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 (1991)
한 감각을 잃으면 남은 감각이 곤두선다는 말이 있다. 과학적 근거가 있는 건지, 어떤 소망과 염려가 담긴 건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 (A Scene at the Sea, 1991)에서만큼은 이 말에 동의하게 된다. 소리 없는 세상에서 시선의 감각은 얼마나 강력한지. 소라에 귀를 대도 바닷소리를 들을 수 없는 남자와 여자는 마음에 귀를 대는 법을 안다. 바다에 잠기는 법을 안다.
아이의 엄마를 찾아주는 <기쿠지로의 여름>에서조차 기타노 다케시는 야쿠자를 전면에 내세웠었다. 대표작인 <소나티네>, <키즈 리턴>, <하나 비> 모두 선혈이 낭자하다. 중간중간 유머를 놓치지 않지만, 오히려 그 유쾌함은 종종 태풍의 눈처럼 무언가가 드리우고 있다는 감각을 일깨우기도 한다. 감각적인 미장센과 연출로 폭력의 미학이라는 수식어도 붙었다. 그런 기타노 다케시의 가장 조용한 영화가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다.
환경미화원 남자는 쓰레기 봉투를 트럭에 담다 한 쪽 끝이 부러진 서핑 보드를 발견한다. 한참을 바라보다 두고 출발하나 싶더니 얼마 못 가 되돌아온다. 스티로폼을 깎아 서핑 보드의 부서진 부분만큼 채운다. 그러고는 서핑 연습을 시작한다. 여자는 그 옆에서 기다린다. 둘은 바다에 있고, 남자는 서핑을 하며 여자는 그런 모습을 바라본다. 둘은 항상 서핑보드를 들고 앞뒤로 나란히 걸으며 가끔은 서핑대회를 위해 타지로 나가고 한 번은 서로를 향해 뛴다. 이게 영화의 전부다.
김춘수의 시 <능금>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우리들 두 눈에 그윽히 물결치는 시작도 끝도 없는 바다가 있다". 남자와 여자의 시선이 중요한 이유는, 그들 눈에 바다가 있기 때문이다. 남자와 여자는 마주보지 않으면 서로를 알아차릴 수 없는 침묵 속에 산다. 호명하는 목소리를 듣지 못해 서핑대회에 실격하고 여자의 기척을 듣지 못해 다른 여자를 만난단 오해를 사고 또 화해를 위해 찾아가도 부르지 못해 신발을 2층 창문에 보일 만큼 높이 던진다. 다케시 특유의 시시콜콜한 농담과 장난, 그리고 바닷소리가 목소리의 빈 자리를 메꾸지만 여전히 영화는 침묵이다. 중요한 대화는 시선으로만 이루어진다. 반지까지 돌려주며 이별을 선고하려던 여자는 남자의 눈을 마주보고 눈물을 또륵 흘린다. 여자는 항상 남자의 뒤를 쫓듯 나란히 바다처럼 수평으로 걷지만, 버스에서 내려 남자를 향해 앞으로 뛴다. 둘은 깊이 시선으로 스며 있다. 영화와 우리는 그 둘의 눈동자를 쫓을 뿐이다.
어떤 이야기는 물 수제비처럼 성큼성큼 앞으로 나아가는가 하면, 어떤 이야기는 잘게 치는 해변가의 파도처럼 제자리를 전전하다 어느새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로 깊이 밀려와 있기도 하다. 갑작스레 다가온 남자의 죽음에도 다들 개연성이니 하며 따져 묻지 않는다. 버려진 서핑보드와의 만남만큼이나, 우연히 서핑복을 받고 우연히 차를 얻어 타고 우연히 서로를 맞닥뜨린 일처럼이나, 세상엔 갑자기가 넘쳐난다는 걸 알아서 그렇다. 바다에 둥둥 떠다닐 서핑보드와 둘의 사진은 어느 날-또-느닷없이-갑작스레 누군가에 전해질 것만 같다. 아무개에 보내는 유리병 편지처럼, 어느 조용한 여름날에.
이미지 출처 I IM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