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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넝쿨 Sep 18. 2023

열혈 오타쿠가 사는 방식

오밀조밀한 공간

은정은 제 중학교 친구입니다. 제 주변에서 가장 직설적이고 솔직한 사람이지요. 본인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 얘기할 때는 울림 좋은 목청으로 우렁차게 본인의 열정을 토로하는 열혈 오타쿠입니다.


은정은 2007년부터 2011년까지 무려 4년 동안 꾸준히, 오직 저를 위해 본인이 듣고 있는 앨범과 당시 나온 신보를 소개해 주는 <옜다>라는 이름을 단 메일링 서비스를 제공해 주기도 했어요. 지금 와 생각해 보니 그때 그것을 확장하였더라면, 현재 <월간 윤종신>이나 <일간 이슬아>를 앞선 <주간 이은정>으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제 친구를 보고 있을 뻔했네요.


그렇게 음악을 열심히 듣던 은정은 사운드 디자이너가 되었습니다. 좋아하는 것을 파고 또 파는 것을 삶의 원동력으로 하는 그녀의 집을 들여다보고, 사운드 디자이너로서의 일에 대해 물어보았습니다. 화분들이 보기 좋게 푸른빛을 내며 공간 한켠을 차지하고 있는 집에서 나눈 대화를 나눕니다.




✢ Chapter 1. 일을 대하는 태도


자기소개 부탁드려요


마포구에 거주하고 있는 여성이고요. 일을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집에 칫솔 하나 더 둘 마음의 여유가 있는 여자예요. 다르게 표현하면… 남자친구가 없다는 말이죠. 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 공개구혼 사이트에 올려드려요?


그건 제가 알아서 잘해보겠습니다. 그리고 인터뷰어와는 중학교 친구예요. 제가 학교에서 잠을 안 자고 노트 필기하는 모습에 이 친구가 먼저 말을 걸었어요. 근데 뭐, 허위매물이었죠. 그거는 사실 학교에서 가만히 있으면 심심하니까 필기한 거였거든요. 하하하. 그러고 나서 대화해 보니까 서로 음악 좋아하는 게 비슷해서 친해졌어요.



소네트를 적어서 냉장고에 붙여놨네요.


작년 겨울에 영어공부 한다고 하루에 한 편씩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해설과 함께 읽었어요. 그때 해설을 보며 특히 마음이 찡했던 시인데… 나를 그렇게 사랑하고 소중하게 생각해 주는 사람을 만날 거라고 믿고 싶어서 필사하고, 잊지 않기 위해 잘 보이는 곳에 붙여둔 거예요.



✸ 마음이 찡했다. 공개구혼 사이트에 올려준다고 농담이나 던진 내가 미웠다. 친구는 이렇게까지 진심으로 상대를 기다리고 있는데...



지금 이 지역에 정착하게 된 이유가 있나요?


회사가 합정에 있어서 이곳으로 왔어요. 동네는 합정이랑 가까우면 어디든 괜찮다 생각했는데, 여기는 회사랑도 가깝고 근처에 산책하기 좋은 성미산, 홍제천, 연트럴파크가 있어요. 그리고 근방에 초중고등학교가 있어서 주변 지역에 비해 조용하다는 장점도 있고요.



룸메이트가 있으시네요! 소개 부탁드려요.


수컷 멈머 10살입니다. 저랑 살기 시작하고 첫 1년은 부모님 댁에서 함께 지냈는데 제가 그 뒤로 독립해 혼자 살면서 원룸 이사를 참 많이 다녔어요. 지금까지 크게 아픈 적도 없고 속 썩인 적도 없… 아, 있구나. 아무튼 다른 멍멍이랑도, 간식 주는 사람들과도 곧잘 지내는 사랑스러운 멍멍이예요. 아, 아들 자랑 너무 하네.



강아지 룸메이트랑 같이 사는 건 어때요?


이 룸메는 눈치가 빠릅니다… 그리고 욕심이 없고 솔직해요. 그래서 같이 살기 좋고요. 굳이 안 좋은 점을 꼽으라면 집 안에선 절대 일을 안 보기 때문에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나가야 한다는 거예요. 그래도 하루에 최소 8000보 걷는 건 좋네요. 한여름에는 땀을 너무 많이 흘려서 자동으로 살이 빠진다는 것도 좋은 점이고요. 가끔 얘가 덥다고 산책 중간에 자꾸 동네 카페에 들어가려고 해서 카페에 돈 쓰는 일이 생기기도 하는데… 같이 지내며 많이 배우기도 하고, 소중하고 행복해요. 예, 뭐, 아무튼 그렇습니다. 하하.



하는 일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저는 영상에 들어가는 소리들을 다 담당하고 있어요. 사람 목소리, bgm, 효과음 같은 모든 소리요. 그런 걸 녹음도 하고 만들기도 해요. 그리고 믹스하고 규격에 맞게 마스터링 하고 그런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근데 음악을 만드는 건 아니에요.



소리에 민감해야 하겠네요.


