게 되었다.
작년 여름 무릎 통증 때문에 찾아간 병원에서 체중을 줄여야 한다는 처방을 받고 나서 당신은 혹독한 식단 조절에 들어갔다. 고구마와 방울토마토를 도시락으로 먹었다. 저녁은 두부 반모 아니면 삶은 계란 두 개만 먹었다. 그렇게 굶어서 빼면 요요가 온다고 말리는 소리에는 종합 비타민을 섭취하며 현명하게 하고 있다고 응수했다. 몸무게가 줄어드는 것이 신이 나 하루에도 몇 번씩 쟀다. 그런데 딱 3kg을 기점으로 속도가 훅 저하됐다. 몇 달의 고통으로 총 5kg를 겨우 줄이고 난 후 체중계의 숫자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런데 연말이 되면서 점심시간을 이용한 모임과 약속이 많아졌다. 1년 내내 분명 쉬지 않고 일했는데 '올해 안에' 마무리하라는 것이 쏟아지면서 스트레스를 먹는 것으로 푼 것도 있다. 제대로 풀린 것도 아니다. 그런데 빠질 때는 그렇게 오래 걸렸던 몸무게는 순식간에 원상회복을 하더니 인생 최대의 숫자를 찍었다. 그 뒤로는 재지 않았다.
먹으면 얼마나 먹었다고. 그렇게 줄지 않더니만 늘어날 때는 이렇게 즉각적인 반응을 보이는구나. 뭔가 억울하다.
@pixabay 소복이 쌓인 먼지 위에 발자국이 난 체중계를 원목 책장 밑으로 넣어둔다. 올해는 글렀다. 새해부터 시작이다.
장식장에도 먼지가 가득하다. 가구와 가전 위에 쌓인 먼지까지 닦아주는 로봇청소기가 나오면 당장 살 텐데. 드론처럼 날아다녀야 하는 걸까.
아무리 '이모님'이라 불린다고 해봤자 현대 기술은 사람 손을 타지 않고서 기계만으로 100% 완벽한 청소를 구현해 낼 수는 없다. 집안일로 스트레스받지 말고 차라리 사람 이모님을 주기적으로 부를까 했다가도 차라리 그 돈이면 맨날 못 다니겠다 랩을 하며 다니는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난다. 또다시 집안일에만 덜 치여도 회사 다니기가 좀 수월하지 않을까 싶으며 이모님으로 돌아온다. 이렇게 답도 없고 끝도 없는 고민을 한지가 몇 년 째다.
원목 책장을 들이고 나니 집은 확실히 좁아졌다.
TV 없는 거실을 만들겠다며 전면 책장으로 거실을 채웠는데도 책은 늘어만 갔다. 버릴 책을 추려도 봤지만 몇 권 나오지 않았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으라고 했지만 원하는 책은 늘 대출 중이지 않는가.
별로 많이 사는 것 같지 않은데 책장 위의 잡다한 물건들도 꾸준히 늘어갔다. 더 이상 책 위로 책을 쌓을 공간이 없어지자 이 책장 하나를 더 샀다. 처음에는 소품과 피규어도 올려두고 장식장처럼 썼는데 어느새 여기도 책과 물건, 문구 등으로 가득 차 버렸다. 크기도 색깔도 다 다른 것들이 벽면을 차지하고 있으니 아무리 정리를 해도 집은 늘 알록달록 정신없고 어수선하다.
현실은 무당집이지만 당신의 로망은 밖에 나온 것 없고 바닥에 굴러다니는 것 없는 잡지 속 '미니멀 라이프'다.
미니멀 라이프 책에서는 수납을 하랬는데 붙박이장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현관 앞에 굴러 다니는 마스크와 물티슈 등 코로나 용품을 보관하기 위한 작은 수납장을 놓았고 아일랜드 식탁으로도 부족한 부엌살림을 위해서는 이동이 가능해 요리를 편하게 해 준다는 트롤리를 들였다. 입으려고 하면 분명 옷이 없지만 옷장에는 더 이상 수납할 곳이 없어 행거를 연달아 샀더니 서재로 꾸며놓았던 작은 방은 이제 옷방, 아니 옷무덤이 되었다.
호더인 것도 아니고 물건을 못 버려서 끙끙대는 것도 아니다. 버릴 때는 또 과감하다 싶을 때도 있단 말이다. 그런데 하나를 버리면 두세 개가 들어왔다. 물건이 들어오면서 정리하고 수납해야 할 것들이 늘어나 수납박스와 수납 가구를 사들였을 뿐이다. 필요하지 않은 것은 단 하나도 들이지 않았다. 거대한 가구를 산 것도 아닌데 당신 집의 모든 벽은 가구로 가려졌고 집은 작아졌다.
마지막으로 대청소를 했을 때 상당한 양을 버린 것 같은데, 그때는 티도 안 나더니 어쩌면 이렇게 순식간에 늘어난 걸까.
벌써 지친다. 아직 출근 준비도 안 했는데 퇴근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