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NHYPEN - [ROMANCE : UNTOLD -daydream-]
ENHYPEN의 다크 판타지
엔하이픈(ENHYPEN)의 세계관을 한 단어로 말하자면, ‘뱀파이어’다. 소위 뱀자님(뱀파이어 왕자님)이라 불리는 이들은 하얀 송곳니, 피, 목을 무는 행위 등 뱀파이어의 상징과 같은 소재들을 앨범명, 가사 등 콘텐츠 곳곳에 집어넣음으로써 엔하이픈만의 다크 판타지 세계관을 촘촘하게 쌓아왔다. 2020년 Mnet에서 방영된 서바이벌 프로그램 ‘I-LAND’로 데뷔한 이들에게 부여된 이세계적 설정은 자칫 갑작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 때문에 그룹 엔하이픈의 서사는 세계관 스토리의 핍진성을 위해 다양한 요소, 콘텐츠들과 촘촘하게 엮이며 기획 - 전개되었다.
이세계의 시작인 미니 1집 [BORDER : DAY ONE]에서는 고전 문학적 요소들이 등장한다. ‘Intro : Walk the Line’의 내레이션은 셰익스피어의 소네트(sonnet, 각 14음절의 10줄로 구성된 정형시의 형식) 11을 차용하고 있다. 누군가가 영구히 기억되는 방법을 시라는 문학적 방식으로 제시하는 내용의 소네트로, 세계관에서 가장 중요한, 불사의 존재인 ‘뱀파이어’를 암시한 것이다. 같은 앨범의 타이틀곡 ‘Given-Taken’은 이들의 화려한 데뷔가 주어진(Given) 것인지 쟁취한(Taken)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담아내는데, 셰익스피어의 ‘햄릿’ 속 독백(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meaning)을 떠올리게 한다. 이렇게 세계관의 초반부터 극적인 특징을 가진 ‘고전 문학’을 앞세우는 기획을 통해 서사의 깊이와 분위기를 더했으며, 이들에게 완전히 새로운 서사가 부여됨을 선포한 것이다.
엔하이픈은 오리지널 스토리 시리즈를 통해 더욱 자세한 세계관을 풀어낸다. HYBE가 자체 기획, 개발한 엔하이픈 IP 기반의 ‘DARK MOON : 달의 제단’은 네이버에서 연재된 웹소설과 웹툰이다. 다크문 세계관과 연계된 콘텐츠의 설명란에는 DARK MOON with ENHYPEN이라는 문구가 게재된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뮤직비디오나 단편 영화와 같은 미디어 콘텐츠를 넘어 음반 구성품으로도 활용되며 이들의 세계 속으로 빠져들도록 유도했다. 이처럼 데뷔와 동시에 진심으로 쌓아 올린 세계관은 엔하이픈만의 색을 한층 짙고 깊게 즐길 수 있도록 도왔다. 그러나 올해의 엔하이픈, 정규 2집 [ROMANCE : UNTOLD]와 정규 2집 리패키지 [ROMANCE : UNTOLD -daydream-]에 담아낸 이들의 이야기는 이전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한낮의 헛된 꿈, day dream
정규 2집 리패키지 [ROMANCE : UNTOLD -daydream-]은 올해 7월 발매된 정규 2집 [ROMANCE : UNTOLD]에서 한층 확장된 테마를 녹여냈다. 정규 2집에서 ‘정반대의 세계에 속한 너와 나의 로맨스 서사’를 그려냈다면, 리패키지에서는 그러한 로맨스 서사를 바탕으로 ‘너의 부재’를 통해 서로 간의 더 깊은 사랑을 확인한다. 앨범 소개를 통해 그 내용을 더욱 자세하게 풀어내고 있는데, 실제 연인관계에서도 경험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감정, 상대방의 부재로 인해 느끼는 걱정과 불안함, 외로움을 바탕으로 변치 않을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러한 서사는 타이틀곡 ‘No Doubt’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상대방을 원하면 원할 수록 괴롭고 외로워지는 마음, 그러나 그 지옥 같은 시간 속에서도 의심 없이 너를 사랑하는 것을 깨달았다는 가사를 통해 앨범의 메시지를 더욱 분명히 하는 것이다.
