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연 Mar 18. 2022

'마당' 없는 세대, 우리는 어떤 집을 꿈꾸는가?

마을을 품은 집, 공동체를 짓다 (류현수)를 통해 보는 '함께'의 중요성

'집'만 있으면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집과 방은 개인의 취향을 담는다. 사진은 10여년을 함께한 필자의 방 한 켠의 모습.


아무리 좁은 방에 갇혀 있어도 내 마음이 우주를 담을 수 있다면 자유인이 될 수 있지만, 아무리 넓은 사방에서 지내도 내 마음이 내 옆에 누워 있는 동료 재소자도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비좁다면 가련한 영혼의 수인(囚人)으로 지내게 된다.

-류현수(2019), 마을을 품은 집, 공동체를 짓다, 153p-


한 사람의 삶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소가 있다면 어디일까?

아마 그런 장소가 있다면 그의 '집' 혹은 '방'일 것이라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집에 있을 때 편안하다고 느끼며, 그때에서야 비로소 어떤 사회적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온전한 나의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되는 듯싶다. 우리는 누구나 '집'이라는 공간을 향유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집'은 단순한 물리적 요소가 아닌 한 사람 혹은 가족의 취향이 묻은 단 하나의 장소로 탈바꿈하게 된다. 그 많고 많은 소설과 음악에서 '집'을 돌아갈 곳, 따뜻한 곳으로 빗대곤 하는 것도 이러한 특징을 반영한 것이리라.


그렇다면 돌아갈 수 있는, 혹은 편히 쉴 수 있는 '집'만 있으면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

'마을을 품은 집, 공동체를 짓다'의 저자는 위와 같은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혼자'로서의 주거가 아닌 '함께'하는 주거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소행주' 정신을 실천하다. 성미산 마을

작년 가을, 우연히 찍어두었던 성미산마을의 사진

 저자가 말하는 '소행주'란 소통이 있는 행복한 주택의 줄임말을 뜻한다.

혹자는 '소통? 함께 사는 가족 사이에서는 당연히 중요한 거 아니야?'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책에서 말하는 소통은 가족 사이를 넘어 주변에 함께 살고 있는 이웃의 범주까지 확장된 개념으로 더 넓은 범위의 소통(communicate)에 해당한다.  


 책에서는 성미산마을에 지어진 '소행주 1~6호'를 사례로 들며, 건물 조성까지의 고민과 과정 그리고 저자가 이루고자 하는 공동체 정신을 서술한다. 저자의 이력에 대해 전혀 모르는 채로 책을 집어 든 나로서는 저자가 설계한 다수의 건축물이 성미산마을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랄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이유는 휴대폰의 갤러리 구석에 자리한 두 장의 사진에서 발견할 수 있다.


 작년 가을, 햇빛이 좋다는 이유로 집에서 1시간가량 떨어진 마포구청 인근의 작은 카페에 들렀다가 산책 삼아 망원역까지 걸어갔던 기억이 있다. 다른 동네를 구경하며 돌아다니기 좋아했던 탓에 그날도 낯선 동네의 골목 여기저기를 발 닿는 대로 돌아다녔다. 그리고 위의 두 장소는 그 과정에서 찍힌 사진이다.   


 우연히 성미산 마을을 마주했을 때 들었던 생각은 '어? 서울에 이런 정감 있는 동네가 있었단 말이야?'이었다. 성미산마을에는 서울의 어딜 가나 볼 수 있는 아파트가 아닌 적절한 층고의 주택들이 다수 위치하고 있었는데, 그중 일부 건물의 1층이 개인 소유가 아닌 마을의 공유공간으로서 활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서울에 위치하면서도 아파트보다는 주택이 익숙한 곳, 어쩌면 나 역시 비슷한 조건의 동네에서 살아왔다고 볼 수 있겠지만 정작 25년간 살아온 '나의 동네'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쓰임새였다. 가끔 도시재생지원센터나 구청의 지원으로 비슷한 공간이 조성되기도 했지만, 지원이 끝난 후에도 공간을 이끌어갈 주민이 없었기 때문인지 지원이 끊김과 함께 곧 사라지는 모습을 종종 봐왔던 터에 주민들 내에서 자체적으로 유지되고, 활용되는 공간은 낯설 수밖에 없었다.


