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힘내자 Feb 25. 2023

선유와 스파게티

엄마의 반성문은 또 하나 추가되고...



힘들게 일하고 집에 온 날, 저녁 식사 준비가 벅찼다. 배달 음식을 시킬까 잠시 고민했다가 이내 마음을 거두고 주방으로 들어섰다. 느린 손으로 이것저것 준비하는데 딸이 자기는 스파게티가 먹고 싶다며 해줄 수 있냐고 물었다.

건성으로 응이라고 대답을 하고서 식구들의 저녁을 차렸다.

친정아버, 남편, 아들이 수저를 드는 모습을 보고 나니 나에게 주어진 밥 임무를 마쳤다는 안도감에 몸이 스르르 녹았다. 얼른 방에 들어가야겠다 싶은데 딸이 보였다. 딸은 거실에서 만화책을 보며 스파게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 맞다. 스파게티!

다시 요리를 하려니 답답해서 한숨이 나왔다.

쉬고 싶은 마음이 컸던 나는 악마의 속삭임을 아이에게 들려줬다.

'얘야, 그냥 차려놓은 밥 먹으면 안 되겠니?'

"선유야! 엄마가 너무 피곤해서 그러는데 스파게티는 내일 놀러 가서 사줄게. 스테이크도 사줄게!!"


선유에게 타협이란 없다.


"엄마가 스파게티 해준다고 했잖아! 나는 스파게티가 먹고 싶단 말이야!"


아내의 피곤함을 감지한 남편이 딸을 설득하려고 했으나 실패했고, 딸은 발을 쿵쿵 거리며 방으로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나는 화낼 힘도 없이 옆에 같이 누워 '엄마가 오늘 일이 힘들었어, 몸이 부서질 것 같아 그러니까...' 라며 고단함을 주절거리다가 잠이 들어버렸다. 밥을 다 먹은 남편이 들어와서 딸을 어르고 달래는 소리에 깨서 다시 딸에게 물었다.


"소시지에 밥 먹으면 안 될까?"

"엄마가 스파게티 해준다고 했잖아! 나는 스파게티가 먹고 싶단 말이야!"


남편이 눈짓으로 해주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잠깐의 눈붙임에 몸이 한결 가벼워져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갔다.

엉망진창인 주방을 대충 정리하고 냄비를 불에 올렸다. 끓기 시작한 물을 보고 있으니 딸이 슬그머니 내 옆에 섰다.


"엄마, 언제 다 돼?"


끓는 물을 보며 조심스레 묻는 아이.

눈빛에 굶주림이 담겨있었다.


'아이고... 내 새끼.

배고팠구나.

엄마 손이 고팠구나.

하루종일 엄마 오기만을 기다렸구나.

엄마가 해주는 스파게티가 먹고 싶어서.

엄마가 이렇게 이기적이어서 어쩜 좋으니.

몸이 피곤하니 엄마도 나쁜 사람이 되는구나.'

 

거창할 것도 없이 시판 소스 넣어 만든 스파게티를 그릇에 담아 내밀었다.

아이의 얼굴에 화색이 돌며 포크질이 바빠졌다.

후루룩후루룩.


"그렇게 맛있어?"

"응! 나는 사 먹는 것보다 엄마가 해주는 게 훨씬 맛있어. 엄마, 진짜 맛있다!"


아이의 웃음에 가슴이 찢어진다.





내가 아니면 누가 너의 투정을 받아줄까.

나도 엄마의 세심한 손길과 넉넉한 품 안에서 이렇게 컸는데.

하루종일 엄마를 기다리며 엄마의 스파게티를 먹을 수 있을 거라는 작은 소망을 밀어내서 미안하다.

미숙한 엄마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아이.

불완전한 존재인 엄마도 너와 함께 자란다.





"구원은 과거에 있다. 엄마가 되면서 상실한 '아이적' 감각을 복원하기."
은유 <다가오는 말들> p.24


엄마에게 받았던 튼튼한 사랑을 기억하기.

모성으로 포장되지 않는 행동, 너를 보며 뉘우친다.

엄마는 오늘도 온 몸으로 너를 받아들이는 방법을 배운다.






매거진의 이전글 제목도 딱히 생각나지 않는 오늘 일기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