앨범명의 'daydream'은 대낮에 꾸는 꿈, 헛된 공상을 뜻하는데, 이러한 앨범의 테마는 콘셉트 포토에서 매우 직관적으로 드러난다. 먼저 공개된 BLUE NOON 버전 포토는 푸른 톤이 돋보인다. 텅 빈 공간 속 비어 있는 액자와 흰 그림자 곁에 힘없이 앉아 있는 멤버들은 상대방의 부재로 인해 쓸쓸하고 외로운 모습이다. ‘네가 존재하지 않는 낮’, 앨범명인 daydream(백일몽)을 담아낸 BLUE NOON 버전 콘셉트 포토는 푸른 색감의 사진이라는 뜻과 함께, 우울함이라는 단어의 중의적 의미를 활용하여 포토의 콘셉트를 전달하고자 한다.
두 번째 콘셉트 포토인 WHITE MIDNIGHT 버전은 깊은 밤, 하얗게 쌓인 눈을 맞으며 신비롭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공허해 보였던 BLUE NOON 버전과는 달리, 멤버들은 기쁘면서도 동시에 어딘가 결연해 보이기도 하는 모습이다. 너를 만날 수 있는 밤 시간, 그 기쁨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다시 너를 잃는 것은 아닐지 불안해할 수밖에 없는 마음을 담아내며,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으로 상대방을 숨겨두고 싶은 마음을 눈과 얼음이 가득한 공간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콘셉트 포토의 분위기와는 달리, 트랙 비디오와 뮤직비디오는 강렬한 느낌으로 공개되었다. 화려한 투스젬으로 시작되는 ‘DayDream’ 트랙 비디오는 역동적인 액션과 자유분방한 모습을 강조했다. 박쥐 모양의 보드게임 요소와 관 등 세계관을 곳곳에 녹여낸 영상은 콘셉트 포토와는 다른 앨범의 콘텐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https://youtu.be/rDolt3jJRsM?si=pvHj3yTxiMQKKc8s
타이틀곡 ‘No Doubt’ 뮤직비디오도 마찬가지다. 너를 볼 수 없는 낮을 회사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망상과 환상으로 풀어내는 영상은 곡의 메시지를 은유적으로 담아낸다. 얼음을 녹이고, 스테이크까지 구워지는 열기 속에서 붉게 상기된 엔하이픈의 모습으로 사랑을 하며 겪는, 너의 부재로 인한 열병을 표현한 영상은 이전의 콘텐츠들과는 완전히 다른, 회사원이라는 새로운 이미지를 등장시키고 있다.
