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의미하는 한자로는 도(道)와 로(路)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는 생각하는 사람이 서서히 간다, 발로 각각(各各) 걸어 다니는 곳의 의미를 갖는다. 그렇다면 지금의 길 역시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책의 내용에 따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여전히 전통적 의미에서의 길이 존재하고 있지만 이와 완전히 반대되는 속성의 길 역시 대폭 늘어났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반대 속성의 길에 가까운 개념인 '교통’에 ‘길’의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수도 있겠다.
'OO동에 KTX를 놔드리겠습니다.'
선거철이 다가오면 동네에서 어김없이 보이는 문구 중 하나이다. 선거에 출마한 후보들은 하나같이 교통 인프라의 개선을 외치고, 주민들은 이에 환호한다. 그리고 어떤 후보가 지역에 더 많은 이익을 가져다줄지를 셈해 표를 던지게 되는데, 여기에서 오늘날 ‘길’이 가지는 의미를 엿볼 수 있다. 전통적 길이 장소와 장소를 연결하고 공간을 열어주었다는 데에서 의의를 지녔다면, 현대적 길에 해당하는 교통은 여기에서 나아가 '속도'의 영역을 개척하고, '권력'을 위한 장치로 작동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지닌다. 천천히, 생각하며 다니던 철학적 차원에서의 길은 이제 빠르게 이동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다. 길을 걷는 과정에서 찾을 수 있었던 열린 대화의 가능성은 길이 철도 > 지하철 > 자동차를 거쳐 '교통수단'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익명성으로 대체되었다.
책에서 인용한 어리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철도에 의한 접근성 향상과 여행에 관련된 시각적 관광경험의 발달은 특정 장소의 고유한 분위기 혹은 아우라를 거세하기 시작했다. 철도는 지역의 독특한 장소성을 사고파는 상품으로 변형시키면서, 장소를 이동과 순환 시스템에 편입시켰다.’ 오늘날, 여러 지자체가 고속철도를 유치하려 노력하고, '관광지 개발'을 통해 그 인근의 풍경을 의도적으로 변화시키고 있는 것을 생각해보면 어리의 생각은 지금에 와서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듯싶다.
도로와 인접한 곳은 매우 빠르게 발달하며, 그 과정에서 프랜차이즈와 같은 '도시'의 모습을 흡수한다. 그리고 그 결과 기존에 가지고 있던 '풍경'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때 지자체는 획일화에 대한 대안으로 교통의 중심지와 인접한 곳에 계획된(관광을 위해) 풍경을 조성하는 것을 시도한다. 하지만 이는 오히려 원래의 풍경을 해치는 결과를 낳고 있다. 풍경은 단순히 장면(scene)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의 정체성, 역사를 담은 장소에 해당하는데 그 의미를 잃게 되는 것이다. 길이 닿지 않는 곳에도 아름다운 풍경이 존재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길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게 되었을 때, 더욱 빛을 발한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최근의 흐름은 좋아하는 풍경을 유지하기 위해 '숨겨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만들어내고 있지 않나 싶다.
