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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혜숙 Jan 28. 2024

별보다 다양한 나의 학생들

파닉스에서 <사피엔스>까지

기훈: 선생님, 검정고시 보러 가서 그냥 컨닝하면 안될까요?

나 : 공부 못하는 애 컨닝하면 어쩌려구?

기훈 : 설마 저보다는 낫겠죠. 이거 정말 풀기 싫어요.

나 : 그럼 그냥 찍어봐. 연필을 포크라고 생각하고.     


기훈이와 수업은 정말 어렵게 이루어졌다. 올해 1월 첫 주부터 시작한 검정고시 고졸반. 수업 시작하고 2주 동안은 기훈이는 수업에 들어오지 않았다. 1교시 도덕 수업을 하고 쉬는 시간에 어딘가로 사라지면 도대체 교실로 돌아오지 않는다. 지난 2주 동안 기다려도 오지 않는 기훈이를 못 만나고, 오늘 3주 차 되는 날 겨우 얼굴을 맞대고 기출 문제 시험지를 주고 풀어보라고 했다. 고졸 검정고시반이지만, 중졸 검정고시 기출문제를 풀어보라 했는데 그것 마저 풀기 싫어서 그냥 컨닝하면 안 되겠냐고 나에게 물었다. 그냥 찍어봐라고 했지만, 속에서 열불이 나서 야 이놈아! 라고 하고 싶어졌다. 꾹 참고 어떻게든 문제를 풀리는데 계속해서 종알거린다. 마운틴 mountain! 이거 산이라는 뜻 아닌가요? 하면서 이렇게 어려운 단어를 읽는 자신이 대단하다고 너스레를 떤다. 나는 그렇다고 맞장구를 쳤다.     


기훈이는 만으로 16세. 고등학교 2학년 나이인데 부모님 재정지원을 전혀 하지 않는다. 너 알아서 살아라 하고 아버지는 월세방 구해 주고 떠나버렸다. 어찌 된 사연인지는 차차 알아가겠지만, 이 청소년은 혼자 알바를 해서 월세를 내고 생활을 한다. 중장비 기사 자격증을 따서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데 아마도 육중한 기계로 땅을 파고 물건을 들어 올리는 게 멋져 보인 모양이다. 이런 친구들에게 군청에서 지원이 없냐고 물어봤더니 20만원 정도 지원금이 나온다고 한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버린 아이를 누가 보살필 것인가? 전국에 다 있는 출렁다리, 모노레일, 전망대로 관광객 끌어들이는 거 말로 청소년이 머무를 수 있는 기숙시설을 만들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 기훈이 수업 안 들어왔을 때 보다 더 분노가 치민다. 아무튼, 고졸 학력이 이 아이에게 가장 절박한 생업을 위한 준비니 나는 교육의 최전방에 나선 것 같아 조금은 비장해진다. 벌써 이 최전방에 나선 지 9년이 되었다.     


요즘 1000억대 돈을 번 한 부자가 쓴 글이 인기가 많아 70만 부나 팔렸다고 한다. 그래서 부를 상징하는 빨간색으로 표지도 바뀌었다. 흰색 표지에서 빨간색으로 바뀐 이 책을 나도 궁금해서 읽어봤다. ‘피보다 진하게 살라’는 부제가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읽어보니 피보다 진한 산다는 의미는 정말 열심히 놀지 말고 시간을 아껴 실력을 갖추는 것이었다. 대부분 자수성가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충고였다. 소셜미디어에 멋진 사진 올리느라, 남과 내 인생 비교하며 절망하느라 인생 낭비하지 말고 자기 계발해서 성공하라는 말은 백번 맞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가 ‘하류층’ 초등생에게 ‘일류대’ 대학생을 1:1로 붙여주고 사랑의 열매를 통해 비용을 지원하며 상황을 보았다고 한다. 1년이 지나고 나서 도대체 과외를 시킨 결과가 전혀 보이지 않아 지원을 중지했다고 한다. 도대체 배우려는 태도가 보이지 않아서였고 배우는 것조차 포기한 가난한 아이들을 변화시키는 법을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참담한 심정이었다. 그분이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하류층’ 아이는 기훈이 같은 아이고, 이런 아이들을 변화시키는 것은 1000억대 부자도 포기한 일이다. 이런 ‘가난한’ 아이들에게 ‘일류대’라는 타이틀이 학습의지를 만들어 주지는 못 할텐데 뭔가 착각을 하신 것 같다.   

