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접어들면서 별다른 계획이나 목표를 세우지 않았다. 션이 대학생이 된 것만으로도 20년간의 육아 시즌 1을 마무리한 것이라 나름 의미가 컸고, IT 컨설팅도 내가 하고 있는 영역에서는 나름 장인의 반열에 올랐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재미로 시작한 여러 취미생활도 꽤나 많으니 앞으로는 건강관리나 하면서 좋아하는 여행, 전시나 다니면 되겠다 생각했다.
그러다가 2월 어느 날, 앞으로 10년 동안 나에게 생길 일들을 가만히 생각해 봤다. 일단 10년 이내 생길 가장 큰 이벤트는 '은퇴'일 것 같았다. 선진국 사례를 살펴보니 평균 정년이 67세 정도고 정년을 없애는 나라가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했다. 선진국부터 시작한 이런 변화는 우리나라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런데 정년이 없어진다고 해서 지금 하는 일을 계속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시장에서 나를 계속 필요로 해야 일을 계속할 수 있다.
'인생 이모작' 경영을 넘어서 일본에서는 '인생 삼모작'을 해야 한다는 말이 진작부터 나왔다.
안정적인 글로벌 컨설팅 펌을 내 발로 박차고 나와서 사업을 시작한 시점이 40대 초반이다. 평생직장의 대명사이자 영원히 굳건할 것 같은 회사를 박차고 나가서 동료들이 더 놀랬다.
세월이 지나면서 그 굳건하던 회사가 한국 시장에서는 규모를 축소하게 되었고 당시 함께 근무했던 사람들 대부분 일터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반면 나는 리스크를 감수하고 내 사업을 시작하였는데 여전히 즐겁게 일을 하고 있는 걸 보니 우연히도 인생 삼모작 중 두 번째 경작을 했나 보다.
세 번째 경작은 나의 노년이 될 것이며 미리 계획을 하는 삶이 아니라 현재의 내가 자연스레 미래의 나로 연결되도록 할 것이다.
2월메 미니 은퇴에 대한 글을 마치 지나가는 듯 쓴 적이 있다. 책을 읽으면 조용히 실천을 하곤 하는데, 롭 무어의 <레버리지>와 팀 펠리스의 <나는 네 시간만 일한다>에서 미니 은퇴를 알려줘서 '이거다'싶었다.
내 성격상 블로그의 글을 올릴 때 설익은 다짐이나 막연한 계획을 올리는 적은 거의 없다. 하지 않으면 모를까, 결심했으면 일단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 성격이고, 한두 번 했다고 해서 '나 해봤다'라는 경솔한 말을 하기 싫어하는 스타일이다 보니, 나 스스로에게 확신이 생겼을 때 비로소 내 생각을 오픈한다.
이제야 고백하건대, 2월에 쓴 미니 은퇴 글은 그저 꿈과 희망을 적은 것이 아니라 올해 미나 은퇴를 해보겠다는 결심이 섰고 강하게 의지를 세웠을 때다. 글에는 그 사실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 결심이란 다음과 같다. 올 상반기 몇 가지 생각의 변화를 가졌다. 가장 큰 것은 은퇴시기다. 작년까지만 해도 남들처럼 50대 중반 정도까지 일하고 은퇴하겠지 생각했다면, 앞으로 사회 분위기, 시장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움직일 것이며 더 이상 일을 못 하게 되는 상황이 아니면 할 수 있는 한 '하겠다'로 마음을 바꾸었다. 나에게 일이란 스트레스를 줄 때도 있으나 '즐거움'을 줄 때가 더 많아서이고, '나의 가치'를 일터에서 찾을 때가 종종 있어서다. 아직은 일을 통해 받는 성취감이 좋다.
다만 주 5일의 근무는 벗어나려고 한다. 노동의 가치를 '시간'으로 계산하는 우리 사회의 관행에서 벗어나서 '가치' 그 자체로 컨설팅 하기로 했다. 사실 작년부터 이미 그 변화를 시작했고 어느 정도는 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생겼다. 아울러 돈보다 시간에 더 비중을 둘 예정이다.
은퇴 시기에 대한 생각에서 자유로워지고 일에 대한 욕심도 다시금 채우다 보니, 반대급부로 미니 은퇴를 올해 당장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2월에 미니 은퇴 글을 올릴 때 이미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은퇴하면 뭘 하고 싶은가?'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 보니 가장 먼저 유럽 장기 여행을 하고 싶었다. 장기 체류를 하고 싶다가 더 맞는 말이지만 미니 은퇴인 만큼 기간을 적당히 줄였다. 유럽 여행을 가되, 마음가짐은 '나는 이미 은퇴했다'이다. 일 이야기는 절대 하지 않고 눈앞에 보이는 광경, 음식, 사람만 집중하기로 했다.
서쪽이나 남쪽은 여러 차례 가서 이번에는 동쪽 중심으로 가고 싶은 나라, 도시, 보고 싶은 것들을 고르고 항공편, 호텔, 교통편을 찾았다. 동유럽 쪽이라 상대적으로 정보가 그리 풍족하지 않아서 TV에서 방영된 여행 프로그램이나 유튜브 채널도 찾아봤다. 그렇게 구체적인 동선까지 짰다.
(내가 아니라 션파가. 우리 집 여행 준비는 션파가 다 해준다. 워낙 꼼꼼해서 일종의 맞춤형 전담 여행 가이드 역할 해주니 얼마나 좋은지.)
동선을 보다 보니 갑자기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있어서 이전에 써둔 책 리뷰를 찾아봤다. 알폰스 무하와 클림트의 그림이 여행 동선 근처에 있었다. 이 두 화가의 작품을 현지에 가서 직접 보고 싶었는데 드디어 가능하게 되었다.
은퇴 후 해 보고 싶었던 또 하나는 여행 현지에서 여유롭게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써 보는 것이었다. 피곤하니 못할 수도 있을 테지만 '못하는 것'과 '안 하는 것'은 다르다. 글은 피곤하면 '안 쓰는 것'이라면 그림은 그려본 적이 없으니 '못 그리는 것'이다.
3월에 그림 그리기를 시작한 이유가 바로 미니 은퇴에 대한 연장선 때문이었다. 5월에 미니 은퇴를 갈 계획이어서 두 달 밖에 남지 않았으므로 그 기간 동안 그림을 능숙하게 그릴 수 있으리라 생각은 하지 않았고 지금 시작하면 미니 은퇴 3탄, 4탄 무렵이 되면 능숙하게 그릴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분명히 1월 1일은, 그동안 하던 거나 잘하자 하고 시작했으나, 그 사이 또다시 나의 삶의 방향이 조금 바뀌기 시작했다. 나의 하루를 '즐거움'으로 채워가고 있어서 하루 24시간이 부족하다. 이 즐거움들이 싹을 틔우고 자라면 나의 세 번째 경작으로 이러질 것으로 확신한다.
Ps. 당분간 '여행 블로그'가 될 예정.
좋아하는 카페에 션파와 가서 여행 계획 마무리 중.. (항공권과 호텔 확정 정도 하고 떠남. 현지 가서 즉흥적으로 돌아다닐 예정)
회사에서 여행경비 얼마 들었냐고 물어보는데 내가 챙기지 않아서 대답을 못했다.
과거에 동유럽 다녀오신 분들이 대략 얼마 정도 들겠다고들 말씀하셔서 션파에게 물어보니 들은 금액의 거의 두 배다.
그분들이 가셨을 때보다 우리 동선이 더 복잡하기도 했지만 물가가 코로나 전과 비교하면 엄청 올랐다. (슬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