지도에도 없는 마을, 성미산마을.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성미산마을은 1993년, 성미산을 중심으로 성산동 일대 사람들이 공동육아를 꿈꾸며 자리 잡은 우리나라 최초의 공동체 마을이다. 성미산 마을 사람들은 많은 것을 공동으로 한다. 혼자보다 공동으로 하는 것에 더 익숙하다. 피를 나눈 사촌보다 더 가깝다는 '이웃사촌'이라는 말을 이곳에서는 어렵지 않게 실감할 수 있다.

-류현수(2019), 마을을 품은 집, 공동체를 짓다, 73p-


 

성미산마을은 공동육아를 꿈꾸던 이들이 모여 형성한 우리나라 최초의 공동체 마을로 저자가 소행주 운동을 시작하기 이전부터 존재해왔다고 한다. 책에서는 이와 같은 '공동체'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정주 공간이 필요하다 말하며, '작은 집, 넓은 공간'이라는 공동체 개념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건축에 필요한 공간을 적절히 계산해 집의 크기는 줄이되 공동으로 사용 가능한 공간을 늘린다. 입주자가 한 평 씩 일정 비용을 부담해 커뮤니티실을 만들고, 넓은 공간을 확보하게 되며 저자는 이를 통해 '집' 안에 '마을'을 담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책의 2장부터는 저자가 운영하는 자담건설(자연을 담은 건설)에서 성미산마을에 설계 및 조성한 소행주 주택과 기타 일반 건축물의 이야기를 풀며 위의 주장에 대한 입증을 시도한다. 그가 소행주를 조성하며 가졌던 고민은 다음과 같다.

1. 불확실성과 불신이 특징인 건축 문제를 어떻게 하면 상호 간의 신뢰를 바탕으로 믿음직하고 재미있는 작업으로 바꿀 것인가?
2. 똑같은 구조에서 성장하는 우리 아이들이 과연 집에서 공간적 창의성을 느낄 수 있을까?
3. 설계 따로, 건축 따로, 인테리어 따로, 예산 따로 등 작업이 파편화되어 서로 간 오해와 불신이 배가되는 상황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4. 건축의 갑·을·병이라는 수직적인 관계가 전문가와 참여자 간의 수평적인 관계로 품앗이나 협동조합하듯 바뀔 수는 없을까?
5. 소행주는 커뮤니티가 살아있는 지역에서만 추진해야 하지 않을까?
6. 굳이 시골이 아니어도 도심에서 함께 모여서 즐겁게 공동체 주택을 만들 수는 없을까?


  건축물을 조성하는 대부분의 경우에서 '입주자'의 설계 및 시공 참여는 굉장히 제한적이고 소극적인 편에 해당한다. 또한 조성과정 내에서도 설계와 시공, 인테리어, 예산 관리의 공정이 파편화되어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생기는 비용은 '주택 조성'을 경제적 여권이 일정 수준 이상인 사람들의 것으로 여겨지게 만든다. 위의 질문은 공동체 주택을 주거하기에 앞서, 이러한 현실에 대한 저자의 걱정을 반영하고 있는데, 그는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다음과 같은 방식을 시도했다.


1. 참여와 소통을 통해 함께 집을 만든다.

