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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삶의 맹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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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브레 Mar 30. 2024

인생에 대한 고찰

1장

본서의 목적은 누군가의 관점을 관철시키기 위함이 아니다.


단지 나의 생각을 정리하는 용도일 뿐이다.


하지만 이 글이 누군가에게 긍정적인 도움을 줄 수 있기를 소망하는 바이다.



다루는 주제는 매우 단순하고 근본적이지만 동시에 가장 무거운 주제이기도 하다.


나는 어릴 적부터 사유하는 것을 즐겼다. 하지만 얕은 식견과 깊이 탓에 매번 만족스럽지 못 한 글들이 휴지통에 들어가기 일쑤였다.


이 글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운이 좋게 표현하고자 하는 바를 잘 정돈하여 담을지언정 미래 어느 시점엔 또 다른 관점을 표방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요한 주제이니만큼 하루빨리 다뤄보는 게 여러모로 유익할 것이라는 판단을 했다.




인생이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주어지지만 실상 내부는 전부 다른 형태이다.


자신은 자신만의 인생을 살며 누군가의 인생을 대신할 수도 그리고 체험할 수도 없다.


비록 인간이 사회에 소속되어 살아간다고 하더라도 그 이전에 ‘개인’으로서 존재하는 인간임을 지각해야 한다.


또한 분명하게 기억해야 할 것은 인생을 정의하는 데에 절대적인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객관적으로 완벽한 인생이란 없다.


우리는 저마다 다른 자아를 지닌 개인이기 때문에 각자가 바라보는 관점에서 인생에 대한 나름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답을 내놓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럼 질문과 함께 본론으로 들어가 보겠다.



가장 먼저 던지고자 하는 질문은 [왜 사느냐?]이다.


언뜻 보면 공격적인 질문처럼 보이지만, 순수한 의도에서 비롯된 질문이다.


위와 같은 질문도 마찬가지로 궁극적인 정답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누군가는 “이왕 태어난 김에 산다.” 는 대답을 할 수도 있고, 또 다른 이는 장황한 설명과 함께 한 편의 시와 같은 대답을 늘어놓을 수도 있다.


앞서 말했듯이 반드시 나와야 하는 대답은 없다.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한 진솔한 답변은 그 사람이 세상을 어떻게 조망하는지 엿볼 수 있다


나는 내 한계를 경험하기 위해서 산다.


인간으로서 어떤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지를 시험하고자 하는 욕망이 강하다.


같은 삶을 살지만(물론 출발선은 다르다) 누군가는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고, 누군가는 길거리의 거지가 되어 살아간다.


내가 온 힘을 다 바쳐 살아갔을 때 도착하게 될 종착지가 궁금하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대답은 결코 모두에게 정답이 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사고관 내에서 가장 합리적이고 현명한 이유라고 판단되어 나온 대답이다.


“그렇다면 과연 인생이란 무엇일까?”


나는 저명한 철학자나 사상가의 꽁무니도 쫓아갈 수 없기 때문에 장황한 논리로 설명하기보다는 주관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는 직관적인 대답을 해보겠다.


인생이란 진정한 ’나’를 발견하고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매우 진부하고 당연한 대답이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기 때문에, 위 주장에 대해서는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보겠다.


인간의 평균 수명이 80세라고 가정하면 우리는 80년이 지난 후 삶을 되돌아봤을 때 아쉽지 않은 삶을 사는 것을 목표로 할 것이다.


물론 누군가는 윤택한 삶을 영위했을 수 있으나, 또 다른 이들은 깊은 후회들을 되새기고 있을 수도 있다.


인간의 인생은 한 번뿐이고, 유일한 한 번이다.(사상에 따라 다를 순 있지만)


처음 사는 인생에서 실수를 저지르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므로, 작은 후회조차 없다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적인 반응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후회들을 최소화하기 위해 삶을 살아가면서 일련의 노력을 들여야 한다.


그렇다면 더 나아가서, 만족스러운 삶이란 어떤 삶일까?


이 질문은 대답하기 매우 어려운 질문이다.


왜냐하면 저마다 만족하는 지점이 너무 다양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오랫동안 함께했음에 만족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훌륭한 회사를 설립하고 유지했음에 행복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건강하게 80년을 살았음에 행복할 수도 있다.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 우리는 각기 다른 ‘개인’이기 때문이다.


고로 나는 우리가 먼저 온전한 ‘개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사상과 행동을 맹신하거나 다수가 외친다는 이유로 맹목적인 함성에 동참하는, 자아를 상실한 자가 아닌 진정한 ‘나’를 탐구하고 내면의 목소리를 경청하는 건강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온전한 개인이 아닌 군중 속에 묻어가는, 단지 누군가의 말을 전달만 할 수 있는 부류의 사람은 자신의 인생에서조차 주도권을 쥘 수가 없다.


개인적인 사고를 하더라도 누군가나 무언가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고 설사 큰 오류를 포함하고 있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재고와 사색의 과정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관념들의 뿌리를 찾아보고, 나의 입장과 반대 입장을 논리적으로 분석하여 주관적인 대답을 내리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실제로 직접 사고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진위여부를 깊게 따져보려는 시도 자체를 꺼린다.


대중이 내리는 판단에 반하는 의견이 나올 수 있는 것에 두려움을 느낀다.


