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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리소리 Sep 07. 2024

신앙여정

길을 묻는 이와 동행하기


기독교 신앙에 의구심이든 의심이든 호기심이든 관심이든 질문을 해 오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말해주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까요? 저희 교회가 특수한지는 모르겠으나 질문을 가지고 찾아오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아마도 이런 질문에 어떤 경로이든 결국 복음을 전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런데 그 복음이라는 것이 어거지로 당신은 죄인이니 예수 믿으면 구원받고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저 역시 이런 식의 답변을 한 경험이 왜 없겠습니까만은 다시 만날 기회를 잃어버리는 것이 90%이상이라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겁니다.




그런다고 용기와 위로라는 달콤한 말로 기분 좋게 또는 감격하고 감동하게 하는 답변을 주는 것이 맞을까요? 이렇게 답변한 경우에도 똑같이 다시 만날 기회를 잃어버립니다. 물론 다시 만나서 교인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목적은 아니지만 인간적으로 세일즈를 한 기분이 들어서 기분이 썩 상쾌하지는 않아요. 물론 세일즈가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판매 가능하지 않은 것을 판매한 기분이니 상쾌하지 않은 것입니다.





길을 묻는 것이다




어떤 동기에서 질문을 하든 기독교 신앙에 대한 질문을 길을 묻는 질문이지 행동과 결단의 지침을 요청하는 것은 아니죠. 그래서 소위 말하는 복음(매우 축소된 형태)을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에 저는 성경이라는 책을 소개합니다. 교회를 평생을 다녀왔던 사람이든, 기독교 신앙에 입문하는 사람이든, 기독교 신앙을 반대하는 사람이든, 질문을 하는 누구에게든지요.




성경이라는 책, 즉, 성서를 소개하는 것은 단지 그 내용만을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 내용은 오히려 대화의 가장 뒤에 위치합니다. 오히려 성경이 어떻게 지금 우리의 손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그 역사를 설명하구요. 성경의 저자에 대한 소개를 하면서 왜 하나님이 저자인지를 설명하죠. 이쯤되면 대체로 대화 속으로 질문자는 깊이 들어 올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러면서 개인적으로 느끼고 깨닫고 나 자신의 신앙(일반적인 신앙심)에 성서가 역할을 하는지 자기고백을 들려주기도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구약성경이란 어떤 것인지 기독교인들에게 신구약성경이란 어떤 의미인지를 들려주기도 하죠. 물론 자세할 수는 없지만 대략적인 관점을 소개하는 것 만으로도 흥미를 지속하는데에는 충분합니다.


이렇게 성경을 소개하면 성서로서의 성경을 읽어 보고 싶다는 반응을 보게 되죠. 즉, 길을 묻는 이에게 길을 보여준 결과에 이른 것이죠.







동행하는 친절이 필요하다




길을 물은 사람에게 가장 득이 되고 고마운 일은 길을 보여준 이가 동행해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새로운 길에 대한 어느 정도의 두려움이 있거든요. 그 길이 낯설어서 두려운 것이 아니라 자신이 그 길을 갈 수 있을지에 대한 불확실성입니다. 이 떄 필요한 것은 용기입니다.




그의 마음을 안정시켜 줄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글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은 최소한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글을 읽는 방식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성서를 우리에게 주신 목적이거든요. 둘째로 길을 아는 이가 갈을 묻는 이에게 "제가 가본적이 있으니 제가 모셔다 드릴께요" 라고 말하는 것과 같이 함께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런다고 내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당신에게 헌신하겠다는 식으로 결의찬 약속일 필요가 없습니다. 부담이 되요. 오히려 내가 가는 길이니 그저 함께 한다는 정도의 느낌이면 부담없이 그 길을 가기로 선택하게 됩니다.







길을 안내하며 동행하다




동행할 때 뒤에서 따라오게 하면 여전히 불안한데요. 따라가는 사람 입장에서는 인도하는 사람의 뒤를 보며 그 사람에 대해 불안이 생깁니다. 똑 바로 가는 것 맞을까...? 이상한 곳으로 데려가면 어쩌지...? 어떻게 저 사람을 신뢰하지...? 등등... 그래서 자신이 이끌고 가는 그 길에 대해 안내하며 가야 합니다. 다음 우회전할건데 무슨 건물이 나타날 건지, 어떤 상점이 있는데 무엇을 팔고 그것을 사서 사용해 보았더니 어떻게 유익했는지... 안내와 함께 이런 사소한 이야기들이 그와 동행하고 있는 나에 대해 신뢰를 줄 수 있습니다.