 건축주와 전문가 사이의 소통, 소행주 안에서 살아가는 거주자들 사이의 소통, 소행주 세대주와 마을 주민의 소통. 소행주는 다음의 3가지의 소통을 이야기한다. 실제 건축 과정에서 배제되었던 입주자의 의견을 적극 반영함으로써 각각의 집에는 입주자의 개성이 담길 수 있게 된다. 또 공동의 공간을 함께 꾸리는 과정에서 커뮤니티실은 함께 살아갈 이들이 공통으로 공유하고자 하는 가치관과 취향이 묻어나는 공간으로 자리하며, 그들의 의견이 반영되었기 때문에 더 자주 활용되고, 사랑받을 수 있게 된다. 마을 주민도 자유롭게 집의 경계를 오가며 이용 가능하도록 조성된 일부 1층 및 옥외 공간은 주택에서의 마을살이가 가능하게 한다.


2. 계획, 설계, 시공을 믿음직한 조정자가 담보, 총괄하는 방식으로 진행한다.

  계획부터 시공까지 모든 과정을 자담건설이 PM으로 참여하고자 했다. 예산을 줄이고, 약속한 공사기간을 유지할 수 있게 되며, 그 결과 꿈꾸는 바가 있는 사람이 여럿 모이면, 이전보다 더 적절한 비용으로 공동체 주택을 꿈꾸는 것이 가능해졌다.


 3장과 4장을 통해 살펴본 성미산 마을의 건축물들은 모두 이러한 방식을 기초로 조성되었고, 저자가 원했던 '마을살이'의 실천이 충분히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서두에서 말했듯 필자가 우연히 근처를 지나다 '성미산 마을'을 발견하고, 그 모습을 애정 어린 눈으로 담았던 기억은 오롯이 우연 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건축가와 입주자, 그리고 마을 사람들 간의 소통은 마을을 마을답게, 주택을 마을답게 만들며, 이는 그곳을 지나는 타자에게도 '공동체 주택'과 '마을'에 대한 바람을 심어주는 듯싶다.



나는 왜 아파트를 싫어했을까?


 소행주의 정신을 토대로 지어진 공동체 주택을 보고 나니 도시 연구자 선배 S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아파트키드*로 자란 선배는 현재 공동체와 커뮤니티의 활성화를 꿈꾸며 커뮤니티 디자이너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아마 그날에도 서로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하며 마을의 중요성, 그리고 아파트 위주의 재개발이 가지는 문제와 한계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파트가 싫어요.'


항상 가족들에게 혹은 어린 시절을 서울의 작은 동네에서 함께한 친구들에게 별 의문 없이 뱉던 말이었지만, 그날만은 '왜?'라는 의문이 따라붙었다. 어떤 연구자들은 현재 MZ세대를 대상으로 일고 있는 뉴트로 붐이나 골목길 위주의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을 아파트키드로 자란 세대의 특성과 연관 짓곤 한다. 하지만 아파트키드도 아니고, 거의 평생을 골목의 적벽돌 주택에서 살아온 나는 어떤 이유에서 아파트를 싫어하게 되었던가?

그날 이후로 품고 있던 의문은 이 책을 읽으면서 조금이나마 해소될 수 있었다.


*생애주기의 많은 부분을 아파트에서 보낸 베이비 붐 세대의 자녀, 통계청에 따르면 1979년에서 1992년 사이에 출생한 세대로 정의된다.


현대인들은 자신이 나고 자란 공간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평생을 유리하는 유목민의 삶을 살아간다.
...
이렇게 일정한 공간을 점유하여 머물러 사는 기간이 짧다 보니 마을을 꾸리고 공동체성을 확보할 시간과 여유가 없다. 당연히 동네의 특성과 문화는 감쪽같이 실종되어 버린다. 과거 어느 동네를 가든 흔하게 만날 수 있었던 '토박이'들은 천연기념물 혹은 일급 멸종위기종이 된 지 오래다.

