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공간을 기본적인 요소로 나눈다면 어떻게 분류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우리가 어릴 때부터 외우려 노력해온, 그리고 이제는 익숙하게 사용하는 '주소'에서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주소의가장 마지막에 위치한 숫자의 조합은 거주하고 있는 집을, OO로는 도시를 구획하는 역할을 하는 길을, 그리고 가장 앞의 OO동은 도시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행정적 단위이자 자신이 살고 있는동네, 즉 터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지금부터 리뷰하고자 하는 〈공간으로 세상 읽기: 집·터·길의 인문사회학> 역시 공간을 읽기 위한 방법으로 집, 터, 길의 세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본 리뷰에서는 책의 흐름과 같이 집, 터, 그리고 길의 순서로 독서의 과정에서 떠오른 단상과 개인적 경험을공유해보고자 한다.본 서평은 2022년 1학기에 수강했던 [공간의 문화사회학] 과제를 토대로 작성되었음을 밝힌다.
집: 존재의 근원에서 자산 축적의 수단이 되기까지
소설이나 가사에서 집은 으레 돌아갈 곳, 즉 무언가 따뜻하고 편히 쉴 수 있는 유, 무형의 장소로 비유되곤 한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집이란 누구나 하나쯤 가지고 살아가는 장소, 그리고 이왕이면 더 좋은 곳이었으면 하고 바라는 장소에 해당한다. 하지만 책에서는 '집'이 있어 사람인 것이 먼옛날로부터의 일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신석기문명이 발전하고 농경시대가 시작한 뒤에서야 '정착'의성격을 가지게 되었으며, 18세기 이후로는 가족주의적이고 방어적인 용도를 지니기 시작했다. 주택이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주거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적 접근이 시도된 것 역시 같은 때의 일이다. 이 시기부터 주택에 대한 '소유'의 욕망이 커지기 시작했으며, 바슐라르와 하이데거가 주장하는 '자아의 공간’으로서의 집의 의미는 약화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 상실의 문제는 한국에서 더욱 심각하다.
고시원과 청년들의 주거사회학에 대해 다룬 <자기만의 방 : 고시원으로 보는 청년 세대와 주거의 사회학, 정민우〉에서 저자는 한국의 '집'은 실존적 차원보다 특정한 물리적 공간과 이 공간을 공유하는 사회적 관계라는 측면이 강하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이것을 '규범적 집'이라 정의하면서 한국에서의 집은[아파트-자가소유-정상가족]의 구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애써 부정하고 싶지만 한국의 집은 확실히 '규범적 집'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국가가 주도하는 주택정책에 의해 보급되는 집은 대부분 아파트의 형태를 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보급하기 위한 평가 조건역시 신혼부부와 다자녀가구에게 가산점을 주는 등, '정상가족'에 유리하게 설정되어 있다. 실존적 차원에서의 의미상실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국가는 더 많은 사람들이 [가족-이성애-재생산]의 제도에 합류하게 만들기 위해 공포, 불안, 강박을 조장하고 사람들은 더욱더 '집'의 소유를 욕망하게 된다. 그리고그 결과 우리는 자아의 안정적인 거주지로서의 '집'을 상실하게 되었다.
'실존'의 공간으로서의 집, 방의 상실은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도 영향을 미친 듯싶다. 우리는 잃어버린 ‘자아’를 어디에서 찾고 있는 걸까? 필자는 현대인들이 자아를 소유한 사물, 그중에서도 스마트폰에의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에는 자아의 형성과 기록이 집에서 이루어졌다. 텔레비전 앞에 둘러앉아 대화를 나누고, 친구와 함께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며 놀이를 했으며, 저녁 즈음에는 책상에 앉아 하루를 되돌아보는 일기를 적었다. 하지만 오늘날, 과거의 집과 방에서 이루어졌던 대부분의 행동은 스마트폰에 의해 대체되거나 축소되었다. 책상에 앉아 서랍을 뒤적이며 편지를 적는 일은 SNS로 메시지를보내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방에 앉아 하는 일 없이 멍을 때리고, '나'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던시간도 아주 잠깐 이어지다 이내 재미있는 유튜브 영상을 시청하는 것으로 마무리되고 있다. 또 가족모두가 개인 스마트폰을 가지게 되면서, 텔레비전 앞에 둘러앉을 시간 역시 줄어들었다. 집에는 여전히추억이 묻은 가구가 존재하지만 이제는 함께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추억만이 갈수록 더 희미해지고 새로 쌓이는 기억은 옅다. 그리고 그 결과 자아는 스마트폰을 향하게 된다.
비슷한 주장이 책에서도 등장하는데, 저자는 집이 사라지는 요인 중 하나로 ‘스마트홈 담론'을 들며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신세계'를 떠올리게 만든다 이야기한다. 스마트폰이 제공하는 환경은 확실히 '멋진신세계'의 세계관과 닮아있는 듯하다. 원하는 것이 즉각적으로 제공되며, 더 재미있고 자극적인 것을 원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런 환경에서는 진정한 존재자로서의 자아를 가지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나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고, 타인과 소통할 기회가 열려 있는 공간, 그런 공간에서야말로 진정한 자아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를 위해선 기존에 집이 가지던 의미의 회복 혹은 의미를 이어받을 새로운 장소(제2의 집)의 탄생이 필요하며, 우리 역시도 그 가능성을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