그렇기에 군중이 외치는 A라는 ‘의견’이 마치 절대적인 ‘정답’처럼 보이는 경우가 허다하다.


익숙한 관념들을 새로운 시선과 기점에서 재해석하는 것은 더욱 견고한 사고 체계를 갖고 나만의 세계관을 확장하는 데에 이바지할 것이다.


자신과 솔직한 태도로 마주 앉아 온갖 깊은 곳까지 구석구석 들여다보면, 차츰 보지 못했던 혹은 잊고 있었던 의견들과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세부적인 얘기를 해보도록 하겠다.



때때로 몇몇 사람들로부터 압도적인 깊이와 멋을 느낀 적이 있었다.


그들의 공통점이라면 스스로와 많은 대화를 나눈 뉘앙스를 풍겼다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이해도가 뛰어났고, 본인이 무엇에 열광하는지 알고 있었으며, 매사에 자신감이 넘쳤다.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자신의 취향과 개성을 깊이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본인의 취향을 잘 알기 위해서는 자신을 관찰하는 시간과 대화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결국 이러한 노력은 앞서 말한 인생의 본질인 ‘나를 알아가는 것’과 같은 개념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취향을 확립하는 행위가 매우 중요한 이유는 자신을 ‘온전한 개인’으로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자신을 타인들과 분리시킴으로써 같은 세계에 존재하지만 ‘대체 불가능한 개인’이 된다.



마찬가지로, 자신을 알기 위한 노력만큼 중요한 것이 자기 확신, 자신감이다.


스스로를 굳게 믿고 자신이 세상에 큰 기여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빛이 난다.


내가 되게 좋아하는 문구가 있다.


“모든 것은 누군가의 꿈에서 시작되었다.”


어디서 유래된 말인지는 모르나 이는 내가 매일 상기시키는 문구이다.


생각해 보면 매우 논리적인 문장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집, 우리가 통행하는 도로, 우리가 사용하는 핸드폰, 우리가 먹는 음식 등 이 모든 것은 인간에 의해 창조된 것이다.


하지만 그 이전에, 그들의 상상 혹은 꿈에서부터 시작된 것들이다.


그렇다면 그들과 같은 인간으로서 “나는 할 수 없어”라고 말할 이유가 무엇인가. 본인의 가치를 폄하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이 글을 보는 누구든지 본인들이 꿈꾸는 것을 달성할 수 있고 창조할 수 있다. 이는 매우 당연한 소리이다.


“끌어당김의 법칙”이나 영적 믿음들이 충분히 신뢰 있는 사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내가 내 꿈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을 진정 깊게 믿는 사람은 절대 방에서 잠자코 만 있지 않을 것이다.


“나는 대통령이 될 거야.”라고 말한 뒤 스스로를 방치하는 사람은 오히려 자신의 가치를 더럽히고 있는 것이다.


원대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그에 걸맞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당연한 반응이다.


부딪히고, 넘어지고, 고통이 밀려오더라도 감수하고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사회에 큰 기여를 한 모든 이들이 그랬을 것이며, 실제로 그들의 인터뷰나 저서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자신의 무한한 가치를 깨닫고 살아가는 사람이야말로 스스로를 사랑하고 세상의 이치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나’를 알기 위해서 필요한 마지막 노력은 무수히 많은 경험을 하는 것이다.


위에서도 넌지시 언급했지만 자신의 삶을 체험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 밖에 없다.


또한 삶의 끝자락에서 바라보는 본인의 인생은 결국 본인이 한 모든 경험들의 총집합이다.


경험이란 곧 도전과 시도를 내포하며 무언가를 경험한다는 것은 결국 무언가를 행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독서를 하던 중 이런 구절을 발견했다.


“지식은 전달될 수 있으나, 지혜는 전달되지 않는다.”


우리는 고도로 성장한 사회에 살아가며 독서나 영상시청 등을 통해 전보다 쉽게 지식과 정보를 얻고 타인의 경험을 들을 수 있다.


과거에도 소설이나 영화 같은 문화활동 등을 통해 간접 경험이 가능했고, 타인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시야 확장이 가능했지만, 이는 내가 실제로 경험한 것이 아닌 누군가의 경험을 간접적으로 경험한 것이기 때문에 극명한 차이가 있다.


한 영화 평론가의 평론을 듣고 그 영화의 전부를 이해할 수 없으며, 생소한 음식에 대한 셰프의 묘사를 듣고 그 맛을 음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지식과 정보를 얻어 지적인 측면에서는 성장할 수 있지만, 지식을 응용하는 과정에서 경험자들과 같은 결과값이 나온다는 확신은 할 수 없다.


그러니 본인의 성장을 위해선 무엇이든 직접 경험하는 것이 가장 유익하다.


살아가며 체험하는 모든 것들은 우리의 인생을 더욱 알차고 다채롭게 만들 것이고 세상을 즐기는 지혜를 하나하나 깨우쳐 나가는 셈이다.



글을 마치면서 하고 싶은 말은 우리는 보다 우리의 가치를 자주 상기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주변에 쉽게 동화되지 않기 위해서는 견고한 자아가 필수적이고, 나를 알기 위해서 나에 대해 생각하고, 탐구하고, 대화하는 과정 또한 필수 불가결이다.


그렇기에 타인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본인의 취향과 개성을 마음껏 파헤치고 발전시켜 온전한 개인의 멋을 풍기는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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