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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호 Apr 19. 2022

공산당 선언 분석 1

읽기 전 유의할 점

나는 공산당 선언을 펭귄 북스에서 출판한 역본으로 읽었는데, 이 판본은 본문보다 본문의 서설이 훨씬 길다. 일단 나는 선언 본문만 읽고 서설은 읽지 않았으며 서설과 별개로 내가 아는 선에서 텍스트를 분석하고 평가하려고 한다. 서설의 내용과 일치하는 부분도 있을 수 있고 또 틀린 부분도 있을 수 있겠지만 가능한 내가 생각한 통찰을 한 번 글로 써보고 서설을 나중에 읽어볼 생각이다.



공산당 선언은 마르크스 저작 중에서 가장 상징적인 의미를 갖지만 책의 내용에서 풍부한 철학적 또는 과학적 성취를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은 실망할 수 있다. 이것은 공산당 선언이 단지 선언문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책의 목적은 마르크스의 사상과 철학을 아주 짧게 요약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즉 이 책의 의미는 마르크스주의를 과학적 논리적 근거로 뒷받침하는 게 아니라 단지 이론의 배경이되는 기본사상을 일러주는 것에 불과하다. 만약 마르크스주의가 주장하는 것의 논리적, 과학적 근거를 뒷받침하는 완결된 체계를 이해하고 싶다면 다른 책을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따라서 만약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핵심들을 기존의 이론서나 교양서를 통해 이미 숙지하고 있다면 이 책은 읽을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만 사회과학의 시작은 사회현상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시작되는 바,마르크스가 어떤 이론적 배경으로 연구에 임했는지 알고 싶다면 한 번쯤 읽어도 좋을 것이다.





이 책을 읽기 이전에 마르크스주의 서적들을 읽는데 일러두어야 할 두 가지 유의점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첫째로 공산당 선언은 물론 마르크스의 모든 고전을 읽기 전에 스탈린주의라는 속류 마르크스주의와는 거리를 두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는 그동안 소련의 성립과 쇠퇴기간동안 세계 질서를 양분한 이념적 대립의 한축으로 서있었기 때문에, 소련이라는 현실 공산주의 국가의 체제 유지에 지대한 이론적 공헌을 하였다. 그 결과 마르크스주의는 소련 치하의 스탈린주의. 이른바 속류주의적 해석에서 모든 사회주의이론이 한 번 통합되어 세계 곳곳으로 전파되었고, 우리나라의 경우 그 속류 사회주의가 일제시기에 전파되어 근 100년의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낡아빠진 이념으로 널리 통용되고 있다.



이것은 마르크스주의의 지적 발전이 100년동안 정체된 일이므로 학문적 차원에선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렇게 된 연유는 있다. 정치적으로 악독한 매카시즘 국가의 토양아래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자신들의 결집력을 지키기 위해 연구와 이론적 발전을 게을리한 까닭이다. 그 결과 소련에서 파생된 속류 마르크스주의에 대해서 우파는 매카시즘의 입장에서 허술하기 짝이없는 이념을 공격하기 편하기 때문에 이것을 정통으로 여기며 좌파는 조직의 결집과 유지를 위해 이미 고여버린 이념을 정통으로 삼고있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마르크스집단은 마르크스주의를 발전시키는 것이 아니라 원서의 정통성있는 훈고학자로 남는 것을 자처하고 있다. 이것이 대중들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인식이 속류 마르크스주의로 고착화된 이유이다.



속류 마르크스주의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기계론적 역사발전론, 자본주의에 대한 일방적인 증오, 국가 기구에 대한 무제한적인 옹호, 일부 정치집단의 일당독재 옹호, 계획경제체제, 자본주의 일반적 위기론, 등등 이 모든 특징적인 이론들은 같은 마르크스주의 학자들 수준에서 전부 반박되었으며 이 내용을 토씨하나 안빼놓고 그대로 읉어내는 지식인은 이제 없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에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과 동시에 자본주의의 놀라운 발전 가능성을 함께 보았지만, 속류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의 빈부격차의 폐습과 악행을 집중적으로 조명하였다. 이런 단순한 해석은 훨씬 선동활동에 유용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 코민테른을 통해 세계 방방곡곡의 식민지 국가로 전파되었다. 가장 단순하게 해석된 환원주의는 곧 원시적인 증오로 탈바꿈하고 발전이 더뎠던 식민지 국가들, 에컨대 북한이나 크메르 루즈와 같은 독재국가의 성립을 공헌하였다.



속류 사회주의는 마르크스의 이념에 반할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의 전반적인 내용을 잘못된 색안경의 틀로 오독을 불러 일으킨다.



본문에서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이뤄질 경우 이뤄질 몇 가지 사회적 제안을 한다. 



마르크스는 '토지 재산을 폐지하고 모든 지대를 공적 목적에 충당할 것'이라거나 또는 '국가가 소유하는 공장과 생산도구를 확대하고 공동 계획에 따라 황무지를 개간 경작하고 토양 일반을 증진시키는 것' 또는 국가자본과 배타적 독점권을 가진 국립은행을 통해 국가의 손안에 신용을 집중시킬 것'과 같은 방안들을 제시하며 국가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이것은 분명 국가가 생산계획을 주도하여 인민들의 수요와 공급을 당국에서 책정하는 계획경제를 암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계획경제라는 아이디어를 단 한 번도 자신의 저작에 내포하지 않았을 뿐만이 아니라 시대상으로 계획경제라는 세련된 아이디어는 마르크스가 죽고난 뒤 몇십년 뒤에 창시된 개념이다.



