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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h y Jun 18. 2024

지리산 연하(烟霞)를 사랑한 사람들

중산리로 들어 천왕봉을 지나 벽소령을 거쳐 노고단 고개로 내려오다

중산리로 들어 천왕봉을 향한다. 중산리에서 법계사를 거쳐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길은 높은 곳을 향하는 가장 숨 가쁜 길이고, 낮은 곳을 향하는 가장 가파른 경사다. 무르익은 초록으로 하늘을 메운 나무 사이로 줄곧 한 방향을 오르다 보면 해발고도 1,400m 정도에 이르러서야 시야가 트인다. 그즈음에 법계사가 있다. 하지로 향하는 해는 습기를 머금은 두꺼운 구름 뒤로 저만치 떠서 주변이 이미 환하다.   


밤새 가라앉았던 구름이 바람을 따라 파도처럼 밀려가고 온다. 어느 방향으로나 산을 따라 산이 이어지는 지리산의 아득한 산등성이는 구름 사이로 드문드문 모습을 드러내고, 천왕봉에서의 시선은 가장 가까운 중봉에도 간신히 닿는다. 힘겹게 오른 봉우리에서 잠시 설 자리를 찾지 못하고 왁자한 인파에 산골짜기를 바삐 오가는 구름보다 먼저 장터목대피소까지 떠밀려간다.  


세석대피소를 향하는 길로 접어들어서야 소란은 잠시 잦아든다. 길의 높고 낮음이 이전만큼 크지 않고, 발을 디딘 땅의 고도는 쉬이 잊힌다. 기암괴석과 고른 땅 사이로 기후변화에 내몰린 아고산대의 키 작은 나무들이 명맥을 이어가고, 냉해에 살아남은 철쭉이 드문드문 폈다. 이윽고 연하봉에 이른다.  


안개(烟, 연)와 노을(霞, 하)을 아우르는 '연하(烟霞)'는 고요한 산수의 경치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연하봉에는 비교적 최근까지 이름이 없었다. 지금의 이름은 '연하(烟霞)'에 벗을 뜻하는 '반(伴)'을 붙인 '구례 연하반'에서 왔다.  


구례 연하반은 1955년 구례중학교 교사 우종수를 비롯한 교직원과 구례군민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지리산 권역 최초의 산악회다. 구례 연하반은 '조국강산의 황폐로 인하여 마음 둘 곳 없는 정신적 실향민이 되어가고 있음을 자각하고 통탄'하며, '푸른 고향을 다시 찾으려는 자연애호운동의 선구자'가 되어 '금수강산을 이룩하는 데 기여'하고자 한다고 취지문에서 밝혔다.  


당시 우리나라 산들은 일제강점기와 해방, 한국전쟁, 군사정권을 거치며 도벌과 남벌로 황폐해졌다. <지리산국립공원 창설운동사>(우종수)에서는 산지 대부분 나무하나 없는 벌거숭이 민둥산으로 변모했다고 기록한다. 당시에도 전체 산림 축적량의 22%를 차지하는 산림의 보고였던 지리산에는 저지대부터 고지대까지 예외 없이 마수가 뻗쳤고, 해발고도 1,700m의 장터목 고산지대에 군용차 엔진을 떼어다가 큰 톱날을 걸어 불법 제재소를 차려 벌목했다고 전한다.  


"지리산 생태계의 자연을 영구히 보전할 수 있는 길은, 선진국 전례로 미루어보아 지리산을 국립공원으로 지정받아 정부 책임하에 관리 수호하는 것이다." 불법 도벌과 산림훼손의 현장을 목도하고도 속수무책이었던 구례 연하반에 국립공원 전문학자 김헌규 박사는 조언한다.  


구례 연하반 사람들은 구례군민을 설득하고 '지리산국립공원 추진위원회'를 꾸린다. 관련 부처를 찾아가 호소하는데, 경비는 구례군 1만 2천 가구 중 극빈층 2천 가구를 제외한 1만 가구 회원이 자진 갹출해 마련했다. 구례군민과 구례 연하반 사람들이 지리산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하기 위한 운동을 시작하고 5년의 노력 끝에 67년 3월 국립공원법이 제정되고, 같은 해 12월 29일 지리산국립공원이 지정된다. 


(좌) '지리 산악회'의 전신 '구례 연하반'(1968), (우) 구례군민의 '국립공원추진위원회' 결성(1964.03) / 출처:국립공원 역사 아카이브

지리산을 아끼고 사랑했던 이들의 이름은 연하봉에서 10km 넘게 떨어진 곳에 있는 대피소에도 붙었다. 해가 막 들기 시작한 이른 아침에도 화엄사에서 쉬지 않고 뛰어온 이들로 연하천대피소는 부산하다. 수통을 채운 이들의 여정은 천왕봉을 지나 대원사까지 계획되어 있다.  