이와같이 안내를 하는 차원에서 성경읽기의 방법을 소개합니다. 정확히는 성경을 어떤 내용인데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는지 그 '이해의 방법'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좀더 무거운 언어로는 '성경해석법'이죠. 물론 대단한 신학강의와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도 시간과 문화와 언어적으로 꽤나 거리감이 있는 고전이라는 사실과 그것을 해석해 온 역사가 있으며 어떤 해석들을 해 왔는지 그 방법을 소개해 주고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좀더 긴 시간을 가지고 얘기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학자들을 위해 쓰여진 것이 아닌 일반 독자들이 어느 정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을 선택합니다. 그리고 그 책을 발판으로 대화에서는 좀더 확장적이고 깊이있게 대화를 하죠. 물론 제가 가지고 있는 제한된 지식과 경험에 불과하겠으나 이 정도로도 충분히 제가 믿는 성경의 가치와 그에 대한 신념을 충분히 설득해 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성경해석이라는 주제가 생소하겠죠. 그냥 읽고 어떤 감흥과 삶의 통찰을 얻는 정도로 성경읽기를 생각해 왔으니까요. 그러나 성경해석의 주제로 한걸음 한걸음 들어가다 보면 그 중요성을 깨닫게 됩니다. "진작 알았어야 했다" 는 고백을 듣게 됩니다. 왜냐구요? 그 이유는 대부분의 신앙에 가장 걸림돌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여기는 성경은 스스로 읽을 만한 책이라고 여기지 못했던 패배감과 설교를 들을 때 자신의 상식과 윤리에 반하는 내용에 대한 불편함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지는 못하고 그저 느낌에 머물러야 하는데 느낌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신앙에 무력감을 느끼게 하거든요. 만약에 스스로 성경을 읽는 실력이 어느정도 갖추어진다면 아무리 불편한 설교를 들어도 넉넉한 마음으로 수용할 수 있게 됩니다. 목사의 설교도 인간의 말이라는 현실을 받아드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다고 설교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과 그 음성을 폄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목사의 설교가 가진 윤리적, 기술적 결함 정도가 용서되는 지점이 자신이 스스로 성경을 읽을 수 있다는 확신성에서 가능해지거든요.




성도들이 왜 평신도인 자신이 '성경해석'에 대해 공부해야 하느냐고 의구심을 갖기도 하지만 이것이 자신의 신앙과 인격을 보호하는 방패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에는 진정한 안정과 기쁨을 느끼는 고백을 늘 듣게 됩니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성도들에게 성경해석, 성경읽기와 묵상법을 가르치는 것으로 설교자인 제가 가진 독성과 결함, 그로인한 부적절한 결과들로부터 성도 자신들을 보호하는 방편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부분에 대해 자신들의 의견을 근거를 가지고 설교자에게 피력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기 위함이죠. 이런 성도 두 세 사람이 청중으로 있는 것만으로도 설교 현장은 치열합니다. 치열한 설교현장을 만드는 것은 피곤을 자처하는 것이지만 권한에 대한 스스로의 장치가 필요는 상식적으로 당연한 것이죠.




이렇게 치열한 현장을 만든다는 것에 교회가 분열하고 말싸움만 하는 곳으로 여겨지겠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치열함이 가져 오는 아주 미비한 불편을 그저 말씀드릴 뿐이고 오히려 유익이 큽니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다"라는 속담을 아실 겁니다. 설교자의 부족함과 결함에 대해 인정하고 나름 성경을 읽을 수 있는 성도들은 마음이 넉넉하고 여유가 있구요, 실력이 부족하거나 성도들의 상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설교자의 설명을 알아서 이해할 수 있기도 하죠. 설교 중에 나는 분명 버벅거리고 있는데 지긋이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여 주는 분들이 있는데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다"의 대표적인 표현과 표정입니다.







여정을 즐기게 하다




이런 책을 읽으면서 공부를 시킬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세상은 어떻게 특정 사건을 이해하는지 그 관점들을 들여다 보게 도와주고 싶은 욕심도 있습니다. 문화적 현상이나 사회적 사건들 또는 한 편의 영화나 소설과 같은 작품들을 다양한 시각에서 들여다 보는 관점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은 것이죠.










