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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h y May 30. 2024

지금, 이곳 지리산에 들다

한신계곡을 올라 세석평전에서 천왕봉을 거쳐 중산리까지 걷다

백무동을 출발해 세석대피소를 향한다. 밤을 달린 몇 대의 버스가 실어 나른 인파는 대체로 장터목대피소를 향했지만, 한적한 길에도 여럿이 앞서고 뒤따른다. 한낮의 기온은 여름 같아도, 물을 머금지 않은 공기가 걸음을 가볍게 하는 계절에는 가는 곳마다 번잡하고 소란하다.  


백무동에서 세석대피소로 향하는 길은 한신계곡을 지난다. 한신계곡은 깊고 넓은 계곡 혹은 한여름에도 한기를 느끼게 하는 계곡이라는 뜻이다. 계곡의 물이 차고 험해 굽이치는 곳이 많아 한산해서 붙은 이름이라고도 하고, 농악대를 이끌고 세석으로 가다 급류에 휩쓸려 죽은 한신이라는 이의 이름을 딴 것이라고도 한다. 같은 길에서 맞은 죽음을 생각하니, 동이 트기 전 새벽 공기가 공연히 스산하다.  


많은 땅이 크고 낮은 산으로 이루어진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에게 산은 예부터 신성한 장소였다. 산에 들어 기도를 올렸고, 자신을 겸허하게 돌아보고 나아갈 삶을 고민했다. 그래서 산을 '오른다(登山, 등산)'고 하지 않고, '산에 든다(入山, 입산)'고 했다. 육당 최남선은 『백두산근참기(白頭山覲參記)』를 남겼는데, '근참'은 높은 사람이나 존경하는 사람을 찾아뵙고 인사드리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의 대소변을 받아 나올 그릇을 챙길 정도로 행여 신성한 산을 더럽힐까 조심하고 큰 소리로 지껄이지 않으며(최남선, <조선의 산수>) 겸허하고 엄숙한 마음으로 산을 대했다.


산은 사람이 죽어 돌아가는 곳이기도 했다. 죽은 이들을 묻은 곳을 '산소(山所)'라고 불렀다.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하고 걸음과 말소리를 조심하며 들고(入山) 내려오던(下山) 산은, 언젠가부터 올라타서 찍고 정복하고 인증하는 대상이 되었다.  


아침을 향하는 어둠의 무게는 가볍다. 기척을 내던 숲과 계곡은 검푸른 빛을 내며 모습을 드러낸다. 부지런한 봄의 해는 일찍부터 산을 깨우고, 이름 모를 산새들의 소리가 숲으로 쏟아진다. 겨우내 한산했던 나뭇가지에는 연두색 잎사귀가 벌써 빼곡하다. 산길에 내린 나무의 그림자는 봄바람에 가만가만 흔들린다. 이내 밝아진 길에서 한겨울 동틀 무렵 걸음이 닿은 자리까지는 아직 한참이다. 몇 번을 걸어도 계절마다 길은 새롭다.  


한신계곡의 격렬한 수류(水流)는 가파른 길을 따라 오르는 동안 잦아들고 가늘어지다 세석평전 인근에 이르러 모습을 감춘다. '잔돌밭'이라는 뜻의 세석평전(細石坪田)은 지리산 주능선의 영신봉과 촛대봉 사이에 펼쳐진 평원이다. 남한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수십만 평의 평탄한 땅에 자리 잡은 크고 작은 나무와 풀과 꽃은 아침 햇살을 머금고 간들거린다.



세석평전은 수난의 역사를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1967년 지리산은 우리나라 제1호 국립공원이 되었음에도, 불법 도벌꾼들은 지리산의 나무들을 무분별하게 베어갔다. 낮은 지대는 물론이고, 높은 지대의 완만한 곳, 심지어 1,800m 높이의 제석봉도 예외는 아니었다. 불법 벌목의 시대 이후에는 사람들이 산으로 몰렸다. 주요 봉우리, 주능선, 물가, 평평한 곳이면 가리지 않고 취사하고 텐트를 치고 야영했다. 세석평전의 나무와 풀들은 잘려 나갔고 땅은 파헤쳐졌다. 여기에 더해 벙커와 참호 같은 군사시설까지 설치됐다. 인간의 이기(利己)로 생태계는 무참하게 파괴됐다.   


