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걷는사람 Jan 05. 2024

장서의 효용

두꺼운 책 읽기가 주는 즐거움

사기열전을 읽기 시작했다. 

두편짜리 사기열전인데 한권 조차 한손으로 들수 없을 정도로 무겁고 크다. 그냥 딱 벽돌 두개가 책상위에 있다고 보면 된다. 요즘같이 가볍고 팬시한 제목과 얇은 책이 대세인 때에 장서, 최소 600쪽 이상의 두꺼운 책은 섣불리 읽기 쉽지 않다. 보통 서점에 나온 책들이 200-250쪽 분량인걸 감안하면 이런 장서들은 일단 하드커버이거나 한손으로 들기가 어려운 책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긴 책이 아니라 충실하게 씌어진 글이 좋다. 그러나 장서는 자의로든 타의로든 일단 잡기 시작하면 효용이 적지 않다.


우선 좀처럼 끝나지 않는다.

나의 경우 이런 책은 완독하는데 보통 1달에서 많게는 몇달이고 걸린다. 하루 짧게는 일이십분, 길게는 몇시간을 볼 수 있어도 회사 다니다 보면 단기간에 끝내기가 쉽지않다. 어떤날은 빨리 읽히고 어떤날은 아무리 읽어도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그 무게와 길이에 압도되어 한 동안은 읽기를 멈추거나 다른 책을 보기도 한다. 그러기를 몇주째 반복하다 어느 순간 감동이 몰려온다. 깨달음이라기 보다는 자료수집부터 글쓰기와 탈고의 순간까지 이렇게 긴 글을 어떻게 썼을까 하는 경외심이 먼저 온다. 책이 주는 가르침에 대한 감동은 그 다음이다.    


무거워서 어디 쉽게 들고다니지 못하니 일정 장소에서 루틴하게 읽게된다.

이런 책들은 무거워서 보통 집, 책상, 사무실 등 일정한 장소에 두면서 정기적으로 읽게된다. 아주 드물지만 재밌어서 들고다니면서 읽은 적도 있었다. 그럴 때는 필히 엘보가 온다. 테니스엘보는 참을 수 있으나 책들고다니다 엘보 오면..참 그렇다. 이런건 과거 월간조선이나 신동아 월간판에 견줄만하다. 그나마 월간조선은 사진도 적절히 있고 연예인 가쉽 기사도 있어 술술 넘어간다. 그러나 정색을 하고 쓴 두꺼운 책들은 그렇지않다.


책읽는 중간중간 멍때리기가 가능하다.

책의 내용 자체도 아무거나 모은게 아니고 나름 기승전결과 스토리가 잘 갖춰져 있는 책이면 상당한 시간 동안 책의 어느 부분을 읽어도 끝날때까지 끝난게 아니기 때문에 조금 읽고 항상 멈추게 된다. 멈추고 곱씹거나 멍때리는 시간이 필요하다. 멍때리기 하는 동안 이와 연관된, 혹은 전혀 무관한 다른 생각을 하며 머리를 휴식시킬 수 있다. 때로 일주일 이상 안 읽고 쉰 적도 있다. 어느날 다시 집어도 옛친구처럼 은은하게 지난번 읽었던 구절이 떠오른다. 오래 걸릴수밖에 없기 때문에 굳이 빨리 읽으려 욕심 내지 않아도 되고, 천천히 읽어도 좋다.


책읽는 동안 한없이 겸손해 진다.

작은 책은 사람을 자만하게 만들지만, 큰책은 사람을 겸허하게 만든다. 짧은 책, 명확한 책, 쉬운 책들은. 금방 완주할 수 있는 단기 경주 같다. 사이다 같이 그순간 목마를때 집어들어 읽고 바로 끝낼 수 있다. 순간의 갈증을 해소해주고 그 순간 기분도 좋아지며 내가 다 아는것 같다. 그러나 얕은 우물에서 길어낸 물이 얼마나 깊으랴. 장서는 이런 만족감을 주지 않는다. 좀처럼 끝낼수 없기 때문에 마지막 순간까지 안다고 말하지도 못하고 뭘 읽었다고 말하기도 창피하다. 다읽고 나서도 쉽사리 완독했노라고 말하기 어렵다. 어쩌면 장서는 내가 읽고 소화할 대상이라기보다 오랜 기간 동안 나를 잡아두는 숙제인지도 모른다.


오랜시간 미지근한 물에 발을 살짝 담근듯이 책 내용이 어느새 스며든다.

저강도 독서법이랄까? 의도치 않게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책 내용이 나에게 스며든다. 장서는 그 자체로 작가가 나름의 틀과 체계를 가지고 쓴것이기 때문에 오랜 동안 그가 구상한 세계에 그가 짜놓은 순서대로 들어가 헤매야한다. 때로 독자들이 헤매는 것도 작가가 구상한 빅픽쳐의 하나인지도 모르겠다. 하루 이틀만에 끝낼수 있는 책은 그에게 들인 시간의 길이만큼 자칫 읽는이에게 자만감을 주기도 한다. 장서를 앞에 두고는 왠만하면 자만하기 어렵다. 공들여 다 읽어놓고도 내가 제대로 읽은건지 끝까지 찝찝하고 겸연쩍기도 하다.


그렇다. 장서가 노린게 그런건가보다. 

내가 어찌하지 못하는 시간과 공간으로 나를 끌어들여서 끝나는 시간 조차 내마음대로 할수 없다는것, 끝난 다음에도 뭔가 명확하지 않다는 것, 숙성의 시간이 그 책속에 담긴 내용에 깊이를 더하는 것 같다. 장서를 쓰는 작가조차 자신의 책이 장서가 될지, 미리 장서를 기획해서 쓰진 않았을 것이다. 결국, 마땅히 써야할 내용의 서사, 마땅히 있어야할 인물들의 갈등과 전개, 시대와 역사를 모아놓고 보니 길고 두꺼운 책이 된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그런 장서에는 나도 그만큼의 시간과 갈등과 노력을 들이는게 맞다.

   10쪽 안팎, 5분짜리 짤방 등 누군가의 인생이나 거대한 서사를 한달음에 요약해 알아버리고자 하는 소위 엑기스 식 리포트가 판을 치는 요즈음 가끔은 이런 책도 좋다. 마치 강물이  휘몰아치며 여기저기서 지류를 만나 또 굽이쳐 빠른 속도로 내달릴때, 강물의 바닥 저변에서 천천히 흐르는 거대한 유속을 몸소 맞이하는 느낌이다.    

  개인적으로 추천하자면 처칠의 2차대전사, 링컨 이야기, 전쟁과 무기사, 다니엘 예긴의 에너지 관련 책, 사기열전, 기드온의 스파이도 좋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