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아들로 인해 늘 속이 상한 어머니가 스님을 찾아왔다.
"스님, 제 아들이 정말 꼴도 보기 싫어 죽겠어요. 어찌하면 좋을까요?"
"으흠, 정말 아들이 밉습니까?"
"아이고, 밉고 말고 지요. "
"왜 밉지요?"
"어려서는 그렇게도 착하고 공부도 잘하던 아이가 대학을 나왔는데도 방구석에만 틀어박혀 있으니 속이 터질 지경입니다. "
"보살님, 오늘 집에 가서 아들이 잘하는 일 오십 가지만 써서 벽에 붙여놓고 매일 보세요."
"네? 오십 가지요? 세상에 한 가지도 없어요."
"그래도 곰곰이 생각해 보면 분명히 있을 겁니다. 아무튼 한번 해보세요."
어머니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스님도 별 수 없으시구먼. 하기는 엄마인 나도 모르겠는데 아이를 낳아보지도 않은 스님이 무엇을 알겠어.'
아들 생각만 하면 속이 부글부글한 어머니는 그날 잠자리에 들었지만 쉽게 잠이 들지 않았다. 그래도 스님에게서 뭐 속이 시원해지는 답이라도 들을 줄 알고 용기를 내어서 찾아갔건만 오히려 더 답답한 소리만 듣고 온 셈이니 잠이 올리가 없다.
'흥, 잘하는 게 한 가지라도 있으면 내 속이 이렇게까지 터질 지경은 아니지. '
그러다가 '스님이 괜히 한 소리는 아닐 텐데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혹시 한 가지라도 있을까?' 하는 마음에 곰곰이 생각하며 그 아이를 낳았을 때부터 거슬러 올라가 보았다.
첫아들을 낳았다고 시 부모님의 대우가 달라지고 남편도 자랑스러워했었지. 그래 그때 나는 나의 커다란 임무를 완수한 것 같아 의기양양했었어. 그리고는 내가 이 아이를 아주 훌륭하게 키우리라 다짐하며 우유도 아인슈타인을 먹였지. 세계적인 과학자로 키울 거야. 파란 하늘에 찬란한 무지개가 펼쳐졌다.
"아유, 애기가 참 잘생겼네. 장군감이야." 하는 동네어른들의 칭찬에는 장군? 그럼 장군을 만들어볼까? 후후, 좋아. 장군? 멋지지 멋져.
아들의 미래를 점쳐보느라 매일이 행복하기만 했다.
그러한 날들은 아들에게 지극정성의 엄마로 자리매김을 하게 되었는데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처음 받아쓰기 시험을 보았는데 백점을 맞은 것이 아닌가. 이것은 훌륭한 인재로 커가리라는 신호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들은 엄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쑥쑥 자라고 있으니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신이 난 엄마는 치맛바람을 휘날리며 학교를 드나들었다.
어느덧 어엿한 중학생이 되어 교복을 입으니 더욱 대견하기가 그지없었다. 이제는 얼굴에 여드름이 하나 둘 솟아나고 목소리도 우렁차게 달라졌다. 남들은 아이가 사춘기가 와서 속상해한다고들 하는데 내 아들만큼은 그까짓 사춘기쯤은 가벼이 넘기고 말 거라고 생각했다.
헌데 어느 날부터 아이는 달라져가고 있었다. 성적은 떨어져 가고 딸 같이 엄마에게 살갑기만 하던 아이는 마치 혼자만의 동굴에 들어간듯한 날들을 보내며 엄마를 애태우기 시작했다.
엄마의 마음에 미움이 스멀스멀 일어나더니 배신을 당한듯했다.
하늘에는 시커먼 먹구름이 곧 폭풍을 몰아치며 장대비를 쏟아낼 것 같았다.
하루에도 열두 번 지옥을 넘나들며 가슴앓이를 하던 엄마의 마음은 썩어 문 드러 질 지경에 이르렀다.
어쩌나, 어쩌나. 묘책이 없을까?
그러한 세월을 얼마나 보냈던가. 이제는 포기하고 그냥 건강하게 지내는 것만을 위안으로 삼자.
그런데 건강하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잖아. 시시껄렁한 대학이래도 나왔으면 돈도 벌고 결혼도 해야 할 텐데 맨날 방구석에만 처박혀 있으니 사람 미치게 하는 것 아닌가.
아침이면 넥타이 매고 헐레벌떡 출근하는 젊은이들을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는 것을 아들은 아는지 모르는지. 한숨만 나올 뿐이다.
그래. 마음은 착하지. 남에게 피해를 입힌 적은 없었으니까.
1. 마음이 착하다.
다른 아이들은 술도 먹고 담배도 피운다지?
2. 술과 담배를 안 해서 좋다.
그래. 어떤 아이들은 십 대에 아이를 낳아오기도 한다는데.
3. 여자 문제로 걱정시키는 일이 없다.
요즈음은 마약이나 게임 중독자가 많다는데 아들은 그건 아니지 않은가.
4. 마약이나 게임 중독에 빠지지 않았다.
아니, 생각해 보니 잘하는 것도 있었네. 그러고 보니 크게 일을 저지르거나 잘못한 것은 없었잖아.
그럼 뭐가 문제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가 걱정이지.
5. 친구들과 싸움을 한 적이 없다.
6. 어렸을 때는 나에게 더 없는 행복을 주었다.
7. 항상 몸을 깨끗하고 단정한 차림을 한다.
맞아. 아들에게도 좋은 점이 있었어.
50. 사랑하는 아들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능력자다. 아들, 파이팅.
엄마는 조그만 것도 놓치지 않고 오십 가지를 써서 벽에 붙여 놓았다.
그리고 나니 아들을 보면 이제까지와는 달리 웃음이 나오고 사랑스러운 표정이 나왔다.
아들은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엄마와 벽에 대자보처럼 붙여 놓은 것을 바라보며 말문이 막혀버린 듯했다.
'아니, 이제는 엄마가 나를 망신 주려고 작정을 하셨군. 누가 와서 보면 창피해서 어쩌란 말이야. 뭐 내일쯤 떼어버리겠지 설마 계속 붙여 놓겠어.'
아들은 속으로 투덜댔다.
그런데 여러 날이 지나도 그냥 붙여있는 게 아닌가.
어느 날 엄마가 외출을 하자 아들은 그 대자보를 곰곰이 생각하며 읽어 보았다. 웃음이 나왔다.
'정말 나에게 이렇게 좋은 점이 있는 줄은 몰랐네. 나도 꽤 괜찮은 녀석이네. '
아들은 지난날들을 돌아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도 자신감을 가지고 노력하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까?
그래 어려서는 어른들한테 칭찬도 많이 받았고 공부도 잘했는데 언제부터 자존감이 없어진 걸까?
맞아. 엄마 말처럼 난 할 수 있어. 내 인생을 이렇게 방구석에 처박아 놀 수만은 없지. 어깨를 쫙 펴고 세상을 향해 나가는 거야.
자신감을 가지고.
그리고는 대자보 아래에 커다랗게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