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의 충격요법
11월은 누구나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첫눈이 내린다. 또 11월은 수험생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수능이 있는 달이다. 대입수험생을 둔 부모들도 덩달아 가슴을 두근거리는 달이다. 또 첫눈까지 손톱에 들인 봉숭아물이 남아있으면 첫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말을 믿고 싶은 소녀들의 두근거림이 있는 달이다.
그러나 나에게 11월은 세상이 무너질 것 같았던 두려움으로 인해 생긴 두근거림이 있다. S중학교에 근무할 때였다. 내가 맡은 업무는 담임, 도서관, 교과서 담당이었다. 모두가 기피하는 업무를 떠맡고 있었다. 도서관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건물이다. 100평 정도가 넘는 건물로 강당과 도서관 서고로 쓰고 있었다. 1300여 명 학생들의 교과서 수급업무도 교과서 배부부터 교과서 값 수금까지 엄청났다. 그러나 도서관 운영의 업무도 만만치 않았다.
그날은 수능 전날이었다. 오후 1시 수험생들 예비소집이 있는 날이어서 운동장에 학생들이 모이기 시작할 때쯤이었다. 학급에서 수험실로 쓸 교실정리를 하고 있는데 도서관에 불이 났다는 소리가 들렸다. 달려가는데 이미 불자동차가 들어오고 지붕 쪽에서는 연기가 나고 있었다. 나는 새파랗게 질린 채 “어떻게 해~” 하며 도서실로 뛰어들어가려 하다가 누군가에 막힌 채 쓰러졌다.
강당은 시험 본부로 쓰일 테이블이며 서류들이 세팅 완료되어 있는 상태였다. 다행히 불은 크게 번지지 않고 지붕을 받치고 있는 나무 들보들만 태운 채 30여 분 만에 꺼졌다. 사람들은 수능 당일이 아니라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했다. 만일 수능날 이어서 시험을 보다가 불이 나서 아이들이 뛰어나왔으면 어찌 되었을까? 전국의 수능을 다시 보아야 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 뻔했는데 그나마 다행이라고 가슴들을 쓸어내렸다.
수능 본부를 다른 교실로 옮기고 수능은 정상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조서를 받으러 가야 한다는 말이 학교에 돌고 답답한 상황을 이야기하려 해도 남편은 매일 자정 무렵 취해서 들어왔다.
나의 고초는 시작되었다. 누가 책임을 질 것 인지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던 중 나에게 경찰서에서 조서를 쓰러 오라는 전갈이 왔다. 나는 생전 처음 가보는 경찰서 분위기에 질린 채 담당관과 마주 앉았다.
“이름이 무엇입니까?” “네? ㅇㅇㅇ입니다.”
"근무처는 어디입니까? " ㅇㅇㅇ중학교입니다.
"담당하시는 업무는 무엇입니까?"
"담임과 도서관입니다." 완전히 범인 취급이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화재가 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요, 불이 날 우려가 전혀 없었습니다.”
위압적인 분위기에 떨며 여러 질문에 정신없이 대답하고 지장을 찍으라고 해서 인주를 묻혀 조서에 벌건 손가락을 찍고 돌아서는데 조서는 세 번 받아야 하니 다음날 다시 오라고 한다.
이럴 때 옆에서 도와주지 않는 남편에게 원망을 퍼부으며 집에 돌아오니 매일 늦던 남편이 웬일인지 일찍 들어와 있었다. 남편에게 조서 쓴 이야기를 했다. 남편은 화를 벌컥 내면서 왜 네가 책임을 지느냐고 볼멘소리를 한다. 그리곤 책임을 지게 되면 배상은 물론 벌금까지 내고 교도소에 갈 수도 있다며 충격요법으로 정신무장을 시킨다.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음날 남편과 함께 경찰서에 갔다. 담당관이 어제와 똑같이 이름과 직장, 업무를 다시 묻고 질문을 시작한다.
“화재가 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요, 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책임을 지나요?”
“도서관 관리 책임자가 져야 합니다.”
“내가 왜 책임을 져요. 저는 평상시 책임자지만 이 날은 수능 관리 본부로 도교육청에 대여를 해주었기 때문에 그날 관리자는 제가 아닙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난로의 연통은 유리창을 동그랗게 오려서 그곳으로 통과시켜 사용했었어요. 가을에 창문틀을 새로 바꾸면서 연통을 기존의 벽에 있는 굴뚝에 연결했어요. 그 후 한 번도 사용하지 않고 그날 처음으로 누군가 난로에 불을 지폈고 불이 났어요. 왜 내가 책임을 져야 합니까?” 나는 설치의 오류를 폭포처럼 쏟아내고 정신을 잃었다. 나는 남편의 등에 업혀 나와 병원에서 정신을 차렸다. 옆에서 보고 있던 조사 책임자는 정확한 재조사를 명했고, 재조사 결과 여러 정황 상 설치의 문제로 귀결되어 나는 혐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남편의 충격요법이 나를 단단하게 만든 덕분이다.
40여 년이 지난 지금도 11월이 되면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은 치욕스러운 조서의 후유증인지 손톱에 봉숭아물도 없이 첫사랑 남편과 결혼을 한 것 때문인지 알 수 없다.
첫눈을 기다리는 11월은 언제나 두근거리는 설렘과 함께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