1995년 환경부와 국립공원공단은 복원 사업을 시작한다. 취사와 야영은 물론, 정해진 길이 아닌 곳에는 사람의 출입이 일절 금지됐고, 군사시설은 철거됐다. 이미 크게 훼손된 데다 집중 호우에 의한 토사 유실이 심해져 자연적으로 복원되기 어려운 상태였던 세석평전 일대의 복원 사업은 식생 기반 안정, 탐방로 정비, 식생 복원의 3단계 과정으로 진행됐다. 2023년에는 일부 남아있던 나대지에 매립된 야영객 쓰레기를 파내고 지형을 복원하고, 주변에 자생하는 수목을 이식하거나 채집된 종자가 자체 증식한 지리산 자생종을 식재 및 파종했다. 지구상 한반도 남부에서만 자생하는 구상나무도 포함됐다.


무분별한 야영으로 훼손된 지리산 세석평전과 훼손지복원사업 시행 전 모습 / 출처:국립공원 역사 아카이브


잎이 성게 가시처럼 생겼다고 해서 제주도 방언으로 성게를 뜻하는 '쿠살'과 나무를 뜻하는 '낭'을 합한 '쿠살낭'으로 불리다 구상나무라는 이름이 생겼다고 전해진다. 구상나무는 주로 해발고도 1,500m가 넘는 아고산대에서 자라는데, 기후변화로 곳곳에서 대량 고사가 확인되고 있다. 국제자연보전연맹(IUCN)의 국제멸종위기 적색목록(레드리스트)에 '절멸 가능성이 매우 높은 종'인 'EN'(Endangered) 등급으로 분류되어 있지만, 환경부의 멸종위기 야생생물 목록 개정안(2022)에는 포함되지 않았다.  


국립공원연구원의 '2022 기후변화 생태계 모니터링 보고서'에 따르면 지리산에 자생 중인 상록침엽수 총 76만 그루 중 고사목은 9.2%에 달했다. 산길을 걷는 동안 애쓰지 않아도 '나무 무덤'들은 곧잘 눈에 든다. 세석평전 일대는 지리산에서 구상나무 군락이 그나마 건강하게 유지되는 곳이다. 푸른 구상나무 사이로 기지개를 켜던 철쭉은 때아닌 눈에 냉해를 입어 시들었고, 뒤늦게 움튼 꽃과 잎만 겨우 살아남았다.

 

"그러면 힘들어서 못 써." 세석갈림길에서 스친 50~60대 산객 서넛은 배낭 낮게 매달려 내 다리 주변을 건들대던 쓰레기 주머니가 제 것처럼 속상하다. 촛대봉을 향하는 나의 오름길에 그들이 내려오며 다시 마주쳤는데, 그사이 높이 고쳐 단 주머니를 흡족한 듯 바라보다 이렇다 할 신통한 묘안이 더는 떠오르지 않았는지 아쉽게 발걸음을 옮긴다. 간섭은 부당하지만, 관심은 감사하다. 둘의 경계는 종종 미묘해서, 그때그때의 마음이 거취를 정할 뿐이다.


천왕봉을 앞두고 돌아본 산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따라 저 멀리 노고단 너머까지 달린다. 한나절 흐리고 비와 우박이 내리던 어느 가을날, 노고단 고개부터 세석대피소까지 함께 길을 걷던 어르신들은 종종 멈춰 뒤를 돌아봤다. 지나온 길을 굽어보고 다시금 앞으로 나아갔다. 산에서도, 삶에서도, 멈춤과 반추(反芻)는 놓치고 지나친 소중한 것들을 불러일으킨다. 나의 욕심을 멈춰야 마음과 주변에 평온이 깃들고, 인간의 욕심을 멈춰야 자연이 산다. 서야 할 때 서지 못하면 크게 탈이 나고, 한번 잃은 것을 되찾기란 무척 어렵다. 소중한 것일수록 더욱 그렇다.  