종주(縱走)의 사전적 의미는 '능선을 따라 산을 걸어, 많은 산봉우리를 넘어가는 일'이다. 특정 능선과 산봉우리만을 걷는 일을 칭하는 것이 아님에도, 지리산에서의 종주는 성삼재 위 노고단 고개에서 천왕봉으로 이어지는 주 능선을 걷는 일이나, 양쪽으로 더 길게 화엄사를 시작으로 천왕봉에서 중봉을 거쳐 대원사로 내려가는 것으로 이해되는 일이 잦다. 날이 더워지거나 추워지기 전까지 많은 이들이 길게는 40km가 넘는 거리를 하루 안에 뛴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주말마다 앞만 보고 뛰는 인파가 부쩍 눈에 많이 든다.   


테이블에 마주 앉은 이의 손바닥만 한 가방이 안쓰럽다. 몇 안 될 쓰레기를 달라고 했더니 제 몫이라며 야무지게 챙겨 자리를 뜬다. 다음에 앉은 둘은 한주먹이 못 되는 쓰레기를 그저 주지 않고 작은 떡 조각과 사탕을 함께 쥐여 준다. 종일 뛰고 걸으며 먹을거리에 손사래를 쳐도 그럴 수는 없단다.  


산길에 버려진 각종 에너지 사탕과 간식 봉지, 페트병은 대체로 능선을 뛰는 무리의 행각이라는 심증과 증언이 있었으나, 일부의 행동으로 전체를 재단하려 했던 짧은 시선을 거둔다. 화개재를 넘어 반야봉으로 향하는 동안 몰려오는 비구름을 보며, 목표한 지점의 끝에 닿든 중간에 그치게 되든 그들의 무탈과 건승을 빌었다.


첫날 아침 중산리부터 법계사에 조금 못 미치는 곳까지 오르며 페트병만 20개 넘게 주웠다. 하루 묵어간 벽소령대피소에서 다른 이는 안중에 없이 저들만 흥에 겨워 시끄러운 패거리를 피할 곳이 마땅치 않다. 패거리가 점거한 취사장 입구에 키만큼 쌓여가는 종이컵, 그릇, 수저 등 각종 일회용품 쓰레기에 절망했고, 이들이 이틀간 ‘교육’을 목적으로 주 능선 종주를 하고 있는 학부모, 교사, 학생 수십 명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더욱 절망했다.  


여럿이 쓰는 대피소 출입구는 그들이 하룻밤 제 몸의 편의를 위해 벗어 던진 수십 켤레의 일회용 슬리퍼와 눈앞의 사물함을 두고도 바닥에 널브려 놓은 등산화로 뒤엉켰다. 이튿날 패거리는 다시금 새벽부터 취사장을 제집처럼 차지했다. 무리를 앞세운 무례와 위협에 개인은 무력하다.  


화가 난 걸음은 거칠고, 절망한 마음은 한참 멀고 지저분한 곳에서 뒹군다. 그 사이 저 멀리 천왕봉 뒤로 해가 떠오르고, 반대편으로 달이 점점 멀어진다. 길 한가운데서 해와 달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아침은 호사롭고, 너그러운 산은 발이 닿은 지금으로 눈과 마음을 불러들인다.   


종주가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는 76세 여성 산객은 함께 온 아우 둘보다 한참 앞섰다. 산길의 쓰레기를 볼 때마다 속이 탄다는 그의 손에 들린 작은 봉투는 이미 가득 찼다. 접은 모양도 살뜰하다는 멋쩍은 칭찬을 화사한 웃음과 건네며, 나눠준 봉투를 펼쳐 어깨끈 근처에 묶고 총총걸음으로 법계사를 내려간다.  


구름을 탄 듯 길을 오르던 남성 산객의 손에 들린, 철사로 만든 고리를 끝에 단 독특한 나무 지팡이가 예사롭지 않다. 단출한 배낭 안에서 새로운 쓰레기봉투를 꺼내 매어주곤 굵은 검정 펜으로 '자원봉사'라는 글귀와 자신의 이름을 적는다. 대피소나 탐방센터에 가져다주라는 그는 자주 이 길을 오가며 쓰레기를 줍고 종종 못난 사람들에 호통치는 듯했다. 천왕봉을 벌써 오르고 내려오며 그간 주운 페트병 한가득을 대신 가져간다. 오르는 길에 마주친 두 산객은 오를 때 짐이 될 쓰레기를 줍는 게 아니라고 했지만, 눈에 보이는 흉한 것을 그냥 두지 못하는 마음은 매한가지다.  