-류현수(2019), 마을을 품은 집, 공동체를 짓다, 239p-



 인용된 구절에서 말하듯 현대인의 대부분은 '더 좋은 집 (이때의 집은 보통 아파트를 이야기하는 듯싶다)'을 찾아 끊임없이 방랑하며 유목민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비슷한 주장은 고시원과 주거의 사회학에 대해 다룬 '자기만의 방, 고시원으로 보는 청년 세대와 주거의 사회학(저자: 정민우)'에서도 등장하는데, 그는 서양의 집이 자아가 거주하는 실존적 차원에서의 의미가 강했던 것과 달리 현재 한국에서 집이 가지는 의미는 [아파트-자가 소유-정상가족]의 범주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 즉 부동산적 자산이자 자산 증식의 수단이 되어주는, 그리고 편안함과 안정성, 소속감을 부여해주는 가족이 있는 공간, 보통의 경우는 아파트를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저자는 이를 규범적 집이라 정의하는데, 현대인들은 이 규범적 집을 갖기 위해, 그리고 가진 후에는 그 수준을 더 높이기 위해 끊임없이 집을 옮기며 살아가 있다.


 내가 무의식 중에 '아파트'를 싫어했던 가장 큰 이유는 '유목민'이라는 표현과 닿아있는 듯싶다. 

 필자는 서울에 자리하지만 아파트가 거의 없는, 골목길이 즐비한 동네에서 살아왔다.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부터 돌았던 재개발에 대한 소문은 소문으로 끝날 것이라 여겨졌지만, 시간이 흘러 20대를 넘기자 현실이 되어 슬금슬금 동네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나의 집'은 우연히, 운이 좋게도 재개발 지역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친구의 집'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부지기수였고 그들은 유목민이 되어 마을을 떠났다. 원하던 원하지 않던 재개발이 구체적인 형상을 가지기까지의 10여 년을 지켜본 나로서는 아파트를 고운 눈으로만 바라볼 수 없게 된 것이다.


 동네에 있던 유일한 아파트에서의 어릴 적 경험 역시 아파트에 대한 거부감에 일조한다.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동네에서 거의 유일한 아파트였던 J는 대부분의 아파트가 그렇듯 내부에 놀이터가 자리해 있었다.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비며 노는 것도 즐거웠지만 놀이기구가 있어야지만 할 수 있는 놀이가 있었고, 그럴 때면 친구들과 함께 J아파트의 놀이터에 갔었다. 하지만 '입주민 아이'가 함께 하지 않을 경우에는 '다른 곳 가서 놀아라'라는 말과 함께 우리 아파트에서 퇴장해 줄 것을 요구받고는 했고, 그런 기억이 거듭되어 쌓이자 더는 그곳에서 놀지 않았던 기억이 있다. 이곳에는 최근에서야 다시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아래의 사진과 같은 팻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 여전하구나! 이렇듯 배척에 대한 최초의 기억은 아파트에서 시작된다.


몇 년 전, J 아파트에서 발견한 팻말


 물론 최근 조성된 아파트들의 경우는 과거 풍경과 조금 달라졌다. 아파트를 조성하는 조건으로 일부 부지를 동네 주민이 이용 가능한 공원으로 만들기도 하고, 아파트 내부에서의 자체적인 공동체를 형성을 목적으로 티하우스(Tea House)와 공공텃밭 등을 조성하기도 한다. 이는 마을 속에 녹아들기 위한, 그리고 자체적인 마을 공동체 형성을 위한 노력으로 비추어질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보여주기 식'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마을 사람들과 교류할 수 있는 열린 공간을 일부 마련하긴 했지만 이와 대비되게 진입부의 문주는 더욱 화려하고, 거대해지고 있다. 프리미엄 아파트라는 명목으로 아파트 내부에 '특화 설계'를 시도하고 있으며 이를 홍보의 대상으로 적극 활용한다.


