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덥지근한 날씨가 계속되더니 소나기가 지나간다. 빗줄기에 섞여 카톡 소리가 들리고 부고장이 떴다. 뒤이어 회원 장모님이 돌아가셔서 조문 가실 분은 사무실로 모이라는 문자가 왔다.
사무실에 모인 우리는 두 대의 차에 편승하여 수원연화장으로 갔다. 조문을 하고 한쪽에 자리를 잡고 위로의 말을 전하자 그는 말문을 열었다.
“이틀 전까지 정정하시던 분이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저는 장모님 마음에 안 드는 사위였지요. 키도 자그맣고 가진 것도 없고 조실부모하여 재산도, 배경도 없었으니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었을 테니까요.”
“처가에 구혼 요청을 할 때 저는 그래도 호기롭게 말씀드렸지요. 돈도, 부모 그늘도 없지만 몸은 건강하니 돈은 벌면 된다고요.”
그때 귀염성 있는 얼굴을 하신 여자분이 인사를 왔다.
“제 집사람입니다.”
“어머, 사모님이 미인이시네요.”
우리는 장모님이 반대하실만하다고 입을 모았다.
뜨거운 아욱국이 나오고 상이 차려지자 술이 한 순배 돌아가고 그는 말을 이어갔다.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때 한창 크고 있던 G 가전에 입사했는데, 공장을 크게 확장시키고 있던 대전공장으로 발령이 나서 내려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곳은 여성종사원이 3천 명 가까이 되는 곳이었어요. 기술 인력으로 30명의 남자들이 근무했으니 여성들에게 인기가 높았지요. 거기다 부모님이 안 계신 저는 시집살이 없는 조건이라고 더 인기가 높아서 제 자리에는 초코파이며 바나나우유가 떨어질 날이 없었어요.”
그칠 줄 모르는 인기를 뒤로 하고 조건 때문에 마다하는 장모님을 가전제품을 집안에 세팅시키며 성실성으로 설득하여 어여쁜 아내를 쟁취한 이야기가 꽃을 피웠다.
같은 조건이건만 누구에게는 호조건이 되고 누구에게는 부족한 조건이 되는 아이러니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트릭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그는 가전제품을 하던 노하우로 방송 사업을 하며 탄탄한 앞날을 설계하고 있으니 장모님과의 약속을 지켜낸 것 같다.
나는 문득 나의 결혼 조건을 떠올렸다. 내가 한창 사랑놀이에 빠져있을 때 나의 아버지는 다른 사람을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어릴 때 부친을 여의고 형들 밑에서 어렵사리 학교를 졸업한 가난한 사람이 당연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나에게 그의 조건 따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제대하고 돌아온 그에게 부지런히 교직 시험 준비를 시켜 학교에 출근을 하게 되니 반대의 결이 수그러들었고 우리는 가난한 신혼을 시작할 수 있었다.
더운 여름이어서인지 돌아가시는 분들이 많아서 4일 장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는 긴 장례 일정이니 더욱 건강을 챙기시라는 이야기를 드리고 밖으로 나왔다. 죽음의 그늘이 있건만 연화장 넓은 정원에는 푸른 나무들이 가득하여 한가한 공원에 들어선 듯이 거닐고 싶은 마음을 불러온다.
결혼 조건처럼 죽음의 조건도 어느 것이 더 나은지 가늠하기 어렵다. 갑작스러운 죽음과 오랫동안 눕는 죽음의 상황 중 어느 것이 더 나은 것일까? 너무 갑작스러운 임종으로 자식들이 운명의 순간을 놓치게 하는 경우와 오랜 병환으로 모두를 지치게 하고 떠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나은지 가늠하기 어렵다.
반드시 지켜야 하는 약속처럼 누구나 가는 길, 장수시대라고 말하며 나이 드신 분이 돌아가셨을 때, 사람들은 호상이라고 웃으며 말하지만 이별은 언제나 아쉬움과 슬픔을 남기는 것. 그래도 오래 아프지 않고 하루 전까지 웃으며 이야기하셨다는 말에 복 받으신 것이라는 위로를 건넸다. 그러나 죽음은 그리움을 안개처럼 남기고 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