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BYMONSTER – [Drip]
지난 4월, 아현의 활동 재개와 함께 공식 데뷔를 알렸던 베이비몬스터(이하 베몬)가 불과 7개월 만에 정규앨범을 내놓았다. ‘BATTER UP’부터 ‘SHEESH’까지 YG DNA를 철저하게 물려받은 모습을 보여준 베몬은 이번 정규 1집 [Drip]에서도 YG스러움을 계속해서 드러내고 있다. 프로듀서이자 래퍼인 초이스, 마스타 우를 비롯해 양현석, 지드래곤, 에어플레이 등 YG의 주요 자원들이 한 데 모여 일궈낸 [Drip]은 베몬에게 그 어느 때보다도 선명한 YG색깔의 옷을 입혀주었다. 이는 YG가 베몬에게 거는 기대감이 얼마나 큰 지 알 수 있는 대목. 다만, 이 옷이 단순히 YG 스타일을 답습하는 데 그치는지, 아니면 이를 넘어 베몬만의 개성과 색깔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는 아직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
YG는 설립 초기, 힙합 그룹 지누션의 흥행으로 힙합 레이블의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후반, 해외 음악 시장은 R&B와 힙합이 전성기를 맞고 있었는데, 양현석은 그 트렌드를 국내로 가져와 세븐과 렉시를 데뷔시켰다. 그렇게 YG는 해외 흑인 음악을 국내 시장에 알리는 데 주력했고, 블랙 뮤직을 추종하는 회사로서의 정체성을 공고히 했다. 이러한 YG가 현재와 같은 대형 기획사 라인에 있을 수 있도록 한 결정적인 계기는 다름아닌 빅뱅의 등장이었다. 이전까지는 흑인 음악에 대한 색채가 뚜렷했지만, 빅뱅부터는 그 선명도를 과감히 낮추어 댄스 팝과 EDM을 차용하기 시작한 것. ‘거짓말’부터 정규 2집 [Remember]까지 빅뱅은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듭하며, 기존 YG가 갖고 있던 마니아적 이미지를 탈피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렇게 YG스타일은 고유의 힙합 DNA가 유지되면서도 대중성을 갖추게 되어 더욱 견고해진다.
이후 등장한 걸그룹 2NE1은 ‘Fire’를 통해 당시 청순과 귀여움으로 무장한 걸그룹에 반하는 당돌한 걸크러쉬를 컨셉을 내세워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음악적으로도 힙합을 기반으로 출발하여 ‘내가 제일 잘 나가’부터는 팝과 전자 음악요소를 활용해 대중성까지 겸비했다. 블랙핑크에서도 역시나 힙합을 계승하면서 댄스 팝, EDM 등 사운드를 보여줬다. ‘붐바야’에서 드러난 ‘이제 달려야지 뭘 어떡해’, ‘난 철 없어 겁 없어 man’ 등의 노랫말은 카리스마 있는 여성상을 표현한 듯하며, 이는 2NE1에 있던 걸크러쉬함을 이어온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때부터 YG표 걸그룹 스타일은 ‘힙합’, ‘당당함’, ‘걸크러쉬’와 같은 키워드로 정형화된 걸로 보인다.
이처럼 YG의 아티스트들이 뚜렷한 DNA를 장착하게 된 것은 YG가 ‘인하우스’ 프로듀싱전략을 강하게 고집했기 때문이다. 이는 초기부터 드러났던 YG의 특성인데, YG Family 프로젝트에서 소속 아티스트가 모두 모이고, 페리, 테디, 마스타 우 등 전담 프로듀서와 함께 음반을 제작한 것. 이처럼 YG는 크루, ‘집 안’이라는 개념을 일찍이 활용했다. 2NE1과 블랙핑크의 작들도 대부분 YG 집 안 저작자에 의해 탄생했다. 이들의 후발주자로 나와 YG의 미래를 짊어지고 있는 베몬도 이와 같은 양상이다.