이것이 중요한 것은 첫째 하나님께서 피조세계에서 얼마나 크게 일하시는지를 볼 수 있는 눈을 열어주고 싶어서 입니다. 둘째로는 무례하지 않고 교양있는 신앙인이 되어 세상과 자신의 신앙을 소통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으면 해서 그럽니다. 즉, 신앙의 관점으로 판단한 것을 십자군이 악이라 규정한 것을 점령한 태도를 갖지 않게 하기 위함이죠.




자신의 신앙이 진리라면 그것을 담아내고 표현하는 방식도 그러해야 한다고 봅니다. 물론 그 진리에 비교하면 우리 자신은 아름답고 견고한 보석을 담고 있기는 하나 한 없이 부족한 질그릇이겠이죠. 그런데 강함과 부와 화려함으로 위장하여 질그릇됨을 부정해야 보석을 담을 수 있는 자격을 갖춘 것이라 생각하거나 그래야만 보석의 가치를 말할 수 있다고 오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릇에 담긴 보석 그 자체가 깨어지지 않는 견고함을 가지고 있고 어떤 질그릇이라도 보석 그 자체의 아름다움을 해칠 수도 없을 뿐아니라 오히려 질그릇이 보석을 담고 있어 가치있는 존재가 되는 역설적 기쁨을 표현할 수 있다면 진실하고 당당하겠죠.




세상의 다양한 관점들을 무시하지 않는 길은 그 가치를 발견해 내기 전에 먼저 내 자신이 질그릇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런 자세에서 세상의 다양한 의견과 관점들이 무엇을 위해 노력하는지 그 안에 진정성들을 보고 인정하게 되죠. 여기서 인정하는 것은 그들을 인정하는 것과 동시헤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조세계를 포기치 않고 성실하게 일하고 계시다는 하나님의 주인되심을 인정하게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나의 신앙의 관점에서 어떤 특정 사안에 대한 자신이 가지고 있는 판단에 대해 겸손함을 갖추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는 것을 매우 싫어하는 것에 이것은 지는 것도 이기는 것도 아닙니다. 겸손하신 예수의 이름으로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우정을 쌓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의 하나님을 화목한 가운데서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죠.




나의 낮은 모습에서 친구는 자신의 낮은 모습을 봅니다. 교회의 낮은 모습에서 세상은 자신의 낮은 모습을 보고 그 모습을 볼 수 있는 세상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필요하다는 구원에 대한 갈망에 눈을 뜰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이 나와 같이 누추한 자리까지 낮아지셨기에 내가 내 자신을 볼 수 있었듯이 말입니다. 예수님이 친구가 되어주셨기에 가능한 일이지 않겠습니까?





신앙여정에서 세속여정을 묻는 자로




이렇게 성경을 볼 수 있는 성도들은 반드시 세속의 여정에 대해 궁금해 합니다. 신앙으로 세상을 사는 것이 어떠한 것인지 그 여정을 묻습니다. 애석하게 저에게는 그런 경험이 충분하지는 않아요. 그럼에도 저 역시 아버지로, 남편으로, 아들로 누군가의 친구와 이웃으로 살고는 있기에 매우 제한적이지만 신앙으로 저의 세속세계를 살고 있기에 아주 공감하지 못할 것은 없기도 하죠. 그러나 성경을 스스로 읽을 수 있는 성도들은 저의 부족함을 넘어서서 우리 안에 역사하시고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메시지를 얻어내는 것 같습니다.




교회를 개척해서 10년이 넘었죠. 이렇다할 예배처소 하나 없습니다. 영향력을 보이는 프로그램 하나 제대로 하고 있는 교회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함께 할 수 있는 신앙공동체가 지속 가능한 이유는 성도들 중에 몇몇 성경을 스스로 읽는 자들 때문이라 확신합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몇몇 안 되는 사람들에게라도 성경을 소개하고 성경읽기를 가르쳐 스스로 성경을 읽고 하나님과 만남을 이룰 수 있도록 돕는 동행자가 되는 일에 몰두하기로 했습니다. 물론 요리도 열심히 하고 저만의 레시피를 개발해서 위로와 환대의 식탁이 필요한 이들을 섬기는 일도 계속할 겁니다. 이제 와서 깨달은 것인데... 인생이 짧아서 할 수 있는게 많지도 않고 짧은 인생 하나님께서 저에게 원하시는 것도 그리 대단하고 크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성경을 스스로 읽고 하나님을 만나는 그 집에서 이제 세속여정을 묻는 교회와 함께 하는 남아 있는 여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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