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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삶의 맹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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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브레 Apr 29. 2024

교육에 대한 고찰

3장

교육을 의미하는 영단어 ‘education’은 라틴어 educare에서 비롯되었다. ‘e’는 ‘밖으로’, ‘ducare’는 ‘이끌어내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이를 토대로 해석하자면 교육이란 누군가에게 지식이나 정보 등을 주입하는 것이 아닌, 내면으로부터 잠재력을 이끌어내는 과정을 묘사한 단어이다.

영문 정의와 함께 글을 시작한 이유는 오늘날 대다수의 사람들이(교육자들부터 일반인들까지) 이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교육은 개인의 삶과 세계를 이해하는 단계이자 사회를 지탱하고 발전시키는 역할을 한다. 

근현대의 교육이 확립되기 이전에는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할지- 혹은 -개인의 의미- 와 같은 관념들에 대해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없는 시대였고, 이념이나 시대 통념에 지배되는 세상이었다.

과거가 종교로 인해 자아실현에 대해 꿈을 꾸지 못 했던 시대였다면, 현재는 다른 의미에서 자아를 상실한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생기고 있다.


앞서 말했듯이 교육의 본질적인 의미는 개인의 잠재력을 밖으로 이끌어 내는 것이다.

즉, 저마다의 개성과 능력을 강화시키는 것이 교육의 본질적인 목적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대 사회의 교육은 이 본질을 덮어두고 오히려 모든 개인을 획일화하려는 경향을 띤다.

학생들의 강점을 발견하기보다는 일방적인 정보 주입이 이뤄지고, 학생들의 꿈을 응원하기보다는 일정한 경로를 택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한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교육의 모순이 악습의 굴레에 빠진다는 것이다.

위와 같이 잘못된 교육을 받거나 이념을 믿는 자들 또한 성인이 되고 가정을 꾸리게 된다.

본인들이 그러한 울타리 안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그 울타리가 원래 있었던 것이라는 착각을 갖는다.

따라서 그들의 자식들 또한 그 울타리에 갇히게 되며 그들의 부모처럼 자유를 속박당한다.

짐작건대 그들 중 위인이 되거나 사회에 중요한 성과를 남길 만한 잠재력을 가진 자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반항을 할 정도의 계기가 없다면 재능을 꽃피우지 못할 것이고, 자신의 천부적인 자질을 눈치도 채지 못하고 삶을 마무리할 수도 있다.


물론 모두가 사회 계층 꼭대기에 올라갈 수는 없다. 이 고찰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사회적으로 성공해야 된다-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더욱 발전시키고 개선시키기 위해선 혁신적이고 창의적인 기여를 하는 이들은 반드시 필요하다.

또한 최대 다수가 자신의 신념과 기호에 따라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다면, 그렇지 못 한 사회보다는 아름다울 것 같다.


그러나 대중을 이루는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이고 대게 사회에 순응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을 마냥 부정적인 관점에서만 볼 수는 없다. 만약 모든 사람들이 반항적인 동기와 충동을 가지고 있었다면 아마 이 사회가 유지되는 것 또한 매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의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는 사회는 건강하지 못하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대학교에 가야 한다-라는 무언의 이해관계가 존재했다.

대학교에 가지 않거나 가지 못 한 자들을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판단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처럼 사회가 정해 놓은 길을 가지 않는 사람들을 개성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아닌 무능의 관점에서 바라봤었다.

이 밖에도 튀는 행동을 하거나 독창적인 행보의 사람들을 존중하기보다는 이상한 사람으로 낙인을 찍는 경우가 많다.

이를 대변하는 속담도 존재한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

남들이 하는 행위를 따라 하고 남들과 같은 선택만 한다면 그 사람을 온전한 자아를 지닌 개인이라고 볼 수 있을까?

만일 누군가가 새로운 시도를 하거나 튀는 행동을 한다면 우리는 그의 용기와 자아실현을 위한 노력에 찬사를 보내야 한다.

그는 이상한 사람이 아닌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멋있는 사람이다.

성공과 실패 여부와는 관계없이 자아실현을 위해 무언가를 시도하고 있는 사람이다.