   

기훈이에게 필요한 것은 공부보다도 일단 보통 학생들이 당연히 여기는 것을 하는 일이다. 입에 달고 사는 욕을 수업시간에는 하지 않기. 수업시간에 시간 지키기. 책을 펴서 활자와 친해지기. 선생님이라는 존재에 익숙해지기등이다. 아이들은 일류대 나온 일타강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눈높이에 맞춰 ‘이것도 못해’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와도 ‘그럴 수 있어’라고 말할 줄 아는 교사가 필요하다. 고등학생이 구구단도 못 외우고 영어 파닉스를 몰라 단어를 읽을 줄도 모르는 경우도 있다. 파닉스 모르면서도 초등학생이 보는 교재 사다가 공부해서 결국 고졸검정고시에 합격한 친구도 있다. 그 때 그 학생은 스무살도 넘었었는데 천천히 수업에 빠지지 않고 나오면서 고졸 검정고시에 합격을 다. 이렇게 합격후 아이들은 알바가 아니라 월급을 받는 직장을 구해서 세상으로 나간다.
 

영어는 하나의 매개일 뿐,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관계를 조금씩 형성해가고 그래서 아주 너그러운 시험인 검정고시의 60점이라는 목표를 이룬다. 60점 이상이면 합격이다. 배우는 자와 가르치는 자 사이의 관계는 돈으로 생기지 않고 마음을 열 때 비로소 생긴다. 내가 모르는 것이 창피한 상태에서는 배울 수가 없다. 아이들의 학습 결손이 초등학교때 생겨도 해결이 안되는데 고등학생의 나이가 되면 그 것은 깊은 수치심으로 남는다. 이 수치심이 상처가 되지 않아야 담배가 아니라 책을 들고 공부하러 올 수 있다.     


1000억대 부자인 분은 일류대 학생과 1:1과외라는 방법의 교육 사업에 실망을 하셨는데, 나는 관계 형성이 불가능할 때 학생과 수업이 중단되는 차질을 겪는다. 나는 이것을 실패라고 하지 않고 그냥 차질이라고 하는 이유는 내가 아닌 다른 선생님과 관계형성이 되어 학습이 잘 이루어질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를 떠나는 학생보다 나와 오래 머무는 학생이 더 많다. 이런 나와의 관계형성이 잘 되어 있는 학생들에게 요즘은 교과서나 기출문제가 아닌 ‘보너스’ 학습 교재를 쓰는데 반응이 좋다. The Economist 나 New Scientist 같은 잡지 속의 글들이다.


평균 7~8문장으로 구성된 너무나 짧은 글 속에서 주제 찾기, 빈칸 채우기, 순서 배열하기, 문장 삽입하기등의 기예를 배우는 수능영어에서 조금은 벗어낫지만 책으로 읽는다면 10~20페이지 되는 논리적인 글을 읽느라 수고하는 아이들이 대견하다. 긴 글을 읽으면 짧은 글은 수월히 읽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시작했다. 수업 준비하면서 나도 새로운 글을 읽어서 즐겁다. 다음 달 부터는 유발 하라리 교수의 <사피엔스>도 같이 읽어보자고 의기투합했다. 전체는 아니고 몇몇 장을 읽을 거 같다.     


<사피엔스>를 영어로 읽겠다는 나의 학생들은 중산층 가정의 평범하지만 학업에 관심이 많으신 따뜻한 부모님의 보살핌을 받은 아이들이다. 부모님의 돌봄과 교사와 좋은 관계맺기를 다 가진 행운을 얻은 학생들이다. 중졸, 고졸 검정고시에서 잡지 The Economist나 <사피엔스>까지 각기 다른 능력과 배경을 가진 아이들을 만난다. 기훈이 같은 경우 내가 느끼기에 가장 부족했던 것은 부모님의 사랑이었다. 소년원에서 나온 아이를 다시 경찰서에 데려다 주면서 소년원에 다시 집어넣어 달라고 경찰서 앞에 아이를 차로 데려다 놓고 가버린 부모도 있다고 천종호 판사님 책에서 본 것 같다. 계속 사고치는 자녀 때문에 괴로운 부모 마음도 이해는 간다.


그러나 부모의 돌봄이 없이는 아이는 공부를 잘 할 수 없다. 공부 상처 중에 ‘돌봄의 상처’라는 말도 있다. 과다한 기대도 문제지만 너 인생은 너가 알아서 살라고 방치는 더 큰 문제다. 그나마 검정고시라는 제도가 있고 아이들을 정말 인내심으로 돌봐주시는 사회복지사님들이 있어서 다행이다. 냉난방이 잘 되고 햇살이 비치는 창가에서 공부할 수 있는 교실이 있다는 것도 천만다행이다.


이렇게 영어는 나에게 일종의 오프라인 소셜미디어인 것 같다.  영어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난다. 학생, 부모님, 사회복지사님, 다른 과목 과외선생님 등등. 영어를 사람들에게 가르쳐 줄 수 있으니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계속 있을 것 같다. 교재는 파닉스부터 <사피엔스>까지. 이 스펙트럼의 어디에서든지, 선생님과 학생이 맺는 기분 좋은 관계 없이 교육은 불가능하므로 관계를 맺게 하는 소셜미디어로서 영어는 더없이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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