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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출내기 Dec 09. 2023

주재원의 임기 4년

4년은 길기도 하고 짧기도 한 시간이다. 보통 한국 기업의 해외 주재원의 임기는 4년이다. 처음 1년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보낸다. 집을 구하고, 아이들을 새로운 학교에 보내고, 주변에 생필품을 사는 마트를 알아내고, 현지에서 쉽게 구할 수 없는 식재료를 구할 수 있는 숨겨진 장소들을 찾아내고, 새로게 살아갈 동네의 산책로를 하나 정하고, 갑자기 덩그라니 놓여진 새로운 사람들의 틈 안에서 나를 알리고, 주변을 알아 간다. 봄, 여름, 가을, 겨울 한 계절들을 오롯이 보내고 나면 익숙함이 찾아 온다.

그 다음의 2년은 불편의 시기 이다. 말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고, 환경이 다르고, 사람들이 다르다. 적응하느라 긴장하고, 조심스러웠던 시기를 지나면 하나둘 불만들이 찾아온다. 말이 통하지 않는 불편, 느린 행정 처리와 인터넷, 당연히 누렸던 특급배송의 부재, 기대하지 않았던 추위와 더위, 새롭게 만난 사람들에 대한 호불호. 불편함을 겪으며, 내가 예전에 살았던 세계와 새로운 세계의 차이점을 새삼 알게 되고, 점점 그 가운데 어디에서 타협점을 찾게 된다.  3년차는 편안함의 시기이다. 몸도 마음도 완전히 적응했고, 불편한것은 포기 했고, 적당히 정리된 관계속에서 그 세계가 주는 만족을 알게 된다. 느린 생활의 미학을 칭찬하고, 주변의 자연환경을 누리고, 함께 하는 사람들과 취미를 즐기며 지내게 된다.  이 때부터는 한국에 다녀가게 되면 오히려 불편함과 어색함을 느끼게 된다.

4년차는 아쉬움과 불안의 시기이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면 아무것도 이룬것 없는 것만 같고, 이제 다시 새롭게 다른 어딘가에 정착해야 한다는 조바심이 생긴다. 만족을 느꼈었다면, 순간 순간이 더욱 더 아쉬워 지고, 힘들었다면 점점 더 그 불만들이 참을 수 없이 커진다. 불안과 아쉬움속에 시간은 흘러 흘러 또 다른 선택이 찾아 온다.

오래간만에 새로운 곳에 3주라는 긴 기간동안 출장을 나와 있다. 이제 4년의 임기를 6개월 밖에 남겨 놓지 않은 이때, 여러 모로 의미심장한 시점이다. 늘 해야 할 일들은 차고 넘친다. 새로운 곳에서는 또 새로운 프로젝트들이 생겨나고, 그 일을 맡아서 해야 하는 사람들을 찾고 있다. 이곳은 나와 우리 가족의 또 다른 4년의 보금자리가 될 것인지, 아니면 긴 출장의 기억을 뒤로 한채 다음을 기약하게 될지 벌써 2주차가 지났지만 아직은 오리무중이다. 새로운 것들이 야기하는 혼란과 도전을 다시 또 받아 들이는 것이 과연 맞는 것인지. 시시때때로 생각은 오고 또 간다. 단, 무리 해서는 안 된다. 회사에게 있어서나, 가족에게 있어서나 이것은 매우 큰 부분이고, 내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여러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 이기에, 억지로 내 의도대로 이끌어 가기 보다는 최대한의 중립과 객관성을 유지하며, 상황이 무르익기를 잘 기다렸다가 선택을 하는 것이 이 옳다. 늘 떠돌아 다닐 수는 없을 것이다. 화분에 심겨져 있던 작은 화초는 그대로 쑥 뽑아 더 큰 화분에 그냥 심으면 되겠지만, 이제는 어느정도 나무가 되어 버렸기 때문에 옮겨 심으려면 많은 잔 뿌리의 희생과 큰 장비가 필요하고, 심겨질 그곳에도 큰 웅덩이가 필요하다. 그리고 새롭게 심겨진 그 곳에서 과연 우리가 모두 더 잘 자라날 것인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아직은 한 두번은 더 돌아다닐 수 있지 않을까. 고국인 한국으로 돌아가서 다시 정착하는 것보다, 낯선 이국땅에서의 그것이 더 막막하지 않은 것은 이미 10년여를 해외에서 지냈기 때문이리라. 언젠가는 돌아가야할 곳 이지만 과연 지금이 그 언젠가 인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창 밖을 보니 밤새 눈이 펑펑 내렸다. 12월 한 겨울인데 봄 날씨 처럼 따뜻했던 1주차를 보냈는데, 2주차가 넘어가는 지금 이제 정말 원래 계절이 된것 같다. 저 멀리 보이던 거대한 산맥들이 눈안개로 자취를 감추었고, 온 도시가 갑자기 찾아온 추위에 놀라 가만히 웅크리고 있는 것만 같다. 다음주는 영하 30도 까지 내려간다는데, 챙겨온 옷들이 과연 이 일주일을 잘 버틸 수 있게 해 줄지 걱정이다. 3년차의 익숙함과 편안함을 느끼고 있었던 우리집에서의 일상이 그립다. 혼자만의 적막한 주말 아침을 보내며 외국이었지만 지금은 우리집과 가족있는 독일에서의 3년반을 생각해 본다.  지금 나의 이 출장이 3년 반 전에 숨가쁘고 우연하게 흘러 갔던, 독일로 오기 직전의 그 여름과 먼저 혼자 나와서 1년차를 맞이하기 위해 동분서주 했던 그 몇주를 떠오르게 한다. 너무도 생생한데, 벌써 이렇게 시간이 흘러버렸다니 놀랍고도 무섭지만 또 다행스럽고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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