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 베프> (Irma Vep, 1996)
-- 뤼미에르 형제가 세상에 영화를 내보인 뒤로, 프랑스는 영화의 흐름을 화려하게 주름잡았었다. 새로움 그 자체였던 기술에 더 새로움을 보태고 보태서, 이론과 제작으로 영화가 예술이라 불릴 수 있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가끔 장대한 역사는 그 훗날을 비루하게 만들기 마련이다. 역사에 짓눌린 예술가들은 패배주의에 빠져들기도 하지만 현재를 마주하고 어디로든 나아갈 길을 모색하기도 한다. 여기서 나아감은 과거로부터의 단절이 아니다. 연결 짓기다. 그쳐버린 과거를 현재와 미래로 더 뻗칠 수 있게 돕는 것. 그래야 역사와 예술가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다고 믿는다.
--올리비에 아사야스는 비평을 하다 제작을 하게 된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다들 아사야스가 이론과 제작이 맞붙어 있던 누벨바그의 맥을 잇는다고 한다. 이젠 더 이상 새로운 파도일 수 없게 된 역사를 계승한다는 건 꽤 부담되는 일이다. 여전히 프랑스 감독과 영화는 힘을 떨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예술병-돈 낭비-불친절 등의 말들로 오명을 받고 있기도 하다. 이런 시대에서, 어쩌면 <이마 베프> (Irma Vep, 1996)는 그 부담감과 나름의 타개를 내걸은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콜센터처럼 온갖 전화를 받고 소품을 처리하느라 정신없는 제작사로 장만옥이 찾아오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홍콩 배우 장만옥이 프랑스 제작사로 찾아오게 된 까닭은 두 개다. 왕년에 잘나갔던 감독 ‘르네 비달’은 고전 명작인 <흡혈귀단> (Les Vampires, 1915) 리메이크에 주연 이마 베프 역은 그녀만이 맡을 수 있다고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가 자막도 없이 봤던 르네 비달의 옛 작품에서 무언가를 느꼈기 때문이다. 감독과 배우는 서로의 ‘이미지’에 끌려 함께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만들기 시작한 영화는, 원작의 감독 푀이야드와 배우 무시도라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질 못하는 듯 보인다. 영화 전체가 최면에 걸려있단 점에서 그렇다. 원작에도 리메이크에도 이마 베프가 최면에 걸리는 장면이 나온다. 상대가 최면을 거는 이유는 이마 베프를 조종하고 종속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마 베프>에서 감독과 배우는 스스로에 최면을 걸기에 이른다. 비달은 나중에 거의 신경 쇠약에 이른 채 영화에 대해 중얼거리고, 장만옥은 수면제를 먹고 반최면 상태로 꿈을 꾼다. 보드리가 극장의 관객은 영화를 보면서 점차 퇴행 상태에 빠져든다고 말했는데, 그 퇴행은 꿈과도 비슷하다고 했다. 꿈이 아닌 퇴행은 최면이다. 너무 훌륭했던 과거에 짓눌려 지금의 영화는 관객을 사로잡지 못하고 제 스스로의 늪에 빠져버렸다. <이마 베프>는 화려했던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최면 상태로 허덕이는 르네 개인의 영화사와 프랑스 영화계의 왕년에 대한 거대한 은유인 셈이다.
--무성 흑백 영화인 <흡혈귀단>을 리메이크하는 데도 까닭이 있다. 작중 원작의 일부가 여러 번 나오는데, 그 중 ‘Vampire’가 ‘Irma Vep’로 에너그램하는 장면을 하필 보여줬다. 여기서 우리는 원작의 서사조차 이름의 ‘변주’에서 시작됐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누구도 새로운 것을 내놓을 수 없고 고전이 된 과거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오늘, 예술가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변주뿐이다. 영화의 뿌리엔 이미지가 있다. 오직 영화만의 언어! 영화는 이미지로 발화하므로. 이미지가 전부였던 때로 돌아가야만 한다. 무성 영화. 이 뿌리에서부터 비달은 새로움을 찾는다. 비달은 이리저리 비틀고 섞고 흐트러뜨리면서 완전히는 아니더라도 반쯤은 새로운 무엇을 세상에 내놓고 홀연히 사라진다.
--촬영본을 가지고 나름의 편집본을 던지고 사라진 감독. 그 마지막 시사에는 현재의 비루함을 못 견디고 고전에만 머무르는 사람과 과거와 단절되어 지금에만 머무르는 사람이 있다. 중국인은 파리를 대변할 수 없다며 장만옥을 자르자고 말하는 새 감독은 구닥다리처럼 보이고, 시끄러운 클럽 앞에서 방황하는 의상 담당 조이는 요즘 프랑스 영화의 클리셰적 요소를 고루 갖춘 듯 보인다. 그러니까, 그들을 앞에 두고 틀어지는 마지막 시사를 그저 작중 어느 기자가 말한 ‘감독의 자기만족을 위한 돈 낭비’라고 하고 넘길 순 없다. 비달만은 비록 자기만족만 할 줄 안단 비판을 피할 순 없다고 하더라도, 이미지라는 영화의 뿌리로 돌아가 다시 충돌하고 부딪히고 깨지면서 새로운 무언가를 다시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다시 묻게 된다. 어떻게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있을까? 이제 더 이상 새로운 걸 만들기는 불가능할까? 변주는… 새로움의 창조가 아닐까?
96년도 제작된 <이마 베프>는 올 2월 아트나인의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전>으로 만나볼 수 있다.
이미지 출처 I IM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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