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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이 Mar 26. 2023

외고 선생님

교과서 없는 학교

공립 중등학교 영어교사인 나는 교직 생활을 하면 할수록 생각보다 나의 힘은 미미하고,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작게는 내가 근무하는 학교의 상황이 그랬고, 크게는 우리나라 교육의 현실이 그랬다.


고3 수업을 맡으면 으레 교재는 EBS 수능특강을 쓰게 된다. 대부분 고3 학생들의 가장 큰 목표는 원하는 대학교에 입학하는 것이다. 그리고 학교 내신 성적과 매달 치르는 모의고사 성적은 그 목표를 이룰 수 있을지를 미리 가늠하는 중요한 지표이다. 그래서 나는 모의고사와 수능 준비에 특화된 수능특강 이외의 다른 선택지에 쉽게 도전할 수 없었다.


고3이 아닌 다른 학년의 수업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매년 교원 인사가 발표되는 2월 중순이 돼야 비로소 내가 수업할 학년과 목을 알 수 있, 대부분의 과목은 학교 사정상 동료 교사와 함께 가르치게 된다. 3월 개학까지 1, 2주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서, 과목마다 정해진 교과서가 아닌 다른 교재를 여러 명의 동료 교사들과 함께 고민하고, 재구성하고, 수업을 준비하는 것은 나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수준별 강사 티오가 있는 학교또 어떤가. 성적에 따라 학생들을 A반, B반, C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진행한다. C반 학생들은 대체로 학습 의욕이 낮고 기본적인 학교생활 자체에 어려움을 겪다. 하지만 객관성 무엇보다 중시하는 학교 정기고사에서는 A반도, B반도, C반도 같은 문제로 시험을 친다. 그래서 다른 반과는 다른 교재, C반만을 위한 쉬운 교재로 수업하는 것은 형평성 논란이 생길 수 있다.




이런 상황과 현실에 부딪힐 때마다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나는 왜 이렇게 무력할까. 분명 누군가는 학교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교직원 회의에서 목소리를 내고, 교육 현실을 바꾸기 위해 정책을 제안하고 있을 텐데. 하지만 그런다고 뭐가 바뀌기는 할까? 이처럼 좌절과 자책, 회의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때마다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여기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겁하지만 나 자신의 힘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인정했다. 우리나라 학교와 교육의 고질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들을 뿌리부터 뜯어고칠 용기와 추진력이 내게는 없음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런 내가 스스로에게 묻는 이 질문은 의미가 남달랐다. '이런 내가 이런 현실에서 뭘 할 수 있겠어? 그냥 포기하자.'라는 체념의 넋두리가 아니라 '이런 나지만, 이런 현실이지만,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건 뭘까?'라는 동기부여이자 격려였다.


끊임없이 그 질문을 되뇐 결과, 나는 좌절하지 않고 모든 수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수능특강을 빠른 시간 내에 효율적으로 가르칠 수 있는 강의식 수업으로 가르치되, 매 시간 요약정리와 단어 시험을 병행하고 조는 학생최대한 깨웠다. 학년마다 정해진 교과서를 가르치되, 모든 학생들의 영작 한 줄을 매일 받아 피드백했다. A반, B반과 같은 교과서로 C반을 가르치되, 학생들이 주눅 들지 않도록 아주 기초적인 내용부터 샅샅이 짚어주었다.


물론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영어 수업에서 내가 가르칠 지문을 내가 고를 수 없다는 것은 근본적인 한계였다. 그렇지만 내 힘으로 바꿀 수 없는 부분임을 인정했기에, 아쉬움을 누르고 그저 주어진 현실에 최선을 다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렇게 천천히, 조금씩 나만의 방식으로 현실을 바꿔 가나고 있다고 믿었다. 앞으로 이어질 교직 생활에서 내 수업의 의미를 이렇게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랬던 내가 덜컥 외고에, 그것도 모교에 발령을 받았다. 내가 졸업한 외고는 영어 교과서가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공식적으로 선정된 영어 교과서는 있지만 참고 자료일 뿐이고, 대부분의 영어 수업은 영어 교사의 재량 하에 자유롭게 이루어진다. 특목고 특성상 학생 수에 비해 교사 수가 많아서 여타 다른 학교에서처럼 같은 과목을 여러 동료 교사와 함께 가르칠 일도 잘 없다. 게다가 대부분 학생들의 영어 성취 수준이 높고 학습 태도가 우수하다.


내가 바꾸고 싶었지만 바꿀 수 없었던 한계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학교였다. 원하던 환경이 모두 갖추어지니 아이러니하게도 내면의 두려움을 마주하게 되었다. 1년 수업의 시작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내가 책임지고 설계하여 이끌어나가는 것에 대한 압박이었다. 쩌면 설렘 같기도 한 긴장을 느끼며, 나는 이전부터 해오던 질문을 이제는 다른 의미로 끊임없이 나 자신에게 묻고 있었다.

나는 '여기'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잘' 할 수 있을까?







(참고: 외고 근무 시절을 추억하며 씁니다. 현재 진행 중인 이야기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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