시도는 곧 경험이 되고, 그렇게 자신의 삶을 채워나가는 것이다.


사회는 개인의 삶의 터전이자 개인들이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준다.

하지만 더 나은 사회, 모두가 자신의 능력과 개성을 꽃피울 수 있는 사회가 조성되기 위해서는 개인의 다양성을 장려하고 도모해야 한다.

하지만 다양성을 위협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다. 기득권층이다.

특히 정치인들이나 CEO 그리고 정부의 입장에서는 이런 다양성을 달갑게 볼 수 없다.

왜냐하면 기업을 경영하거나 한 집단을 다스리는 경우, 본인과 대립되는 의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잠재적인 위험 대상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만의 사회를 통제해야 하고 설사 통제가 되지 않을 시 그들이 세워 놓은 제국이 멸망할 위협을 받는다.

하지만 모순적인 점은 그들이 다양성을 통제하면 통제할수록 거시적인 관점에서 그들의 집단이나 사회는 발전에 어려움을 겪는다.

또한 그들에게 복종하고자 사회가 정해 놓은 암묵적인 길만을 추구한다면, 나를 위한 삶이 아닌 그들을 위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개인의 자유를 박탈하는 북한보다는 한국이나 미국에서 사는 걸 선호하지 않는가.


사회가 있기에 개인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 개인이 있기에 사회가 존재하는 것이다.

개인적인 기여가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만나 사회의 성장으로 발돋움하는 것이다.

하나의 예시로 일론 머스크라는 인물에 대해서 말해보겠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괴짜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그를 싫어하는 자들도 많다.

그의 시도를 폄하하고 부정적인 결과를 예측하지만, 그가 세계에 기여하는 가치는 어마어마하다.

게다가 그의 모든 시도는 시도 자체로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시도를 통해 새로운 통찰들과 견해들을 얻을 수 있고, 만약 성공한다면 대단한 업적 혹은 성취가 된다.

반대로 실패한다고 하더라도 미래에 이를 개선하고 보완하는 데에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자료 및 선례가 된다.

일론 머스크는 자신의 관심사를 쫓아 가장 개인적인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고, 그는 현재 사회에서 가장 대체불가능 한 인물들 중 한 명이다.

이 밖에도 스티브 잡스나 뉴턴 등 나열하지 못할 정도의 위인들도 반사회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 모두 무수히 많은 비난과 멸시를 이겨냈어야 했다.

대중의 부정적 특성이라고 하면 어떻게든 저항하는 인물들을 끌어내리려고 하는 것이다. 

그들의 시도를 방해하고 자신의 무능을 합리화하기 위해 본인이 할 수 없는 건 옳지 않다는 견해를 갖는다. 

같은 상황이 반복되는데도 본인의 이념을 밀어붙여 저 사람은 특별한 사람이 아닌 이상한 사람이라는 관점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본인의 꿈을 포기한 채 결국 대중에 섞여 미처 재능을 꽃피우지 못 한 천재들이 있을 수도 있고, 맞지도 않은 옷을 수십 년 동안 입고 사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나의 관점에서는 일론 머스크나 스티브 잡스 같은 인물들이 온전히 그들의 재능만으로 위인에 반열에 올라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자신의 꿈을 믿고 누구보다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인 자들이다. 

무수히 많은 비난과 부정적인 견해들, 자신의 입장과 반대되는 의견들에 개의치 않고 강한 주관을 가지고 밀어붙인 태도가 이들의 업적에 큰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


이 챕터를 마치며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인간이 살아가며 추구해야 할 것 중 하나는 자신의 개성과 강점을 발달시키는 것이다. 

모두가 입는 옷을 입기보다는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을 입어야 한다.

본인의 취향과 선호를 탐구하고 강화시켜 남들과 대비되는 능력을 기르는 노력은 온전한 개인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한다.

사회에 순응하던 순응하지 않던 이와 별개로 자신의 강점과 개성을 발달시키고, 타인의 강점과 개성까지 존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렇기에 교육은 인간이 살아가며 근간이 되는 것들을 가르침과 동시에 저마다의 꿈과 재능을 찾아 세상에 훌륭한 가치를 전달할 수 있도록 “일깨워 주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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