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힙합 장르 되돌아보기
유행이 빠르게 변하는 요즘엔, 음악도 1년 단위로 유행하는 장르가 휙 바뀌고는 한다. 일례로 작년을 강타했던 드럼앤베이스나 UK 개러지 등의 장르는 케이팝과 현지 팝을 막론하고 어느샌가 ‘너무 뻔한 장르’로 전락해버리며 [BRAT]의 하우스 스타일에게 자리를 내주었고, 슈게이즈나 포스트 펑크 등의 장르도 큰 두각을 드러내지 못했으며 작년 가장 뜨거운 주제였던 컨트리 음악 역시도 어느 정도 정형화된 전략과 공식을 확립해가는 모양새이다. 그나마 작년의 열기를 이어나가고 있는 장르라고 한다면 Ken Carson, Yeat, Bladee, Lil Tecca 등으로 대표되는 트랩~레이지의 변주들이 아닐까.
그렇지만 지는 장르가 있으면 피는 장르가 있는 법. 오늘 다룰 장르들은 그중에서도 ‘새로’ 피는 장르가 아닌 ‘다시’ 피는 장르들에 대해 조망해 보았다. 작년의 드럼앤베이스나 UK 개러지가 그랬듯, 또는 2020년의 디스코가 그랬듯, 장르는 늘 돌고 도는 법이다.
남부 힙합의 트랩을 베이스로 하지만 서부 힙합의 영향을 받아 그루브하고 미니멀한 기조 속에서 주로 베이스와 클랩 등의 악기들로 곡을 이끌어가는 장르, 소위 말해 DJ Mustard의 시그니처 사운드 ‘Mustard on the Beat Hoe’ 장르로 일컬어지기도 하는 Ratchet (이하 래칫) 장르는 철저하게 “한때 쓰이다 마는” 장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줄로만 알았다. 특유의 흥겨움 덕분에 2011년을 강타한 Drake의 ‘The Motto’와 Tyga의 ‘Rack City’를 시작으로 YG의 ‘My Ni**a’, Iggy Azalea의 ‘Fancy’, Tinashe의 ‘2 On’, Fetty Wap의 ‘679’ 등은 모두 2010년대 초중반을 휩쓸은 메가 히트곡이 될 수 있었지만 극도로 미니멀한 장르 특성상 새로 변용할 만한 작법이 적었기에 금세 물리기 십상이었고, 때문에 10년대 중후반부터는 래칫 전문 랩퍼인 Tyga나 YG의 성적도 급락하게 되며, 래칫 자체도 거의 쓰이지 않는 장르가 돼버린 것이다. 때문에 2020년대 현재는 빌보드 차트나 메인스트림 씬에서 해당 장르를 메인으로 차용한 음악은 사실상 거의 찾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그렇지만 24년의 DJ Mustard는 해답을 찾은듯하다. ‘힙합의 구원자’ Kendrick Lamar와 함께 말이다. Drake의 디스 곡으로 발표된 ‘Not Like Us’는 기존 래칫 특유의 미니멀하면서도 흥겨움은 여전히 유지하지만 그 속에 기존보다 둔중한 베이스를 끼워 넣고, 서늘하고 느와르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스트링과 브라스, 건반을 절묘하게 배치해 디스곡 특유의 하드코어 한 분위기까지 잡아낸다. 상대를 신랄하게 디스 하면서도 이렇게까지 흥겨울 수가 있다니 참으로 반칙 아닌가. 당연하게도 이 노래는 피치포크에서도 2024년 최고의 노래 1위로 선정됨과 동시에 빌보드 핫100, 스포티파이 등 온갖 메이저 차트에서도 1위를 석권하며 비평가와 대중 모두를 사로잡은 음악이 될 수 있었다.
그 후에도 래칫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메이저 아티스트들 노래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틱톡에서부터 인지도를 쌓아온 Tate McRae는 ‘It’s OK I’m OK’에서 역시 래칫을 선보였는데, 기존 래칫에 비해 드럼의 비중을 늘리고, 프리 코러스에서부터 진행 및 악기에서 변화를 주며 힙합이 아닌 콘템포러리 R&B 장르에서의 래칫 활용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비슷한 작법이지만 더 나아가 90년대 힙합 소울의 바이브까지 구현해 낸 Ariana Grande의 ‘The Boy is Mine’ 또한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그렇지만 이 래칫 리바이벌에 쐐기를 박은 것은 역시 DJ Mustard와 Kendrick Lamar이다. 지난 11월 기습적으로 발매된 Kendrick Lamar의 앨범 [GNX]에서 그는 전례 없던 래칫 뱅어들을 선보인다. ‘Squabble Up’에서는 00년대 서부의 ‘하이피’ 장르를 연상시키는 강렬하면서도 다양한 전자음 활용은 백미였으며, ‘Not Like Us’를 이어 받은 듯한 ‘TV Off’도 마찬가지로 스트링 활용을 통해 래칫 특유의 흥겨움 속에 진지하면서도 스산한 분위기를 공존시켰다. (이 바이브는 중반 Kendric의 “Mustard~~” 울림으로부터 시작되는 비트 체인지 이후 더 강해진다.) 이 두 곡은 기습 발매임에도 불구하고 빌보드 핫 100에서 나란히 1위와 2위를 차지한 만큼 대중들에게 래칫의 부활, 다양한 악기 활용을 통해 “흥겨우면서도 다른 바이브까지 머금을 수 있다는” 래칫의 새로운 가능성을 충분히 알렸을 것이다.
