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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을 Aug 08. 2023

이해의 불가능성보단 불완전성이라고 말하기

<6번 칸> (Compartment No. 6, 2021)

  기차, 여행, 동승한 여자와 남자, 서로를 쫓는 시선. 마음에 나비 떼가 있는 듯이 울렁여야 할 것만 같은 상황이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6번 칸> (Compartment No. 6, 2021)은 썩 우리의 기대에 부응하는 방식으로 흘러가진 않는다. 애인을 두고 홀로 암각화를 보러 떠나는 여자 라우라와 그녀의 애인이 있었어야 할 자리에 들어 찬 료하는 무르만스크 행 기차 6번 칸에서 맞닥뜨린다. 둘은 타지에서의 운명적인 사랑을 하진 않지만, 되돌릴 수 없는 직선처럼 나아가는 철로와 시간 위에서 지금 눈 앞의 서로에 시선을 마주하기에 이른다. 무언가 잃어버리고 놓고 온 것만 같은 과거와의 이별이다.



  애인이 나를 가장 외롭게 하는 일이 종종 있다. 라우라의 애인 이리나는 문학 교수다. 주변에 사람이 많다. 구절을 말하고 출처를 맞추는 게임을 하다 이리나는 “우리의 일부만이 타인의 일부와 맞닿을 수 있다”를 문제로 낸다. 라우라는 근접한 오답을 내놨다. 정답은 마릴린 먼로였다. 이리나의 말마따나 우리는 영영 타인을 꽉 채워 이해할 수 없는지도 모른다. 이해 불가능성. 그 말은 우리 자신에게도 적용된다. 라우라가 이리나에 느끼는 거리감만큼 이리나는 라우라를 이해할 수 없다. 어쩔 도리 없이 우린 모두 외로울 운명을 타고났다.


  라우라의 암각화 여행은 일종의 객기였다.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감독 유호 쿠오스마넨은 “애초에 암각화에 관심을 보인 것도 이리나를 기쁘게 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라 말했다. 애인의 빈 자리를 떠올리게 하는 료하는 만남과 동시에 불청객이 된다. 스킨헤드인 데다 보드카를 마시며 러시아를 찬양하는 말을 쏟아 대는 료하는 불량스러운 인상을 준다. 라우라는 그의 어딘가 행동과 시선이 어벙하고 단순한 면을 조롱하듯 꼬아낸다.


  기차 위 남자와 여자라는,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 많은 이야기가 빛을 발하게 한 것은 배우의 눈에 있

다. 료하의 푸른 눈에서 우리는 라우라에 대한 궁금 어린 마음을 읽어낼 수 있다. 애인이 있냐 툭 물어오면서도 흔들리는 눈동자, 암각화 얘기에 자신 없어진 듯한 눈빛, 식사를 망쳐버리고도 포옹해주자 기대하지 않으려 하면서도 기대를 품는 눈. 이런 것들이 모여 투박한 인물을 만들고 거친 외피 안의 외로움을 떠올리게 한다. 


  라우라는 모스크바에서 이리나와의 순간을 찍은 캠코더를 들고 기차에서 바깥 풍경이나 정차한 역에 서있는 사람들, 객실 안을 누빈다. 그리고 잠깐 호의를 베풀었던 동향 핀란드인으로부터 도난을 당한다(고 믿는다). 과거의 상실이다. 영화에서 끊임없이 꺼내지는 주제다. 정차할 때마다 라우라는 이리나에 전화를 걸지만 점점 시큰둥한 답만 오간다. 둘의 사랑에 종착역이 보이기 시작한다. 한편으로 캠코더 렌즈에 어쩌다 료하가 담긴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원할 뿐이라는 라우라는 자신을 끈덕지게 눈으로 쫓는 료하를 매몰차게 무시할 수 없다.


  여차저차 둘은 가까워진다. 마지막 식사에서 셔츠까지 챙겨 입은 료하는 자신을 그린 그림을 받고 꽤나 큰 감동을 받는다. 이게 나냐며 되묻지만 여태 가까워지려고만 했던 료하가 대뜸 주소는 주지 못하겠다며 라우라를 저 멀리 밀어낸다. 기차에 내리고 다신 만날 일 없을 것처럼 사라져버린 료하. 그리고 암각화는 겨울에 볼 수 없다며 여행의 끝을 맺지 못하게 된 라우라. 가깝고도 먼, 인력과 척력 사이의 힘겨루기가 이제 끝맺은 것만 같을 때 영화는 흰 눈 천지의 세계로 둘을 인도한다. 타이타닉을 흉내내고 눈밭을 뒹구는 둘을 보면서 우리는 사랑이 마냥 시간의 문제만은 아님을 알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앞이 보이지 않고 나 혼자뿐인 것 같은 눈밭에서 누군가와 시선을 마주하는 일만큼 구원인 일이 없다는 걸 알게 된다. 둘이 다신 만날 일이 없다고 해도, 둘은 타인에 완전히 달라붙기도 밀어내기도 나를 외롭게 만들 뿐이라는 걸, 가끔은 따뜻한 포옹으로 나의 일부와 너의 일부를 이해하는 일도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으리란 생각만으로도 위안이 된다.



  철로와 시간은 되돌릴 수 없는 직선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우리는 자꾸만 놓고 온 건 없는지 확인하려는 뒤를 향한 고갯짓을 한다. 돌아보면 볼수록 되찾지 못할 것들을 떠올리고 상심하게 된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걸 안다. 그러나 철로엔 종착역이 있지만, 시간에는 어딘지 짐작키도 어려운 눈보라로 뒤덮인 바다만이 있을 뿐이다. 6번 칸에서 맞닥뜨린 라우라와 료하는 되돌아갈 수 없는 지극히 수직선 같은 여정을 함께한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기다린 라우라와 그녀를 끈덕지게 눈으로 쫓는 료하. 어느 순간 컷의 분할 없이 수평으로 움직이면서까지 둘을 담는 대화 장면에서, 우리는 라우라가 이제는 지나쳐 온 철로에서 벗어나 지금을 보리라는 걸 안다.




이미지 출처 I IMDb

원글 주소 https://cafe.naver.com/minitheaterartnine/9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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