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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이 Jul 11. 2023

외고 첫 수업

이름을 부른다는 것

3월 개학을 맞아 정식으로 처음 출근하는 날. 교사용 출입문으로 차를 운전해 들어와 주차를 하고, 미리 등록한 지문을 인식한 뒤 교정으로 들어섰다. 아... 너무 이상한 기분이다. 학교가 어쩌면 이렇게 똑같지?


이른 아침 부스스한 모습으로 줄 서서 점호를 기다리던 기숙사 앞 공간도, 새로 도색해서 예뻐졌다며 좋아하던 중앙 건물도, 잠을 깨기 위해 다 같이 서서 공부하던 복도도, 자습 시간에 왜 이런 곳에 있냐며 혼나던 구름다리도, 석식을 먹고 매일 빙글빙글 돌던 운동장도. 익숙한 공간에 오니 나도 모르게 오래 잊고 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정말이지 너무 떨렸다. 새로운 학생들과 잘 지낼 수 있을까?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는 좋은 수업을 할 수 있을까? 일단 첫 수업은 준비한 대로 잘 진행될까? 교실 TV가 작동이 안 되진 않겠지? 오만 가지 생각과 긴장을 누르기 위해 교실 문을 힘껏 열어젖히며 큰 소리로 외쳤다.

"Good morning, everyone!"




첫 수업은 나와 학생들의 자기소개로 구상했다. 이 과정에서 굳이 일부러 밝히지는 않던 나의 출신 학교까지 모두 공개하기로 했다. 1년간 학생들의 선생님이자 선배로서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고, 학생들과 친밀하게 지내고 싶었기 때문이다. '모교 근무'라는 선물 같은 기회를 최대한 활용해 보기로 했다.


자기소개 활동으로는 Acrostic Poem을 준비했다. Acrostic Poem은 각 행의 특정 알파벳들이 모여 하나의 단어나 문구가 되는 시로, 쉽게 말해 영어판 n행시이다. 즉 이름의 이니셜을 활용해 시를 지어 자신을 소개하는 것이다. 나의 경우 이니셜인 LHY를 활용해 아래와 같은 시를 미리 준비해서 학생들에게 보여주었다.


a Learning,

Happy,

Yolo Person.

That's who I want to be.

(번역: 배우며, 행복하며, 욜로 삶을 사는 사람.

그게 내가 되고 싶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Learning, Happy, Yolo 이 세 가지 키워드와 관련된 내 사진들을 화면에 띄우며 나를 소개했다. 선생님은 배우는 것을 좋아해서 너희들처럼 OO외고를 진학해 졸업했고, 이런 것들을 할 때 행복감을 느끼고, 이런 삶을 꿈꾸고 있어. 진심을 담아 솔직한 소개를 이어가다 보니 어느새 긴장감이 풀리고 있었다. 학생들은 길어지는 나의 소개에도 눈을 반짝이며 집중하고 있었다. (사실은 이럴 때가 제일 행복하다는 말까지는 부끄러워서 하지 못했다.)


학생들이 Acrostic Poem을 쓸 때는 이름의 이니셜로 시작하는 단어 3개만 영어로 써도 되고, 꼭 시를 짓거나 문장으로 쓰지 않아도 된다고 안내했다. 혹시 모를 부담감을 줄여주기 위해서이다. 물론 대부분의 학생들은 최선을 다해 시를 쓰고 꾸미기까지 했다. 수업 시간도 많이 남지 않았으니 아마 제출하는 걸로 수업이 마무리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하지만 오늘 수업의 하이라이트가 아직 남아있다.



네? 저희 사진을 찍으신다고요? 지금요?

 

한 명씩 사진을 찍겠다는 내 말에 날벼락이라도 맞은 듯 눈이 커진 학생들 앞에서 차분히 설명을 이어나갔다.


선생님은 너희 이름이랑 얼굴을 빨리 외우고 싶어. 그래야 한 번이라도 더 불러줄 수 있고, 더 빨리 가까워질 수 있을 테니까. 물론 교무실에 비상연락망 사진이 있지만 너희도 알다시피 지금 모습이랑 다른 경우가 많잖니?(이 대목에서 많은 학생들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다른 목적으로 쓰지 않고 꼭 이름 외우는 데만 쓸 거야. 매일매일 핸드폰으로 보면서 최대한 빨리 외우겠다고 약속할게.


이게 바로 몇 년 전부터 첫 수업에서 꾸준히 해오고 있는, 활동이라고 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간단한 '학생 사진 찍기'이다. 별다른 준비물도 필요 없이 그저 반, 번호, 이름을 종이에 크게 적게 한 다음 한 명씩 들고 있으면 얼굴이 잘 나오게 사진을 찍어주면 된다. 오늘은 학생들이 각자 Acrostic Poem을 쓴 종이 윗면에 이름을 크게 쓰도록 했다.


화려한 말주변도 넉살도 없는 내가 학생들과 친해지기 위해 선택한 활동인데, 처음에는 손사래를 치며 못하겠다던 학생들도 이유를 차근차근 설명해 주면 금세 수긍한다. 이름을 불러주니 꽃이 되었다는 시처럼, 이름을 부른다는 건 그만큼 특별한 일이다. 특히 학교라는 집단 속에서 자신이 그저 학생 1, 학생 2 정도밖에 안 된다고 느끼는 아이들에게는 더욱 특별하다.




원하는 포즈를 취해도 된다고 말해도 꿋꿋이 머그샷(실제로 많은 학생들이 이 활동을 이렇게 묘사한다)처럼 찍은 학생, 소품을 들고 나온 학생, 과감하게 포즈를 취한 학생 등 다양한 모습이 담긴 핸드폰을 보니 웃음이 난다. 동시에 마음이 급해진다. 빨리 이름을 외워서 불러주겠다던 약속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목표는 1주일 안에 전교생의 이름을 다 외우는 것. 아주 바쁘고 즐거운 첫 주가 될 것 같다.








(참고: 외고  근무 시절을 추억하며 씁니다. 현재 진행 중인 이야기는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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