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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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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덴의아래 Jun 15. 2024

두근두근 갈림길

2024년 5월/6월 설악산 신선대-칠형제봉 능선 (1)



6월 6일 현충일. 해가 조금씩 낮아져가는 오후 4시 반.


갈망하던 물을 드디어 만났다. 수통 바닥에 찰랑거리던 마지막 한 모금의 물을 마셔버린 게 이미 한 시간 반 전의 일. 잦은바위골 물 흐르는 소리가 천국의 음향 같았다. 1리터 수통을 꺼내 계곡물을 가득 담은 후 원샷에 비웠다. 그리고 반 통을 더 마셨다.


계획이 틀어지는 바람에 식량이 하나도 없었다. 새벽 3시에 급한대로 설악동 매점에서 12개 들이 경주빵 한 박스를 샀는데 계속 배낭에 모시고만 왔다. 빵이 그렇게 물기가 없을 줄이야.... 아까 칠형제봉 능선에서 먹으려 시도한 순간, 점막에 남아 있던 희미한 습기를 쫙 빨아들인 거대한 밀가루 덩어리가 목을 꺽꺽 막았다. 이렇게 더울 줄 몰랐고, 이렇게 많이 헤맬 줄 몰랐고,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몰랐고, 이렇게 물이 모자랄 줄 몰랐다. 어제 저녁 이후 제대로 먹지도 못했는데 유일한 식량 경주빵은 물이 없어 넘길 수 없었다. 이러다 쓰러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 보았다.


계곡물 1.5리터를 퍼먹으니 일단 살 것 같았다. 이제 물 문제는 해결됐다. 다음 걱정은 바위 지대를 내려가는 것. 배낭에서 로프를 꺼내고 안전벨트를 착용했다. 아무도 없는 깊은 계곡에서 혼자 하는 하강 준비가 그렇게 외로운 행위인 줄 미처 몰랐다. 이제껏 식당에서 혼자 삼겹살 2인분도 구워 먹어 보고 혼자 야구장도 가 보고 술집도 가 보고 겨울산 야영도 해 보았지만, 혼자 하는 로프 하강은 처음이었다. 파트너 없이 하려니 너무 이상했다.


공룡능선 신선대엔 3주 연속, 칠형제봉과 잦은바위골은 2주 연속 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생존 모드 산행이 되어 버려서일까, 이번엔 지난 두 번과 같은 감흥은 일지 않았다. 아직 피가 완전히 멎지 않은 엄지 손톱과 까진 팔다리가 아프다는 생각, 너무 늦지 않게 천불동 계곡까지 내려가야 한다는 생각, 물로 가득찬 배가 무겁다는 생각 뿐.   


다음 주는 무슨 일이 있어도 산에 가지 말고 문명의 세계에 머물러 있어야지. 에어컨 시원한 어딘가에서 반쯤 누운 자세로 레몬 스쿼시를 마시는 상상을 했다. 얇은 유리잔에 얼음이 짤랑짤랑하는 경쾌한 소리가 귀에 들려오는 것 같았다. 상큼한 레몬 슬라이스 아래 작고 귀여운 탄산 방울들이 몽알몽알 하겠지. 버터향이 나는 소프트한 초코칩 쿠키가 있다면 그건 살짝 데워 먹어야지.


배낭을 메고 일어섰다. 물배에도 불구하고 허기는 계속되었다.







5월 중순 의외의 순간에 나를 휘감았던 강렬한 유혹, 이 모든 생고생의 시작이었다.


국립공원 봄철 입산금지 기간이 끝나고 첫 주말이던 5월 18일, 무박 버스를 타고 설악산에 갔었다.


산행이라기보다는 그냥 놀러간 것이었다. 원래는 그 주 예정된 산행이 있었는데 약속이 취소됐고, 약간 김 샌 마음에 설악산 구경이나 가자 생각했다. 신선대에 올라가 그리운 1275봉을 먼발치에서 한 번 보고 도로 내려오는 계획이었다. 14시간씩 걸어 설악산을 하루에 주파하는 그런 전투적인 산행은 하기 싫었다.


소공원에 내리니 시간은 여느 때처럼 새벽 세시 반. 주차장 앞 가게에 들어가서 라면과 만두를 주문했다. 주인 아주머니가 남들은 다들 도착하자마자 정신없이 올라가기 바쁜데 고수들은 여유가 있다며 칭찬인지 덕담인지를 건넸다. 그러고보니 출발 전에 거기 앉아서 뭘 먹는 사람은 나 말고 없었는데, 그건 내가 등산 고수라서가 아니라 산에 놀러왔기 때문이다. 시간이 아주아주 널널했다.