그래야 돼요. 이거 저거 많이 봐야 하고요. 애니메이션도 보고, 광고도 보고, 영화도 보고, 드라마도 보고, 예능도 보고. 그냥 모든 콘텐츠들을 두루두루 다 봐야 되는. 저는 이 회사 와서 더 많이 놀고 있어요. 예전엔 맨날 음악만 듣고 애니메이션만 봤는데 지금은 음악도 듣고, 게임도 하고, 영화도 보고, 드라마는 짧게 편집된 거라도 보는 식으로 확장됐거든요.



노는 게 다 업무 레퍼런스를 쌓아가는 일이라서 좋을 것 같아요. 아, 아닌가.


좋은 건지 모르겠어요.



오히려 놀 때도 스트레스받아요?


그런 건 아니에요. 근데 아무거나 보면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은 들어요. 예를 들면 사운드가 좋은 작품은 밤샘해서 봐도 괜찮은데 사운드가 빈약하면 스토리가 제 마음에 들어도 우선순위에서 밀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보고 싶다 하면 약간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보곤 하죠. ‘이게 내 취향이야. 별 수 없어’ 이러면서. 하하하.



✸ 이 말을 들은 뒤로 나는 밥먹을 때 잠깐 볼 유투브 콘텐츠를 고르는 데에도 신중해졌다.



소리에 민감해서 힘들 때도 있어요?


굳이 안 그래도 되는데 분석하려고 들 때가 있어요. 굳이 분석해서 나 자신의 재미를 내가 깎아먹을 때가 있죠.



분석하면 더 재밌지 않아요?


재미없어요. 저는 공부 중독자가 아니에요. (웃음) 아니, 놀려고 했는데 놀아지지 않으면 재미없죠. 물론 분석을 해서 즐거울 때도 있는데, 분석을 해서 찝찝해질 때가 있어요. 예를 들면, <록키 호러 픽처쇼>라는 영화를 제가 중학생 때부터 엄청 좋아했거든요.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와서 그걸 다시 보면 ‘아, 이 부분 사운드가 좀 아깝다’ 이런 식으로 신경이 거슬리는 부분들이 있어요. 근데 그렇게 분석하기 시작하면 재미가 깎여요. 그냥 ‘아, 좋아! 황홀해!’ 이렇게 보고 싶은데!



그녀는 이후 배우고 분석할 수 있어 좋았던 경험을 이야기했는데 이 내용은 너무 오타쿠의 영역이라며 그녀가 싣기를 거부했다… 오타쿠 모드로 우렁차게 사랑을 외치는 그녀의 모습은… 아무튼 즐거워 보였다.



원래부터 소리에 관심이 많았어요?


처음엔 그냥 음악을 좋아했죠. 사운드 작업에 대해서는 음악 잡지를 읽어보다가 관심을 갖게 됐어요. 제가 당시 관심 있게 파고들던 음악가의 인터뷰였는데 본인 작업에 아날로그 샘플러를 사용해 새로운 사운드를 만들었다는 이야기였어요. 저는 ‘그게 뭐지?’ 하고 찾아보기 시작했어요. 그전까지는 뮤직 프로덕션이나 사운드를 만드는 기기들에 대해서는 생각을 못 했었거든요. 음악 관련된 기술이나 장비가 발전하면서 음악이 거기에 영향을 받잖아요. 그러면서 장르가 새로 탄생하기도 하고요. 내가 좋아했던 아티스트가 이런 장비를 가지고 작업을 하기 시작하면서 음악이 이렇게 바뀌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되니 음악 듣는 것이 더 재미있어지더라고요. 장비의 발전에 따라서 대중음악 역사가 변화무쌍하게 쓰이는 걸 알게 된 후로는 무대 위 만을 보는 게 아니고 스튜디오 쪽도 보게 된 거죠.



소리라는 게 공간의 영향도 많이 받잖아요. 공간과 소리의 연관성에 대해서도 연구해요?


공기를 매질로 전달되는 소리의 퀄리티는 공간과 깊은 연관이 있어요. 소리는 그 소리가 퍼지는 공간의 부피, 자재, 모양, 공간의 어느 곳에 스피커가 배치되어 있나 등에 영향을 받고 그날의 날씨, 공간에 들어간 사람 수 등 다양한 변수가 영향을 끼치거든요. 그래서 ‘연구를 한다’가 답인데 이건 제가 업으로 하고 있는 영상음향과는 또 다른 영역으로 건축 음향이라 불러요.



요즘 특별히 관심 가지고 있는 거 있어요?


일에 관련된 것들인데 하나는 신시사이저로 사운드 디자인하는 것에 익숙해지는 것, 다른 하나는 가지고 있는 툴들 마스터하기….




✢ Chapter 2.  삶을 대하는 태도


지금 쓰고 계신 컵은 제가 중학생 때부터 봤던 것 같은데요.


이거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쓴 컵이에요. 제 애착 컵. 엄마가 싫어해요. 버리라고… 이걸 왜 버려. 잘만 쓰고 있는데. 이걸 왜 버려. 너무 좋은데.



한 물건을 오래 쓰는 스타일이에요?


그런 것 같아요.



또 오래된 물건이 있어요?