마르크스가 강조한 국가는 국가라는 정치조직이 단지 노동자들에게 생산수단을 공유할 것을 법적으로 보증 또는 공인하여 노동자의 자주적인 생산관리를 차질없이 진행하도록 제도를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계획경제 아이디어는 심지어 그의 유작인 자본론에서도 나오지 않는 개념이다.



그렇다면 계획경제는 어디서 나온 개념일까?



국가가 경제를 능동적으로 조직한다는최초의 계획은  1차 세계대전 독일에서 시작되었다. 독일은 전쟁 첫 시작부터 해상권 봉쇄에 의해 경제적 고립을 강요받았다. 원료와 자원은 항상 부족했고 독일은 시작부터 경제문제와 씨름하였다. 독일의 사업가 발터 라데나우는 독일 당국에 주어진 자원과 원료를 적절히 분배하고 조정해서 최대한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전시계획경제 체제의 시행을 제안하였다. 



경제를 마치 잘 짜여진 기계처럼 다룰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종전 경제학자들에게는 한 번도 알려지지 않은 것이었다. 전쟁 때문에 불가피하게 이뤄진 바로 이 경제적 실험에서 당시 독일로 추방되었던 러시아의 노동자 정당 정치인 레닌이 깊은 감명을 받고 소련에 이식을 시도하였다. 비록 레닌이 이 계획을 실험했을 땐 결국 실패하여 신경제정책으로 돌아섰지만 스탈린이 이 아이디어를 계승하여 보다 전체주의적이고 국가주의적인 스탈린주의의 경제정책으로 발전시킨 것이었다.



즉 우리가 마르크스의 텍스트를 읽을 때 마르크스가 생전에 사유하지도 않았던 아이디어를 가지고 소급해석을 한다면 그 텍스트가 본래 전달하려는 정보가 완전히 괴리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가 스탈린주의와 결별해야할 이유는 충분할 것이라 여긴다.





둘 째. 또 다른 유의점으로는 마르크스가 쓴 텍스트들은 너무 선동적인 표현을 주의해야한다. 마르크스주의를 심도있게 연구했던 슘페터는 마르크스의 이론을 토대로 '창조적 파괴'를 개념화시킨 학자로 슘페터는 마르크스의 과학적 성취는 높게 평가하면서도, 텍스트 곳곳에 있는 특유의 선동적 언어들이 이론의 과학적 업적을 스스로 깎아내린다고 지적하였다.



이것을 공산단 선언에서 짚어보자면 이런 것이다. 



'부르주아지는 모든 생산도구의 급속한 개선을 통해, 엄청나게 용이해진 통신수단을 통해 모든 민족, 심지어는 가장 미개한 민족까지도 문명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들의 값싼 상품은 그들로 하여금 중국의 모든 성벽을 부수고 외국인에 대한 야만인들의 극도로 완고한 증오를 강제로 굴복시킬 수 있게 하는 중포이다. 부르주아지는 모든 민족에게 멸망을 원치 않거든 부르주아적 생산양식을 채택하라고 강요하며, 자신이 문명이라고 부르는 것을 그들 한가운데로 받아들이라고, 즉 그들 자신 부르주아가 되라고 강요한다. 한마디로 부르주아지는 그들의 형상대로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처음 공산당 선언을 읽는 사람은 위 표현을 보고 부르주아가 폭력적으로 식민지를 착취하고 파괴하는 이기적인 악한들로 이해하기 쉽다. 이것은 선과 악의 대립으로, 어찌보면 신파적인 대결구도를 성립한다. 선동을 위해 바로 이러한 해석을 부추기는 것이 속류 마르크스주의들이다.



그러나 사실 위의 내용은 서구 부르주아가 세계 곳곳으로 경제 영역을 넓혀나가면서 자본주의를 이식하고 서구와 같이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경제력을 발전시킨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부르주아가 없었다면 현대사회는 이만큼 발전된 경제사회를 이룩하지 못했을 것이다. 최소한 검정고무신에서 똥지게를 지고다니고 보릿고개를 겪고 사는 것보단 지금 현대경제사회가 더 낫다는 것은 모두가 인정할 것이다.



근대화의 파도를 유럽 서구 몇몇 국가들의 국지적인 현상에 지나지 않았던 것을 세계 방방곡곡으로 전파하여 세계를 개발하고 진보시킨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것이 좋건 나쁘건 진보의 흐름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히 좋은 것이다. 마르크스는 동시에 부르주아의 혁명적 과업에서 자본주의를 무너트릴 태동의 씨앗을 발견하였지만 어쨋건 자본주의에서 작동되는 시장경제는 좋은 것이었다. 



마르크스 저작 전반에 널려있는 선동적인 문구를 악의적으로 해석하여 완전히 다른 의미로 해석한 장본인이 바로 속류 사회주의다. 이것은 보다 계급투쟁적이고 노동자에게 일방적인 증오를 끌어올리는데 효과적으로 사용된다. 복잡하게 생동하는 자본주의를 단지 부자와 빈자의 감정투쟁으로 변질시키고 강자가 약자를 착취하는 비극으로 해석하며 종국에는 프롤레타리아가 결집하여 강자에겐 지옥 독실한 신자에겐 아름다운 천국을, 아름다운 유토피아 건설기로 끝나는 종말론을 보여주고 있다.



기독교의 요한 묵시록과 놀라울만치 완전한 구성적 일치를 보인다는 것을 비교해본다면 이것이 얼마나 잘 만들어진 종교적 예언이라는 것에 이견이 없을 것이다. 실제로 이들의 훈고학은 마르크스주의 신학의 모태이다.



물론 나는 사회주의가 인류의 발전과정 속에선 언젠가 나타날 것이라 믿고 있다. 그러나 이런 묵시론적 성격으론 나오지 않을 것이다. 이에 대해선 자세하게 차차 서술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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