랜턴을 켜고 걷기 시작했는데, 비선대 지나 설악골 입구 나무 벤치 정도 이르자 계곡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천불동 계곡은 준엄하고 아름답다. 이곳은 아직 한창 봄이 진행중이다. 검색해보니 쪽동백 꽃이라고 한다.





서서히 밝아오는 계곡에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예쁜 새봄 나무들이 서 있다. 지난 주의 꽃밭 산행 https://brunch.co.kr/@560d8fe33aad457/40  이후 뭔가 나의 봄 감수성 게이지가 올라간 것일까? 왜 이렇게 봄 산이 예뻐 보이는지 모르겠다.


 


여린 연두색이 부드럽고 연약하고 유연해 보인다. 묘한 보호 본능을 불러 일으키는 것도 같다.  조금 지나면 숲은 짙고 강건해질 것이다.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 어려 보이려고 평생 갖은 노력을 다 하는데 나무는 일년에 한번씩 정말로 어려진다.


언젠가 자연사 박물관에서 배운 바로는 식물보다 동물이 먼저 지구에 나타났다고 한다. 식물이 동물보다 하등한 존재인 양, 저렇게 평생을 한 자리에 묶여 살면 얼마나 답답할까, 그런 오만한 생각을 했었는데 알고 보니 동물로부터 식물이 진화되어 나갔다는 것이다.


나도 다른 생물 종으로 바꿀 수 있다면 일년에 한번씩 어려지는 거 한 번 해보고 싶다.


말랑하고 어린 연두색 숲이 사랑스러웠다. 설악산처럼 무섭게 생긴 산에서조차.





 단풍산이 무색할 만큼 온갖 다양한 톤의 녹색으로 산이 알록달록하다.




무너미고개에 가까워지며 본격적으로 아침 햇살이 내리쬐기 시작한다. 투명한 연두색에 매료된 나는 별로 잘 나올 법하지도 않은 사진을 찍느라 발걸음이 더디다.


어느덧 공룡능선 초입. 분주히 오가는 등산객들이 없는 틈을 타 금줄을 살짝 넘었다. 신선대 정상으로 향하는 길이다.





공룡 옛길이라 불리는 이곳엔 난장이붓꽃이 곳곳에 고개를 내밀고 있다. 자연에서 파랑은 귀한 색이라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었다. 정말 눈에 확 띈다.  





며칠 전 대청봉엔 때아닌 폭설이 내렸다. 멀리서 보기에도 흰 눈이 덮여 있다. 1미터 이상 쌓였는데 아직 녹지 않은 눈이 발목 깊이가 넘는다고 한다.


하지만 설악산엔 이미 봄이 무르익어 있다. 되돌릴 수 없이. 비가역적으로.





어느새 다 올라왔다. 가운데 뾰족한 봉우리가 오늘의 목표인 신선대 2봉이다. 왼쪽 뾰족한 게  신선대 3봉이고 3봉의 반대쪽 면에 정규 등산로 공룡능선 조망처가 있다. 등산로는 왼쪽 아래로 신선대를 우회한다.





신선대 2봉 정상에는 옆으로 누워 있는 나무가 있다. 우측이 낭떠러지라 고도감이 있지만 가운데 바위 사이 뚫린 구멍으로 어깨를 비비며 올라가면 반대쪽에서 정상으로 올라갈 수 있다.






아, 겨울을 견딘 공룡능선과 1275봉이 따스한 햇살 아래 서 있다. 신선대 정상이다.


아직 조금은 날카로운 봄바람을 부드러운 아침 햇살이 토닥여주는 그곳에 한참 서 있었다.


나를 매료시키는 건 우뚝 솟은 바위 봉우리보다는 산과 산 사이 텅 비어있는 허공이다. 투명하게 들여다 보이지만 다가가 만질 수도 없고 사진에도 담기지 않는 신비한 공간. 공간이 깊어지기 위해서는 높이 올라가야 한다. 그 신비롭고 투명한 공간을 느끼기 위해 나는 자꾸 높은 곳을 떠돈다.


신선대에 서서 화채능선을, 천화대를, 마등봉을 바라보지만, 마음에 오래 흔적을 남기는 것은 그 사이를 꽉 메우고 있는 빈 공간이다.


