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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h y Oct 26. 2023

기억의 소용(所用)

10월, 설악

같은 산을 세 번 찾는 동안 계절이 바뀌었다. 여름의 끝자락을 품은 8월의 길은 여전히 뜨거웠다. 가을이 깃들기 시작한 9월의 비에는 후덥지근함이 가셨고, 짧아진 해가 모습을 감춘 10월의 산은 한자리 대의 기온을 오갔다. 산을 찾는 나의 걸음은 꾸준함을 잃었고, 떠밀리듯 내디딘 걸음은 갈수록 무거웠다.  


과거의 어느 한때를 떠올린 의욕을 앞세운 계획은 매번 제 손으로 무산되고, 나는 늘 좌절한다. 낙담을 핑계하여 더욱 걷고 생각하고 쓰지 않으니, 좌절의 꼬리를 물고 새로운 좌절이 떠오르는 것을 막지 못한다. 타자의 말과 자극을 분별없이 소비하며 안주하는 동안, 지금의 나를 마주하고 제힘으로 일어서서 나아가는 법을 자꾸 잊는다.  


달력의 종이가 닳도록 할 것과 갈 곳을 썼다 지우기를 거듭하다 겨우 집을 나선다. 작년 이맘때부터 올해까지 지난한 병치레를 치러야 했던 잔존하는 전염병의 공포보다, 자신을 향한 구차한 변명의 무게에 압도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컸다.  


집이 아닌 곳에서 하룻밤 눈을 붙이고 끼니를 때울 짐이 어깨를 짓누른다. 무게에 눌린 걸음은 여느 때보다 느리고 더디다. 높고 거친 산세만큼 강렬한 색을 머금기 시작한 나무의 색도, 늘어나는 산객만큼 늘어가는 쓰레기도 그저 지나치지 못해 무게를 감내해야 하는 시간과 부담이 늘어난다.  


결국 이튿날 걷고자 했던 길고 험한 능선길의 입구에서 힘겹게 뒤돌아선다. 이 상태로 능선을 넘어가는 건 무리가 아니라 무모함임을 머리로는 이해해도, 그 길을 걷기 위해 들인 시간과 노고에 기왕이면, 이라는 충동이 끝없이 인다. 돌아 나오며 마주친 산객들은 안타까운 속도 모르고 아쉬운 얘기를 늘어놓는다.   


울어서 해결될 일이면 벌써 백 번을 울었다. 처음 이 산을 찾았을 때도, 지난 두 번도 그랬다. 어쩌면 매번이었을지도 모른다. 주저앉았다가도 다시 일어나 끝내 길을 걸어내는 건 누구도 아닌 나의 몫이라는 걸, 산은 늘 일깨운다.  


달빛을 따라 걷기 시작해 해가 질 무렵까지 오르내리려던 계획을 무산하고, 저물어가는 해를 쫓아 뛰다시피 걷기 일쑤였던 길을 따라 오늘은 한가한 걸음을 옮긴다. 아침 햇살을 마주하고 앉아, 뒤로 하고 온 산을 한참 바라본다. 카메라로도, 눈으로도 오롯이 담기지 않는 수려한 산세를 등지고 걷기 바빴다.  


처음은 산이 아니라 눈(雪)이었다. 상실의 슬픔과 허무의 자구책으로, 카메라를 손에 쥐면 좋아하던 무언가라도 찍으려 움직이지 않겠냐는 절실함이었다. 나고 자란 도시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눈은 동경의 대상이었고, 산은 동경을 마주할 수 있는 장소였다.  


카메라를 메고 산길을 걸으며 좌충우돌과 우여곡절이 쌓이는 동안, 이곳과 저곳을 걷는 것이 목표가 되고 경쟁이 되었다. 나는 내 안의 보이지 않는 대상과 다투고 겨루고 있었다. 걸으며 두리번거리는 재미는 목표한 길을 제때 걷지 못한 자신을 타박하며 희미해졌다. 가장 큰 패배감은 나에게서 왔다. 걸음을 주저하고 멈췄다.  


산을 보며 지나온 산을 떠올린다. 잘못 디딘 한걸음에 허리까지 곧장 눈 속에 파묻혔고, 눈 덮인 유순한 산을 앞에 두고 곁에 없는 그리운 이들을 떠올리며 한참 눈물을 훔쳤다. 어둠이 내려앉은 산길에서 귀신을 무서워할 틈도 없다며 나를 추슬러 일으켜 세우고, 다시는 오지 않겠다며 다시 찾은 산에서 결심하고도 다시금 걸음했다. 목표가 사라진 시간에 여유가 깃들고, 잊고 있던 걸음의 기억이 하나둘 떠오른다.  


남기지 않으면 휘발되는 기억을 남겨두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실랑이를 벌이는 동안 시간은 속절없이 흐른다. 소용을 찾지 못한 마뜩잖은 활자들을 늘어놓으며, 홀로 분주한 산행을 가득 채우던 산정과 산에서 지고 뜨는 해와 달을 보는 경이와 함박웃음으로 행운과 응원을 건네며 스쳐간 낯선 이들을 기억해낸다.  


낯선 이의 손에 들린 내 카메라를 바라보기란 어색하기만 했는데, 남겨진 사진의 나는 어느 때보다 밝게 웃고 있다. 남겨진 기억이 기억되고, 그 기억으로 다시금 내디딘다. 한 걸음씩, 한 글자씩. 



가을빛이 깃들기 시작한 설악의 곳곳. 보고 느끼는 만큼을 담기에는 늘 부족하다.
추위가 오기 전 산짐승들이 분주하다. 잠시 들렀다 갈 뿐인 사람들은 부디 소리도 흔적도 없이.
이번에도 부지런히 주웠다. 무게가 줄 수 없었던 이유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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