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를 마시기 시작한 지 제법 오랜 시간이 흘렀다. 처음에는 녹차를 주로 마시며 흰 백자 다관, 숙우, 잔 등 꼭 필요한 다구들만 하나 둘 챙겼다. 그러다 점차 차에 깊숙이 빠져들면서 다양한 차들을 접하고, 그에 비례해 차를 우리는 도구들이 하나씩 늘어갔다. 예뻐서 잔을 사기도 하고, 여행 기념으로 다관을 하나씩 늘려 나갔다. 사용하기 위해 구입하기보다 구색 맞추기, 아니면 갖고 싶은 마음이 앞서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발효차를 마시려면 이런 다관이 하나쯤 필요하지 않을까’라고 나 스스로를 합리화하며 사들인 차 도구는 장식장에 제법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잠 못 이루는 밤에 홀로 차도구들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는 일은 차 생활이 주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하나씩 먼지를 닦아주며 언제 어디서 어떻게 구입하게 되었는지를 추억하는 시간이, 나에게는 차 한 잔을 마시는 것과 같은 행위이기도 하다. 다른 이에게는 그저 평범한 물건 중 하나처럼 보이겠지만 겉모습과 달리 각별한 사연이 담긴 찻잔이며 다구들이 몇 개 있다.
주둥이가 살짝 나간 백자 다관도 그중 하나이다. 작고 앙증맞은 크기의 다관은 두 명이 서로 마주 앉아 차 한 잔씩 나누기에 알맞은데, 차를 마시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큰맘 먹고 구입했다. 차 도구를 전문으로 파는 가게에서 처음 눈이 마주쳤는데 맘에 쏙 들었다. 손에 잡히는 촉감이며 모양과 빛깔이 나를 사로잡았다. 가격을 물으니 선뜻 구입하기 망설여지는 금액이다. 한참을 만져보고 바라보다 살며시 제자리에 두고 뒤돌아 나왔다. 그러다가 얼마쯤 후에 그곳을 지나면서 또 들여다보았다. 진열장에 그대로 놓여있는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그사이 누군가 가져가지 않은 모양이다. 안면이 있는 가게 여주인은 그 다관은 내 것이 될 인연이라며 구입을 권한다.
그렇게 나에게 온 백자다관은 10여 년이 넘도록 나의 찻상에서 녹차를 맛있게 우려내는 차 벗이 되었다. 그러던 중에 어찌하다 작은 손놀림의 실수로 다관주둥이에 상처가 생겼다. 손에 상처라도 난 것처럼 순간 통증이 느껴졌다. 새살이 돋는 것도 아닌 것을 어찌할까 싶었지만 품에 계속 두기로 했다. 살짝 떨어져 나간 도자기 파편을 다시 붙이기는 어려울 것 같아 그냥 사용한다. 다행히 차를 우려 마시는데 불편하지 않다.
나에게는 이렇게 이 빠진 접시며 찻잔들이 몇 개 있는데 여전히 잘 사용하고 있다. 모양은 완벽하지 않지만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살짝 상한 것들을 버리기 아깝기도 하지만 나와의 인연을 생각하면 쉽게 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몇 번을 망설이다 내 소유가 된 것, 누군가 소중한 마음을 담아 선물한 것, 여행길의 추억이 담긴 것들이기에 더욱 그렇다.
주로 도자기나 유리로 만들어진 차도구들은 사용하면서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잠깐 마음을 놓치거나 눈길을 거두면 여지없이 깨지거나 이가 나간다. 손놀림이 자연스럽지 않은 것까지도 물건들은 민감하게 알아차린다. 여린 것일수록 더 세심함이 필요하다. 손끝에 눈이 있어야 한다는, 눈길을 떼지 말아야 한다는 말의 의미를 몸으로 경험한다.
아끼는 몇 개의 다관이며 찻잔들을 잃고 난 후 찻자리에서의 손놀림과 마음 챙김은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제자리에 안전하게 놓기 전까지 끝까지 바라보며 마음을 풀지 않는다. 이렇게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는 몸과 마음의 다스림을 오랜 시간 반복하면서도 아끼는 차도구를 다룰 때는 여지없이 긴장된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이 긴장감을 물건에서 사람으로 옮기고 싶어졌다. 물건에 대한 세심한 배려가,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더욱 필요하지 않을까 싶었다. 혹여나의 다듬어지지 않은 행위나 언어들로 아끼는 사람들이 마음에 상처를 입거나 다치지 않았을지 염려하는 마음이 일었다.
‘다선일미(茶禪一味)’라는 말이 시원한 바람으로 마음을 스치고 지나간다. 가끔은 뜨거운 차를 마시면서 마치 박하 같은 청량감을 느낀다. 손에 들고 있는 찻잔은 뜨겁지만 찻물로 씻어내는 개운한 마음 때문일 것이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차를 우리며 하루를 정리하기 위해 다탁에 앉는다. 유리주전자에 물을 끓이며 혹여 깨질까 조심스러운 손놀림은 나의 시선을 너머 고요한 마음자리까지 어루만진다. 몸과 마음이 긴장을 풀고 편안해지는 시간이다. 이 시간을 통해 나는 또 내일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달가닥거리며 찻잔을 씻는 손놀림이 가볍고 경쾌한 밤이다.