케이팝 씬에서도 (Kendrick의 영향 덕인지는 모르겠지만) 카리나의 ‘Up’, 키스 오브 라이프의 ‘Igloo’, 세븐틴의 ‘LOVE, MONEY, FAME’ 등의 곡에서 래칫 장르를 쉽게 발견할 수 있었으나, 2024년의 방식이 아닌 2010년대의 그 작법 그대로 쓰였다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새롭게 부활한 이 장르가 2025년에는 어떤 활약을 보일지 주목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00년대 중반 Kanye West와 Just Blaze로 대두되는, 보컬 샘플링의 피치나 BPM을 빠르게 해 노래에 삽입하는 장르인 Chipmunk Soul (이하 칩멍크 소울)은 사실 2020년대 초중반부터 서서히 다시 쓰이기 시작했다. 특이한 점은 기존의 칩멍크 소울은 주로 동부의 재즈 힙합, 붐뱁에서 쓰였다면 20년대부터는 남부의 트랩에서도 쓰이기 시작했다는 것. 물론 10년대부터 꾸준하게 ‘Do Not Disturb’ ‘Nice For What’, ‘Middle of the Ocean’ ‘First Person Shooter’과 같은 곡을 통해 칩멍크 소울과 트랩을 결합한 드레이크도 있지만, 최근의 칩멍크 트랩 붐에는 프로듀서 Metro Boomin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본인의 솔로 앨범에 수록된 ‘Feel The Fiyaaaaah’이라거나 드레이크를 디스 하기 위해 만든 재치 넘치는 연주곡 ‘BBL Drizzy’가 대표적인데, Metro Boomin의 진정한 의의는 본인 자신이 랩퍼가 아니기 때문에 다양한 랩퍼들과의 장르적 협업이 가능하다는 점에 있다. 23년 Young Thug의 솔로 앨범에도 ‘Oh U Went’를 통해 칩멍크 트랩을 선보였고, 21 Savage & Metro Boomin의 합작 앨범에 수록된 ‘Runnin’, ‘Said N Done’ 혹은 올해 발매된 Future와 Metro Boomin의 ‘Everyday Hustle’이 좋은 예시일 것이다. 그 외에도 J.I.D, J. Cole, 21 Savage 등의 아티스트 또한 빼놓을 수 없겠다.
이렇게 칩멍크 트랩의 인기가 올해만의 일은 아니라지만, 올해는 유독 더 해당 장르를 시도하는 아티스트가 늘어난 것만 같은 기분이다. 앞서 언급한 Future은 Metro Boomin을 통해 올해 처음으로 칩멍크 넘버에 도전한 것이고, 트랩의 하위 장르인 시카고 드릴의 대명사 Chief Keef 역시 올해 [Almighty So 2]에서 처음으로 시카고 드릴 비트 위에 칩멍크 소울을 얹은 앨범을 선보였다. 21 Savage 또한 기존부터 칩멍크 트랩을 해왔다지만 올해 발매한 [american dream]에서는 기존의 그 어떤 앨범들보다 칩멍크 트랩의 비중이 높았다는 것은 확실하다. 거기에 한국에서도 처음으로 이런 칩멍크 소울과 트랩의 결합을 처음으로 들을 수 있었는데, 3월 발매된 EK의 [ESCAPE] 앨범과 최근에 발매된 제네 더 질라의 [94-24] 앨범이 대표적이다. 칩멍크 소울 특유의 고전적이면서도 우아한 바이브와 10년대 이후 가장 대중적인 힙합 넘버인 트랩이 합쳐진 만큼 그 시너지는 보장된 흥행이기에 앞으로도 더 자주 들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솔직히, 앞서 언급한 래칫이나 칩멍크는 이전부터 어느 정도 그 조짐이 보였기에 크게 놀랍지 않았지만, 이 장르만큼은 정말로 예상하지 못한 영역이었다. 22년 백인 힙합 듀오 Joey Valence & Brae가 발매한 ‘Punk Tactics’는 닌텐도 DSi로 촬영했을 만큼 저예산의 뮤직비디오였음에도 불구하고 유튜브 조회수 1330만 회를 기록하고 쇼츠 플랫폼에서도 큰 인기를 얻으며 각종 무대에 오를 수 있었고, 올해 발매한 [No Hands]에서도 역시 ‘The Baddest’와 ‘OK’라는 곡을 통해 유의미한 스트리밍과 비디오 성적들을 거두며 기세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이들이 선택한 장르는 다름 아닌 80년대 New-School Hiphop (이하 뉴스쿨 힙합) 장르. 