철없던 그날의 나는 약이 잔뜩 올라있었다. 지리산에 몸을 두고, 가지 못한 다른 산으로 마음이 떠돌았다. 어르신들과 멈추고 돌아서며, 그제야 지금 이곳에 머무는 법부터 배워나갔다.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워진다는 산에서 길 위의 모든 존재가 스승이다. 산만큼 깊고 넉넉했던 이들은 자신들과 헤어져 홀로 내려갈 길이 자못 걱정되어 저들이 먹으려 했던 주먹밥까지 억지로 주머니에 넣어준다. 어둠이 무겁게 깔리는 서늘한 숲을 걸으면서도 그 온기는 오래도록 가시지 않았다.




참고

1. 전북일보, [25. 우리민족에게 산이란 무엇인가] '등산' 아니라 '입산', '정복' 아니라 '합일, https://www.jjan.kr/20141016526952, 2014-10-16

2. 경남도민일보, <헐벗은 산, 개발 멈추니 자연이 돌아왔다> https://www.idomin.com/news/articleView.html?idxno=773586, 2021-09-28

3. 뉴스경남, <지리산 세석평전 훼손지, 자연숲으로 복원>, https://www.newsgn.com/news/articleView.html?idxno=344478, 2023-11-30

4. 국립공원 역사 아카이브, 지리산 50년사 | 다시 살아나는 민족의 영산, 생명의 산, https://www.knps.or.kr/history/exhibition/view?eidx=322

5. 국립공원 역사 아카이브, 지리산 세석평전 훼손지복원사업 시행 전 모습, https://www.knps.or.kr/history/item/view?iidx=9625

6. 국립공원 역사 아카이브, 무분별한 야영으로 훼손된 지리산 세석평전 모습, https://www.knps.or.kr/history/item/view?iidx=8420, https://www.knps.or.kr/history/item/view?iidx=8976

7. 한겨레, <멸종위기 구상나무, 씨앗부터 묘목까지 ‘애지중지’>, https://www.hani.co.kr/arti/society/environment/1121566.html, 2023-12-24

8. 뉴스펭귄, <멸종위기종 개정 미포함 구상나무, 지리산서 집단고사 중>, https://www.newspenguin.com/news/articleView.html?idxno=12265, 2022-08-25

9. 한겨레, <집단으로 말라죽고 있는 구상나무, 왜 ‘멸종위기종’ 아닐까?>, https://www.hani.co.kr/arti/society/environment/1056288.html, 2022-08-26  


[지리산국립공원 크루(Crew) 활동 기록]

자기 쓰레기만 되가져 가도 좋으련만
높이 고쳐 다니 한결 편하다. 오늘도 할 수 있는 만큼 주웠다


지리산국립공원 크루(Crew)는 지리산국립공원에서 자발적으로 플라스틱 일회용품 미사용, 쓰레기 줍기(플로깅/줍깅), LNT(Leave No Trace, 흔적 남기지 않기), 천천히 걷는 산행이나 캠핑 후 기록하고 알리는 활동을 한다. 장터목대피소 취사장에서 포스터를 보고 지원했다. 처음 모집한 크루 활동은 10월까지다.


늘 염두에 두고 실천하려 노력해 온 것들이지만, 다녀와서 방치하는 일이 빈번해진 사진을 부지런히 정리하고 부족한 글을 덧붙여 지리산을 더욱 살피고 알리고 함께 지키는 데 도움이 되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다. 깊고 큰 산에는 나고 자라는 생명이 셀 수 없고 삶과 사람이 지나온 역사가 길고 깊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지천이다. 크루 활동 이후에도 글과 사진을 이어 나가겠다는 야심에 찬 바람도 잠시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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