‘다크 판타지 최강자’들의 새로운 챕터, ROMANCE 시리즈는
정규 2집 리패키지 [ROMANCE : UNTOLD -daydream-]는 여러 면에서 다소 아쉽다. ROMANCE 시리즈는 그 이름처럼 사랑과 결부된다. 사랑을 주제로 한 만큼, 이전의 강렬한 음악보다는 조금 더 밝게 멜로디를 꾸렸다. 새 시리즈의 테마에 맞게 음악도 자연스럽게 변화하였고, 이러한 음악적 변화는 현재 K-POP 시장의 이지리스닝 같은 유행과도 맞아 들어가는 듯 보인다. 그러나 세계관 테마의 변화가 음악에 영향을 준 것인지, 음악적 변화를 시도하기 위해서 보편적인 메시지를 선택한 것인지, 기획적 측면에서 전후 관계가 확실해 보이지는 않는다. 보편적인 감정을 노래하고자 하는 앨범의 기획 방향성과는 달리, 뮤직비디오와 같은 앨범의 주요 콘텐츠들은 여전히 대중성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팬덤의 반응을 불러일으킨 것은 엔하이픈 본래의 강렬한 이미지의 콘텐츠였다. 앨범 테마의 완성도, 스토리 흐름의 유기성으로 따지자면 콘셉트 포토가 나음에도 불구하고, 엔진(ENGENE, 엔하이픈 팬덤명)은 트랙 비디오와 뮤직비디오에 환호했다. 이들이 기대하는 것이 곧 컨셉추얼한 분위기, 강렬한 음악과 퍼포먼스임을 알 수 있다. 촘촘한 세계관이 존재하는 만큼 강렬한 콘셉트는 엔하이픈의 가장 큰 특징이다. 미니 4집 [DARK BLOOD] 타이틀곡 ‘Bite me’의 우아한 고딕풍 의상이나 시네마 트레일러와 같은 컨셉추얼한 이미지는 엔하이픈만이 할 수 있는 색깔이었고, 이로 인해 다크 판타지 최강자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ROMANCE 시리즈에서는 팬덤의 마음을 이끄는 컨셉추얼한 매력도, 대중성을 노린 보편적 감정의 메시지도 느끼기 어렵게 된 것이다.
ENHYPEN이 진정으로 ‘연결’해야만 하는 것
엑방원(EXO – 방탄소년단 – WANNAONE)으로 대표되는 세계관 전성시대 속 3세대 아이돌 그룹보다 현재 활동하는 아티스트들이 세계관을 풀어내기에는 더욱 유리하다. 뮤직비디오와 같은 한정된 콘텐츠에만 치중했던 이전과는 달리, 다양한 미디어 형식의 콘텐츠를 원하는 대로 풀어낼 수 있게 되었고, 세계관과 콘텐츠를 분석하는 채널들도 많아지며 즐길 수 있는 거리가 가득한 시대가 되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현재 아이돌 아티스트들의 세계관은 그저 하나의 ‘콘셉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억지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수많은 K-POP 아티스트와 앨범 사이에서 정체성을 구축할 수 있는 성공적인 비즈니스와 브랜딩을 위한 방식 중 하나인 것이다.
엔하이픈의 뱀파이어 세계관도 결국 이들이 추구하는 ‘연결’이라는 메시지를 녹여내는 하나의 스토리텔링 수단이다. 이들은 단어와 단어를 연결하여 문장을 만드는 하이픈(-)을 그룹명에 새기며, 사람과 사람, 세대와 세대, 분열된 세상을 연결하고자 한다. 사실 엔하이픈은 데뷔 전부터 이미 연결의 서사를 가지고 있었다.
I-LAND 속에서 모두 분리되어 있었던 ‘I’, 개인이 연결된 결과로 탄생한 그룹이었으며, 데뷔 시기도 코로나19 엔데믹과 맞물리며 팬덤과의 결속, 연결을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적 서사는 업계에서 흔하게 겪을 수 있는, 어쩌면 얕은 서사로, 아티스트의 아이덴티티를 정립하기에는 부족하다. 결국 다층적인 이유로 인해 현실 세계와 분리, 분열된 ‘이세계’를 만들 필요가 있었고, 여기에 더 큰 몰입감과 재미를 줄 수 있는 판타지적 설정과 극적인 요소를 더해 완성된 것이 현재 엔하이픈의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이들이 언제까지고 다크 판타지스러운 강렬한 콘셉트만을 끌고 갈 수는 없다. 이미지의 중복 소비는 큰 피로감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완전한 색깔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무엇보다 자연스러운 콘셉트 전환과 그 당위성, 기획력이 중요하다. 팬덤이 기대하는 퍼포먼스와 이미지를 버리지 않으면서도 음악적 변화를 꾀할 수 있는, 그 간극의 ‘연결’이 시급한 때이다.
by. 별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