경우에 따라 Mid-School Hiphop으로도 불리는 이 장르는 한국에서는 Run DMC의 ‘You Be Illin’’을 패러디한 개그콘서트의 ‘키 컸으면’이 본 장르를 설명할 수 있을 가장 유명할 곡일 텐데, 힙합의 초창기에 유행했던 장르니만큼 고전적인 DJ 스크래칭이나 특유의 드럼 머신 사운드, 샤우팅 하는 듯한 랩과 (간혹) 락적인 기타가 가장 특징인 장르이다. 이 장르의 특이점으로는 새로운 변주 없이 그 시절 그 소스와 작법이 그대로 다시 쓰인다는 점. 이에 따라 미디어 활용도 자연스럽게 복고적이면서도 ‘강렬한 에너지’를 드러내는 데에 초점을 맞추게 되는데, Joey Valence & Brae가 ‘PUNK TACKTICS’의 뮤직비디오를 저화질의 닌텐도 DSi로 찍은 것도 이러한 전략에 의함일 것이다. 이번 [No Hands]에서는 조금 더 재즈나 브레이크비트, 하우스, 크렁크 등을 사용하며 음악적 스펙트럼을 넓혔다지만 여전히 기본적인 기조는 모두 80년대 뉴스쿨 힙합 그 자체의 복각에 충실하다.
한국에서는 꾸준하게 뉴스쿨 힙합과 비슷한 느낌의 웨스트 코스트 붐뱁 – 서태지와 아이들의 ‘Come Back Home’의 아류 음악들이 등장했기에 그리 낯설지는 않았을 것이다. 올해만 해도 케이팝 씬에서 영파씨의 ‘XXL’, 에스파의 ‘Armageddon’, 트리플 에스의 ‘Hit the Floor’, 라이즈의 ‘Siren‘등이 80년대 뉴스쿨과 90년대 붐뱁 사이를 오가는 곡이니 말이다. 힙합 씬에서는 작년 스카이민혁이 [해방] 앨범의 몇몇 곡을 통해 물꼬를 트더니, 올해 허클베리피의 EP [READMISSON]으로 제대로 각인을 새길 수 있었다. 스카이민혁의 뉴스쿨은 앨범의 몇몇 곡에 한정돼 있었고, 그 곡들마저도 케이팝 씬과 유사하게 90년대 붐뱁까지 닿아 있었다면, 허클베리피의 이번 뉴스쿨 넘버들은 정말로 순수한 80년대 그 자체를 복각했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음주운전이라는 평생 떨어지지 않을 주홍글씨 때문에 성적은 그리 좋지 못했지만, 이 앨범을 들은 사람들은 대부분 호평했을 정도로 꽤나 준수한 결과물을 선보였다. 해외에서는 Joey Valence & Brae의 성공 덕인지 음악 그 자체보다는 쇼츠 활용까지 겸하는 경우가 많은데, 틱톡과 유튜브에서 활동하는 A.J. & Big Justice는 7월 ‘We Bring The Boom’이라는 곡으로 데뷔해 틱톡 빌보드 차트 10위권에도 들고 지미 팰런이 진행하는 더 투나잇 쇼에도 출연하며 큰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정말로 전형적인, 새로울 바 없는 80년대 뉴스쿨 넘버였는데도 말이다. (심지어 훨씬 더 유치하다!) 새롭게 떠오르는 신성 Doechii 역시 올해 발매한 믹스테잎 [Alligator Bites Never Heal]의 4번 트랙 ‘DENIAL IS A RIVER’에서 뉴스쿨 힙합의 사운드를 차용했으니, 뉴스쿨 힙합은 장르 씬 내에서 점점 더 저변을 확대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
23년 상반기, 하락세에 접어들 것만 같았던 힙합 장르는 이렇게 새로운 장르들의 부활에 힘입어 “힙합 위기론”을 한때의 호들갑으로 만들려는 마냥 아직도 건재함을 증명하고 있다. 트랩과 레이지의 끝없는 변주, 그리고 뉴재즈의 등장이나 이러한 옛 장르들이 다시 떠오르는 것을 보면 필자가 작년에 언급했던 “Post-트랩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진짜 음악을 잘하는 트랩 랩퍼’가 누구인지”도 어느 정도 가려진 듯하다. 힙합은 흔들릴지언정 무너지지 않았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내년에는 누가 어떤 새로운 장르를 가지고 나와 힙합 팬들의 귀를 만족시켜줄지, 미리 예상해 보는 것도 하나의 재미일 듯하다.
By 베실베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