교통수단, 그중에서도 지하철은 이동의 기능 외에도 사회적 교환의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책에서는 이것을 '디지털 파놉티콘' 혹은 '디지털 빅브라더'의 공간이라 표현하며 지하철이 사람들을 지시하고 훈육하고 통제하고 지배한다 말한다. 너도 나도 다 예뻐질 수 있다 주장하는 강남, 논현역 일대의 빼곡한 성형외과 광고를 익숙하게 여기게 되고, 나도 모르게 ‘서울 사이버 대학을 다니고 나의 성공시대 시작됐다'를 따라 부를 수 있게 된 것을 생각하면 이는 적절한 비유였음에 틀림없다. 이러한 기능이 가장 무서운 이유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국가 혹은 사회가 원하는 것을 욕망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오늘날의 교통수단은 권력의 재생산 장치로서 작용하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점을 역이용할 수 있을 것이란 생각도 든다. 불특정 다수에게 노출되고, 공유된다는 지하철의 특징은 개인 혹은 약자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데에도 효과적일 수 있다.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장애인들의 이동권 시위가 버스가 아닌 지하철에서 주로 일어나는 것에도 이와 같은 요인이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과거에는 '길이 모이는 곳'에 위치한 '광장'이 사회 변화의 시작점으로 작용했지만 오늘날은 '길'에 해당하는 지하철 위에서 그 가능성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어쩌다 보니 앞에서 부정적인 생각만 나열하게 되었지만, 교통수단의 발달은 분명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자동차는 지하철과 달리 그 자체가 사회의 원리이자 삶의 방식으로 작동하며 이용자에게 자유와 주체성을 제공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길이 가지는 본래의 의미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플라뇌르[flâneur]가 되어보는 건 어떨까? 가끔이라도 현대적 의미의 길에서 벗어나 도시를 한가로이 누비고 관조하며 산책하자. 천천히 살피고 생각하며 걷는 행위는 실존을 고민하게 한다. 나를 둘러싼 주변 공간을 관찰하고, 나의 내면을 깊이 있게 들여다볼 수 있을 때야 비로소 우리는 자아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서평을 마치며, 도시를 만드는 권력으로서의 집, 터, 길
집, 터, 길의 세 가지 언어로 세상을 읽는 과정에서 공통으로 확인할 수 있던 것은 현재 도시의 집, 터, 그리고 길이 권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지금의 도시가 형성되기 훨씬 전부터 권력을 두고 싸워왔다. 집, 터, 길은 그 과정에서 승리를 위한 수단, 혹은 쟁취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재생산 장치로 사용되어왔으며,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따라 의미와 형태를 꾸준히 변화시켜 왔다. 그리고 그 결과로 오늘날의 도시가 탄생할 수 있었다. 권력에 대한 추구는 공간을 더 넓고(수직적으로)효율적(시간상으로)으로 활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 이와 동시에 우리의 삶과 세상을 단순하게 변화시키기도 한 것이 사실이다.
이제는 집, 터, 길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본래의 의미를 다시 돌아보아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꼭 과거의 형태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현재의 집, 터, 길이 가지는 물리적 형태의 중심부에 권력이 아닌 다른 가치를 품을 수 있는 가능성을 찾아보았으면 한다. 이 가치는 과거 '집'에 대한 의미를 새로 정립했던 가족주의, 공동체주의의 모습일 수도 있고, 아직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모습일 수도 있다. 각자가 추구하는 공간의 가치가 모여 다양성이 형성되고, 국가가 이를 존중하기 위해 노력할 때에야 진정으로 '살기 좋은’ 도시가 탄생하리라 믿는다.
당신이란 책을 제대로 읽어봐그 속엔 네가 잊었던 문장이 많아
<뮤지컬 호프 넘버, 읽히지 않은 책과 읽히지 않은 인생 中>
사람은 종종 한 권의 책으로 비유되곤 한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되돌아보는 것은 책을 읽는 것과 같다. 이 책의 제목이 공간으로 세상 '보기'가 아닌 '읽기'인 까닭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지금 당장 눈에 보이는 물리적 장면(scene)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장면이 포함된 전체적인 시나리오(scenario), 즉 인문사회적 맥락을 읽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인용된 뮤지컬 <호프>는 평생을 원고에 집착하며 살아온 주인공 ‘호프'가 78세의 노인이 되어서야 자신의 삶을 오롯이 읽어나가기 시작하며 마무리된다. 극의 주인공 호프가 자신이 잊었던 문장, 즉 과거를 읽는 행위를 통해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듯이 우리도 '인간'이 이룩해온 이야기를 다시 읽어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다음 페이지로 넘어갈 수 있다. 도시가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잠시 뒤안길로 미뤄져 있던 인간과 사회에 대한 애정과 감수성을 다시 끌어올 때, 비로소 우리는 새로운 집, 터, 길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게 될 것이며, 우리가 사는 도시 ‘공간' 안에 수많은 '장소'를 새길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