아, 라디오헤드 LP요. 이 앨범이 발매되었던 시기가 한참 mp3 불법 다운로드가 많고 음악 스트리밍 서비스에 돈 내고 음악 듣는 게 정착되기 전쯤이었거든요. 그래서 음악가들 수익이 줄어들고 불법 다운로드하지 말자고 한참 이야기 많이 나오던 때였는데 그 시기에 라디오헤드가 이 앨범을 발매한 방식이 특이했어요. 이 앨범을 제가 지금 갖고 있는 이 2CD, 2LP 구성으로도 발매하고 mp3 포맷으로도 발매를 했는데 mp3를 라디오헤드 본인들의 홈페이지에 접속해 원하는 만큼의 돈을 내고 다운로드할 수 있게 한 거예요. 이전까지는 이렇게 음악을 발매한 뮤지션이 없었고, 라디오헤드는 그 당시 탑 티어 밴드였기 때문에 이 음반을 사지 않을 이유가 없었어요. 다만 그때는 제가 너무 어려 해외 결제되는 카드가 없었기 때문에 어머니께 이 앨범을 사야 하는 이유를 대며 ‘이건 역사에 남는 음반이에요, 엄마!’하며 카드 빌려달라 설득하고 졸라야 했죠….



지금 그 앨범은 역사에 길이 남을 음반이 되었나요?


됐죠. 당연히! 그 독특한 판매 방식을 최초로 도입한 앨범이어서 기록에 남기도 했지만 음악도 정말 좋았거든요. 이 앨범은 90~00년대의 중요한 밴드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그 라디오헤드의 디스코그라피 내에서도 좋은 축에 속할 뿐만 아니라 2000년대에 발매된 얼터너티브 록 앨범 베스트에도 쉽게 찾을 수 있어요.



예전에 은정 씨 집에는 시디며 책이며 장신구며, 볼거리가 정말 많았었는데 지금은 짐이 많이 줄었어요. 한창 미니멀리즘 실천하셨었죠.


아직 해요. 근데 너무 다 버리니까, 또 괜히 버렸다 이런 게 몇 개 생기더라고요. 지금은 많이 안 사고 안 버리자로 살고 있어요. 안 버린 지 2년 째어요. 그전에는 1년에 두 번씩 버렸어요.



집을 꾸밀 때 중요하게 고려한 요소가 있어요?


나에게 이 집은 삶의 체험 현장, 생존의 공간이라 사실 꾸민다는 말은 좀 어폐가 있는데… 나만의 물건 정리 방식이 꾸밈의 영역에 해당된다면, 무조건 나한테 편해야 한다는 거? 이 공간은 내가 쉬는 곳이니까요. 너무 깔끔하게 살면 사는 사람의 캐릭터, 취향이 안 보이고 물건이 너무 많으면 청소가 힘드니까 그 사이를 지키는 게 중요해요. 물건이 취향에 맞아도 개털이 잘 붙거나 청소하기 힘들게 생겼으면 구입 안 해요. 물건 수납할 때도 동선 최소화, 멘털 에너지 소모 최소화를 고려하고요.



그렇군요. 그럼 집이 은정 씨를 잘 표현해 준다고 생각해요?


뭐, 그닥… 잘 모르겠네요. 가구나 인테리어에 돈 들이고 사는 사람이 아니어서요.



이 집에서 가장 ‘나답다’ 하는 물건이 있다면?


옷장. 약간 기울었어. 뒤판도 없어. 이사 다니면서 여기저기 까졌어. 최상의 컨디션이 아닌데도 아무튼 자기 자리에서 꿋꿋하게 자기 할 일을 하고 있어… 없으면 안 되는 소중한 친구입니다. 너 여기에 있는 거 자랑스러워해라. 잘하고 있다….



이 집에서 가장 많이 들은 노래가 있나요?


Tenshi no Yubikiri (Kare Kano OST)

Tux by U.S. Girls

SCREW FACE* by Jean Dawson



어떻게 살고 싶어요?


워낙 행동하기 전에 생각, 걱정이 많아서 판단이 늦어지면 타성에 젖어 하루하루 보내다 현타 오고 우울해하는 타입이라 이것저것 행동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해요. 근데 이게 또 ‘행동하자’ 하는 생각을 많이 하는 꼴이 되어버려서… 생각만 하고 게으름 피운다는 생각에 우울해지기도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제는 아이디어를 행동으로, 지속적으로 실천해서 성과를 보고 싶은 마음이네요.



마지막으로 집에게 해주고 싶은 말 있어요?


사실 내 집이 아니어서 크게 애정은 없는데요… 그래도 제가 멍뭉이랑 함께 살 수 있으면서, 감당 가능한 금액에 직주근접 훌륭한 지상층 집이라 고맙습니다.



룸메이트에게도 한마디 부탁드려요.


건강하게 15년만 더 살자. 내 효자, 너 만나고 내가 많이 어른이 됐어. 덕분에 성실한 사람 되려고 노력하고, 덕분에 이만큼 살고 있다. 쳇바퀴 도는 듯한 무채색 일상에 웃음을 주는 우리 효자 고마워.


2023년 8월의 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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