아침, 외설악의 깊은 공간엔 햇살이 가득했다. 그리고 까마귀들이 분주했다.







여유를 부린다고 했는데도 오전 10시밖에 되지 않았다.


한참 앉아서 놀았다. 샌드위치도 먹었다. 어떻게든 그곳에서 시간을 더 보내고 싶어 땡볕 아래 핸드폰 게임도 조금 했다. 북적이는 등산객들의 소음이 이따금 멀리서 들려왔지만 이곳까지 오는 사람은 없었다.


아, 산행은 모름지기 이렇게 여유로워야지. 나는 도전적인 목표를 세우고는 날카로운 긴장 속에 산행을 하는 이상한 습성이 있다. 굳이 안 그래도 되는데. 산이라는 게 그냥 경치 좋은 곳 유람하러 다니면 되는 건데. 억지로 살빼러 다니는 거도 아닌데. 하필 왜 어려운 길을 골라서. 마음 졸이면서.


여유롭고 만족스러운 산행. 오늘의 목표였던, 그리운 1275봉도 보았다. 이제 슬슬 내려가 볼까.


그 순간이었다. 아까는 보지 못했던 웬 갈림길 입구 하나가 저기 살포시 열려 있는 것이다!!!



정규 등산로와 공룡 옛길이 있는 대청봉 쪽 사면이 아니라 절벽으로 이루어졌을 것 같은 그 반대쪽에 절묘하게 산길 하나가 나 있다.  뾰족한 신선대 2봉으로 굳이 직상하는 워킹 길이다.



 


갈림길 정면에 가서 보니 꽤 넓다. 거칠고 무서운 외설악의 세계로 이어지는 미지의 길. 하지만 저 정도 넓이의 산길이라면 꽤 많은 사람들이 다녔다는 뜻인데.


살포시 열린 산길의 유혹은 강렬했다. 이리 오세요~ 들어와 보세요~ 새로운 세계로 안내해 줄게요~ 말을 걸어오는 것만 같았다. 살랑살랑 손짓하는 것 같았다. 거의 에로틱하게 느껴질 정도로.  





무슨 리본이 달려있나 보았더니 설악산 친구들이라고 한다. 미지의 길을 안내해 주는 설악산 친구들이라니.  '설악산 친구들' 여섯 글자만으로도 엄청난 위안이 된다. 어떤 팀인지 몰라도 이름 참 잘 지었다.


얼른 검색을 했다. 칠형제봉 능선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천불동 계곡을 올라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하늘을 막고 뾰족뾰족한 바위들이 줄지어 늘어선 게 바로 칠형제봉 능선이다. 무서운 길일 것 같다. 하지만 다시 좋게 생각해서, 저 정도 넓이의 길이라면 많은 사람들이 다녔다는 뜻이니 괜찮지 않을까?


느슨했던 마음이 쫙 조여들어 왔다. 신선대의 여유로움 따위는 한 방에 날아가 버리고 저기 나를 유혹하는 갈림길에 온통 마음을 빼앗겨 버렸다. 검색을 계속 해 보니 칠형제봉 능선길은 설악산에서 가장 험하다는 잦은바위골로 내려선 후 천불동 계곡으로 하산하는 길이라 한다.  


좋아, 나는 다음 주 다시 이 자리에 돌아와서 저 길로 내려간다!


오늘은 일단 철수하자. 일주일의 시간이 있으니 그동안 자료를 찾아서 공부해 보자. 그리고 혼자는 부담되니 동행자도 구하자.


가슴이 막 두근두근한다. 산길이 나를 유혹하는 듯 에로틱하게 느껴지기는 처음이다.





마지막으로 1275봉을 눈에 담고 돌아섰다.


같은 길을 되짚어 내려가는 시간, 막 가슴이 설렜다. 산에 다니다 보면 작은 갈림길을 많이 만나지만 그 때마다 이런 기분이 들지는 않는다. 아니 이런 건 처음인 것 같다. 보통은, 어디어디로 이어지는 길인가 보다, 이러면서 가던 길을 갈 뿐이다.


약속이 취소되어 땜빵으로, 김 샌 기분으로 왔던 산행이었는데 이런 반전이 있다니.


세이렌의 아름다운 노랫소리에 끌려 그쪽으로 배를 몰아간 뱃사람들은 물에 빠져 죽어 가면서도 끝까지 미소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 얼마나 그 유혹이 강렬했으면.


발걸음이 가벼웠다. 셀레는 봄이다. 아름다운 봄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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