아무리 열린 공간이라 할 지라도 이런 차별성이 존재하는 순간 해당 공간에 대한 외부인의 접근은 어려워진다. 공동체를 추구하는 듯싶지만 사실상 그 안에 '기존 마을 주민'은 포함되지 않으며, 아파트에 거주하게 되는 주민 역시 설계자의 생각만큼 서로 원활히 교류하지는 않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필자는 잠시 아파트(구식)에 거주했던 2년을 제외하고는 항상 외부인의 위치에 서 있었고, 여전히 아파트가 달갑지 않다.


 과거 우리의 삶에서 공유 공간의 역할을 해온 것은 마당이었으며 그 역할은 골목길로 이어진다.

그리고 아파트 역시 외부 조경과 커뮤니티실, 일부 공개공지를 통해 '마당'의 재현을 시도한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한 경험을 토대로 보았을 때, 아파트는 '마당'을 가지고 있지 않다.

 

 '자기만의 방'의 저자가 말하는 [규범적 집], 즉 자가소유의, 그리고 가족이 함께 사는 아파트는 마을 공동체를 꾸리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해당 책에서는 고시원이 규범적 집, 즉 집과 집 없음의 경계에 놓여 있다고 이야기하며, 그 사이에서 새로운 '집'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공동체 주택에도 유사하게 적용될 수 있을 것 같다. 물론 자가 소유라는 점에서는 규범적 집과 궤를 같이 하고 있지만 '정상가족'이 아닌 이들에게 열려 있으며, 부동산 가치가 1순위가 아니라는 점에서 새로운 '집'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게 된다.



소행주를 통해 확인한 우리의 미래. 'OO맨션'


학부시절부터 연을 이어온 친구들과 만날 때마다 하는 말이 있다.


'나중에 우리끼리 같이 살자!

작은 맨션 하나 지어서 함께 저녁도 먹고

각자 좋아하는 일 하며 살아보자.'


 친구들의 대부분이 비혼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보니, 아무래도 다들 사회에서 비혼인들에게 으레 말하곤 하는 '너가 평생 혼자 살 수 있을 거 같아?'에 대한 고민이 많았던 것 같다. 그리고 이런 대화와 고민의 발단이 되는 상황 이면에는 '소외되지 않을까?', '외롭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자리하고 있었으리라.


비혼인 7명의 동거 생활을 다룬 소그노의 유튜브 컨텐츠 [우리의 비혼 다이어리]

갑작스런 동거 제안, "우리 같이 살아볼래?" - YouTube


 유튜브를 통해서도 비슷한 고민을 다룬 영상을 찾아볼 수 있는데, 소그노의 [우리의 비혼 다이어리]에서는 비혼 여성 7명이 모여 7일간 살아보면서 생기는 경험과 생각을 공유하고 있다. 사실 혼자가 되는 것은 비단 비혼 가구만의 문제는 아니다. 전체 가구 중 1인 가구의 비중이 30%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혼자 사는 사람이 많아진 오늘날(물론 그것이 자의가 아닐지라도) 새로운 '집'의 가능성을 찾는 것 중요성은 더욱 커지고 있다.


 전통적 집의 개념(규범적 집)을 탈피한 새로운 주거 방식의 등장에 사회는 불안과 공포, 강박을 조장하며 이들이 '규범적 집'을 욕망하게끔 만들고 있다. 하지만, 이제 다른 방식을 찾아 나설 시간이다. 그리고 이번 글에서 리뷰한 '마을을 품은 집, 공동체를 짓다'는 이에 대한 대안이자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책이었다.



우리는 '혼자'이되  '혼자'가 아닌 집을 꿈꾼다.


각자의 공간은 점유하면서도 언제든지 문턱을 넘어 '함께'할 수 있는 집,

물리적 공간으로서의 '마당'은 없을지라도 주변 이웃들과 삶을 나눌 수 있는 공유 장소가 있는 집.


이렇게 두 가지가 충족된 '집'이라면  '우리'가 모여 마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모순적인 표현이지만 '혼자'이되 '혼자'가 아닌 집을 가지는 미래를 꿈꾸어 봐도 되지 않을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