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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소리 Jul 22. 2024

이정표 없는 갈림길

인연의 시작

  

 며칠 전 한식 성묘를 다녀오던 때였다. 도로 가에 ‘일영’이라고 쓰인 이정표가 보였다. 산악회 가입 이후 남편과 첫 데이트를 했던 곳이다. 나는 ‘일영이 아직도 있네’라고 말했다. ‘그럼 그곳이 어디에 가?’라고 남편이 되묻는다. 순간 ‘나는 왜 아직도 있네’라고 생각했을까? 내 마음속의 어떤 감정이 그렇게 말하게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잊어버렸던 순수한 감정이 되살아나서? 결혼이라는 알 수 없는 새로운 길을 가게 된 계기가 된 곳이어서 일까. 아니면 힘들게 살아온 것 때문에 지우고 싶은 곳이었나?   

  

 오늘 아침의 일이다. 

 “여보, 아침 빨리 줘, 9시 이전에 가야 연습장 자리 맡기가 쉬워,” 

 “이건, 어제저녁에 먹었잖아 다시 먹기 싫어,” 나는 반찬을 다시 차렸다. 평생 세끼 반찬 걱정을 하며 살아오면서 끝없이 돌을 밀어 올리는 시지프스의 징벌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어제 들은 L의 말이 떠올랐다. 

 “우리 남편은 내가 유치원 운영하면서부터 9년째 밥을 해주고 있어요, 어제는 열무김치를 해줬는데 얼마나 맛이 있는지, 여보, 너무 맛있어, 고마워, 사랑해를 막 날렸어요.”

 밥을 먹고 숟가락을 놓는 남편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남편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게 정상이야?”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건너다본다.

 하루 세끼를 제시간에 꼭 먹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 한 번 먹은 것은 다시 먹기 싫어하는 사람, 후식으로 과일은 꼭 있어야 한다는 사람이다.      

 나에게 결혼은 아주 낯선 곳으로 가는 새로운 모험의 길이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함께 살면서 생경스러운 일들과 부딪칠 때마다 힘든 고개 길이 되었다. 그래도 구비 길을 넘고 넘어 집도 직장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될 때쯤 퇴직을 하였다.

 퇴직 무렵 나는 새로운 꿈을 꾸었다. 몇 년 먼저 퇴직한 남편과 같이 요리학원을 다녀 식사당번을 번갈아 하며 부엌에서 좀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편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그 후부터는 무엇이 되겠다, 무엇을 배우겠다는 치열함을 버리고 소소한 꿈으로 바꾸었다. 그저 아침이면 느긋하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음악이 있는 공간에서 일어나 신문을 본 후 식당으로 가 차려진 아침을 먹고 가볍게 산책을 한다. 산책에서 돌아오면 쓰던 글을 다시 보고 퇴고를 마치면 블로그나 브런치 스토리에 글을 올리는 꿈.  

 골프 연습장에 다녀온 남편에게 오늘은 몇 타나 쳤느냐고 묻고 많이 쳤다고 하면 싸게 쳤네요, 하고 응수를 해주고 오후에는 가까운 거리에 있는 용인 휴양림에 가서 산길을 걷기도 하고 계곡의 물에 발도 담가보고 분위기 있는 카페에 가서 차도 마시며 담소를 나누는 그런 꿈이다.     

 사람들은 퇴직 후의 삶을 위해 새로운 것들을 많이 배운다. 물론 계속 끼니를 버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자기표현을 위해 그림을 그리고 악기를 배우거나 글을 쓰고 여행을 다니며 제2의 인생길을 구가하고 있다.

 여행에 빠져 지구 전체를 끊임없이 돌고 있는 P는 현직에 있을 때 목말라하던 일들을 성취하고 있다. 특히 남미까지 여행을 다녀온 그는 우리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하와이의 작은 섬에 장사를 해서 돈을 많이 모은 어느 회장님이 여행을 왔어. 회장님 눈에는 풍부한 해산물들이 지천으로 자라고 있는 것이 돈이 굴러다니는 것처럼 보였지.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그저 소박하게 살고 있었기에 그는 그 마을의 족장에게 해산물을 이용하여 돈을 많이 모으는 방법을 자랑스럽게 말해주었지. 듣고 있던 족장은 재벌회장님에게 조용히 물었어. 

“그렇게 돈을 많이 모으면 어떻게 살게 될까요?”

“나처럼 이렇게 경치 좋은 곳을 여행도 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여유를 즐기시는 거지요.”

“네, 그렇다면 저희는 어렵게 돈을 벌지 않아도 이미 회장님처럼 여유롭게 살고 있지요.”라고 대답을 했대. 

 그러면서 그는 지금 있는 것을 최대한 이용하여 소박한 여행을 즐기며 남김없이 쓰고 가고 싶다고 했다.  

   

  얼마 전 아들에게서 전화가 왔었다. “엄마, 우리 집 근처로 이사 와요, 여기 식사를 제공해 주고 청소도 해주는 아파트가 있어, 근처에 바라산이 있어서 산책하기도 좋고 호숫가를 돌며 운동도 하고, 엄마는 운동이 너무 부족하거든, 내년쯤 이사할 생각을 해두시라고요. 우리 승원이도 보고 좋잖아요,”

 ‘정말 이사를 가서 이 징벌에서 벗어나 볼까?’ 결혼 50년 동안 굳어진 식습관을 고치기는 어려울 것 같으니, 손녀를 보라는 아들의 속내가 읽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 징벌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사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결혼의 갈림길처럼 또 다른 징벌 속으로 들어가는 길인지도 모르기는 하지만.  

   

 이정표도 없는 인생길은 언제나 선택의 문을 열게 하고 그 길을 걷는 방법은 본인이 책임지게 한다. 오늘도 바람 부는 길에 서서 새로운 길에 대한 궁금증과 기대의 설렘을 함께 느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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