산은 늘 그곳에 있지 않았다. 당연한 것이 없는 세상에, 당연한 것들조차 지키지 않는 이들은 힘겹게 아끼고 지켜온 역사를 알 리 만무하고, 지리산 연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애만 닳는다. 그럼에도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할 수 있는 것들을 행하는 '연하반'들의 걸음걸음에 오늘도 산은 간신히 그곳에 있다. 



참고

1. 문동규, 박찬모 편저, 우두성 감수, 『지리산과 구례연하반』, 태학사, 2017년 초판 1쇄 중 아래 참고    

- 우두성, <지리산국립공원 창설운동사>, 『구례군지(상), 1995년, p. 87-97

- 연하반, <연하반(烟霞伴) 반지(伴旨)>, 연하반 제1호 회보, 1956년, p. 191-192

<지리산국립공원 창설운동사>와 <연하반 반지문>은 지리산생태탐방원 페이스북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https://fb.watch/sM7dwaOg30/ 

2. 국립공원 역사 아카이브, 대한민국 제1호 지리산 국립공원의 탄생, https://www.knps.or.kr/history/exhibition/view?eidx=281  

3. 국립공원 역사 아카이브, <지리산> 대한민국 제1호 국립공원, https://www.knps.or.kr/history/exhibition/view?eidx=101 

4. (사진) 지리산 권역 최초 산악모임 구례연하반 모습, 1964, 우두성, https://www.knps.or.kr/history/item/view?iidx=12230

5. (사진) '국립공원추진위원회' 발족식, 1964, https://www.knps.or.kr/history/item/view?iidx=9546


[지리산국립공원 크루(Crew) 활동 기록]

여정을 시작하는 첫날, 길의 초입에서 이미 봉투 하나가 차고 넘친다. 중산리에서 법계사 인근까지 보이는 곳곳에 버려진 페트병만 벌써 20개다. 페트병을 따로 가득 담은 봉투는 산객 한 분이 대신 가지고 내려갔다. 벽소령대피소에 도착했을 때 페트병으로 봉투 절반, 그 외 각종 쓰레기로 봉투 하나를 채웠다.

페트병이 가득 찬 봉투 하나(첫번째 사진)는 산객이 가지고 내려갔다. 이후 주운 것도 봉투 하나를 넉넉하게 채운다

이튿날, 페트병을 담던 봉투에는 페트병만 모으고, 새로운 봉투에 꺼내 쓰레기를 한가득 채웠다. 지리산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이 역시 보이지 않게 활동하는 지리산의 '연하반'들 덕분이라 생각된다), 산악회 리본도 몇 있었다. 

이튿날 화개재에서 쓰레기 중간 정산, 노고단대피소 앞에서는 비바람 때문에 화개재부터 주운 쓰레기만 두고 기록

국립공원  산악회나 개인의 등산리본 설치는 허용되지 않는다. 등산리본을 설치하는 행위는 쓰레기 투기 및 자연생태계와 자연경관의 보전관리에 현저한 장애가 되는 행위에 해당해 과태료 처분의 대상이 된다(자연공원법 27조 1항 11호, 29조 1항, 86조 1항 6호, 86조 3항 및 같은 법 시행령 26조 7호). 


바닥에 놓은 종이 이정표도 마찬가지다. 찢어져 흩날리는 이정표를 몇 번 수거한 적 있다. 특히 국립공원에는 이정표와 안전 표식이 곳곳에 잘 되어 있고 스마트폰 GPS의 손쉬운 사용까지 고려하면, 플라스틱이든 종이든 소재와 형태에 무관하게 개별의 편의만을 위한 것이라고 밖에 볼 수 없다. 


길을 잃기 쉬운 곳에서 타인의 안전을 위한 부득이한 것이 아니라면, 자연을 찾은 손님(客)인 사람은 자신이 오고 간 흔적을 소리로도 남기지 않고 조용히 사진으로 기억을 남기는 것으로 족하다. 1992년 3월호 월간<山>에 실린 이충호 씨의 글을 인용한다.  


‘이기심과 명예욕에 사로잡힌 주인이 단 등산리본은 아름다운 문구에도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지만, 뒤따르는 등산객에게 빛과 소금이 되고자 하는 주인이 단 리본은 반가움은 물론 용기까지 불러일으켜 준다. 무분별하게 단 등산리본은 다른 사람의 산행을 단조롭게 하고, 산을 더럽히므로 사라져야 한다. 저 머메리가 야단치기 전에.’   


참고  인용 출처

월간산, [등산리본특집] 등산리본 1호는 1963년 지리산...국립공원내엔 리본 걸면 안 돼, 2022년 4월 7일, https://san.chosun.com/news/articleView.html?idxno=156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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