이 앨범을 위해 YG의 주요 자원들이 원탁에 둘러 앉아 손을 모았다. 먼저, YG 대표 프로듀서이자 래퍼인 CHOICE37과 과거 YG Family의 일원이었던 래퍼 마스타 우가 더블 타이틀 ‘CLIK CLAK’, ‘Drip’을 피워냈다. 나머지 넘버들에도 YG 소속 크루인 팀 초이스와 팀 에어플레이, 팀 강욱진 그리고 빅톤이 이름을 올렸다. 이외에도 빅뱅의 GD가 타이틀에 관여했고, ‘Really Like You’에는 위너의 MINO, ‘BATTER UP (Remix)’에는 트레저의 최현석과 악뮤 이찬혁까지 크레딧에 발자취를 남기며 소속사의 막내를 위해 선배 뮤지션들까지도 힘을 보탰다. YG의 미래에 있어 베몬의 역할이 중요하기 때문인 탓도 있겠지만 그룹자체에 있어서도 색을 뚜렷하게 정립해야 할 시점이기에 이만한 심혈을 기울인 것. 앨범의 화려한 크레딧을 읊고 있으면 그 사운드를 들어보지 않아도 어느정도는 짐작할 수 있다. 역시나 YG표 힙합 색채가 느껴지고 강렬한 비트가 만연한 ‘Drip’, 흑인 작곡가까지 끌어들인 정통 힙합 넘버인 ‘CLIK CLAK’은 [Drip]이 YG DNA를 철저하게 계승한 결과물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저작자 특성상 클래식한 YG 색채가 느껴져 사운드 전개가 예측 가능한 지점에 있기는 하지만, 베몬 특유의 당당함이 더욱 강화되었다고 느낀 부분에서 소녀로서의 잠재성을 볼 수 있었던 것은 긍정적이다. 전작 ‘SHEESH’는 평균 나이 17세인 어린 소녀들이 소화하기엔 꽤 무거운 옷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Drip’에서는 한결 가벼워진 차림새로 틴스러움을 자아내 전보다 보기에 훨씬 편안했다. 이렇게 10대다워진 소녀들이 구사하는 자신감 넘치는 래핑은 베몬 특유의 당당한 색채를 더욱 짙게 만들었다. 사운드적으로도 ‘SHEESH’ 보다 자극적인 맛을 덜고, 프리코러스와 코러스의 대비를 완화시켜 이지한 무드를 느끼게 해줬다. 이어지는 코러스의 후킹파트는 다소 밋밋하기는 하지만, 그룹이 앞으로 지향할 새로운 음악적 스타일을 제시했다는 점. YG 선대 걸그룹이 다져놓은 힙하고 당당한 스타일을 계승하며 ‘Drip’에서 자신들만의 방향성에 대한 실마리를 찾은 것은 다행인 부분이다.
[Drip]은 철저히 YG의 틀 안에서 빚어진 작품이다. 뚜렷한 힙합 색채, 자신감 넘치는 애티튜드 등은 빅뱅시절부터 쌓아 올린 전형적인 YG 스타일이며, 베몬은 이를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그러나 이 ‘뚜렷한 YG 색채’가 오히려 이들의 발목을 잡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앨범은 그룹이 얼마나 YG다운지를 입증하려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러한 접근은 그룹 자체가 하나의 예술적 개체로 독립되기보다, 단순히 YG 스타일의 연장선상에 있는 또 하나의 프로젝트로 보이게 만든다. 특히 일부 곡에서 드러나는 사운드 전개는 예측 가능한 지점에 있었다. 과거 선대 걸그룹을 통해 경험한 음악적 문법과 유사한 부분을 보이는데, 타이틀 ‘Drip’의 벌스 파트에서 나오는 ‘Mmm, na-na-na~Uh, na-na-na’는 2NE1의 ‘fire’, ‘내가 제일 잘나가’를 연상케 하고, 프리코러스에서 코러스로 이어지는 긴장감과 그 이후의 후킹은 블랙핑크의 ‘Kill This Love’, ‘Crazy Over You’등에서 보았던 전개다. 이는 놀라움이나 신선함보다는 안전한 선택으로 느껴진다. YG 특유의 ‘인하우스’ 프로듀싱 전략과 그에 따른 일관된 색채는 정체성을 강조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지만, 그것이 경직된 틀로 작용한다면 오히려 창작의 가능성을 제약할 위험이 있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뚜렷한 YG 색채가 그룹의 개성을 희석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베몬은 [Drip]을 통해 새로운 가능성의 실마리를 발견했다고는 하나, 아직 선대 걸그룹의 옷을 완전히 벗지는 못했다. 이는 그룹이 단순히 소속사의 색에 갇혀 있다는 인상을 남길 뿐 아니라, 오히려 대중의 피로감을 유발할 위험을 내포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YG만의 딜레마도 존재하는데, 그것은 YG 특유의 색채가 YG 자체에 대한 팬들의 충성도를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점. 과거 위너와 아이콘이 데뷔하기 전 방영된 서바이벌 프로그램 <WIN: Who Is Next>와 <MIX & MATCH>는 빅뱅 팬덤의 큰 관심을 받았고, 초기 블랙핑크의 콘서트 관객 중 일부가 2NE1 팬들이었다. 이와 같은 YG 팬들의 이동 현상은 새로운 그룹에도 안정적인 기반을 다지는 데 보탬이 된다. 현재 베몬의 성적이 우상향을 그리는 것도 이런 YG 색채의 유지 덕분일 가능성도 있다. 그렇기에 베몬이 이러한 틀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정체성을 탐구하려 한다면, YG 팬들의 이탈이라는 위험을 감수해야 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YG 색채의 단순 계승만을 고수한다면, 대중과 시장의 기대를 넘어서는 성장에는 확실히 한계가 있을 것이다.
결국, YG다운 색채를 유지하면서도 이를 재해석하거나 새로운 방식으로 확장해야 한다는 과제가 그룹에게 주어진 셈이다. 동세대 걸그룹 시장의 치열한 경쟁 속에 놓인 현재 베몬의 위치를 고려할 때, 그들은 YG DNA를 바탕으로 더 넓은 음악적 스펙트럼과 예상치 못한 시도들로 자신들만의 서사를 써 내려가야 한다. YG라는 이름 아래 안전하게 빛날 것인가, 아니면 틀을 깨고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할 것인가? 선택은 그들에게 달려 있지만, 지금과 같은 음악적 접근이 이어진다면 이들이 진정한 독창성을 인정받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